<단독> 한국관광협회 200억 빌딩 편취 의혹

사라진 9억원 어디로…진실게임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어느 날 눈 떠보니 9억원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종교계 인사 문모씨는 자신의 계좌에서 9억원이 인출된 사실을 한 달이 지나서야 파악했다고 했다. 사라진 돈은 교회 목사, 화랑 대표, 유명 대학교수 등의 계좌로 흘러들었다. 일부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에 쓰였다. 사건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서울 인사동의 200억원대 건물을 둘러싼 소유권 분쟁이 막을 올린 것이다. 문씨 쪽은 "정부 유관단체가 자신들의 건물을 빼앗아갔다"라고 주장한다.

탑골공원과 조계사 사이에 있는 인사동거리에는 지하 4층, 지상 4층 규모의 '인사동 사이에'라는 건물이 있다. 전용면적 2339.54m²(약 700평), 감정가 220억원의 '인사동 사이에'는 지난 2014년 11월25일 '임의경매에 의한 매각'을 통해 한국관광협회중앙회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인사동 사이에
소유권 다툼

한국관광협회중앙회(이하 관광협회)는 민간 관광업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정부 사업을 위탁 운영해 온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특수법인이다. 그간 관광협회는 관광업계의 권익향상과 관광산업 선진화를 목표로 ▲연구개발 ▲박람회 유치 ▲관광 활성화 캠페인 ▲관광종사원 국가자격증 발급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올 7월 관광협회는 정부가 국회 추경예산으로 편성한 '관광진흥개발기금 특별융자'를 업계를 대표해 신청 받았다. 규모 4960억원의 특별융자금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관광업계를 지원한다는 명목에서 마련됐다. 앞서 남상만 관광협회 회장은 언론에 배포한 성명을 통해 관광분야 추경예산안 처리를 국회에 촉구한 바 있다.

남 회장은 외식·숙박업계에서 나름의 인지도를 쌓아올린 인물이다. 2003년 서울 명동에 있는 프린스호텔을 인수한 그는 2006년부터 10년째 서울시관광협회 회장과 한국외식업중앙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다. 2009년에는 관광협회 회장에 당선됐고, 2012년 연임에 성공했다. 같은 해 남 회장은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 대상자로 검토된 바 있다.


지난 3월 한 여행 전문지와 인터뷰한 그는 운영 중인 한국관광명품점의 매출을 신장시키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한국관광명품점은 문화체육관광부가 투자하고, 관광협회가 위탁 운영 중인 전통문화상품 판매업소다. 현재 '인사동 사이에' 1층에는 한국관광명품점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주 모르게
임대차 계약

박근혜정부는 한국관광명품점 임대보증금 명목으로 55억원을 관광협회에 지원했다. 그런데 관광협회는 '임대보증금'을 이용해 지난해 11월 인사동 건물을 '매입'했다.

문제의 인사동 건물을 둘러싸고 소유권 다툼이 있었다는 사실이 취재결과 확인됐다. 2013년 12월 관광협회는 보조금 55억원 가운데 일부를 수상한 '임대차계약'에 썼다. 이 가운데 9억원은 공중에 증발했다. 지난달 소유권 다툼의 당사자인 문모씨와 접촉할 수 있었다.

문씨는 '인사동 사이에'를 2012년 3월 매입한 종교계 인사다. 문씨는 채무자인 공창호씨로부터 건물 소유권을 이전 받았다. 고미술상인 공씨는 국세청과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다. 자금 융통이 어려웠던 공씨는 문씨에게 건물 소유권을 넘기면서 채무 상환을 유예해 달라고 요청했다.

문씨는 소유권을 받고 공씨에게 사무실을 내줬다. 공씨로부터 임대료를 받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나 공씨는 결국 임대료를 내지 못했다. 이에 문씨는 "미술품으로 대신 갚으라"라며 퇴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오랜 기간 해외에 체류해 국내 사정에 어두웠던 문씨는 공씨에게 한편으로 의지했다고 한다.

'악어와 악어새' 같던 둘 사이는 2014년 1월을 전후로 틀어졌다. 문씨와 남 회장이 2013년 12월 인사동 건물 '임대차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관련 계약 과정에서 문씨와 공씨는 서로 다른 의견을 냈다. 특히 문씨는 "(자신이) 관광협회와 임대차계약을 맺은 적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문씨 측의 진술과 공공기관(법원·구청·금융감독원) 발급 문서, 상호 계약서, 이메일, 기타 증빙자료 등을 토대로 요약한 사건 개요는 이렇다.


'인사동 사이에' 임대차계약서는 2013년 12월10일 작성됐다. 문씨는 남 회장이 서명한 계약서에 날인했다. 본지가 입수한 계약서 사본에 따르면 임차인 남 회장은 인사동 건물 지하 1층, 지상 1~2층을 임대하는 조건으로 54억원을 같은 달 31일까지 임대인 문씨에게 납부키로 했다. 계약 당일 남 회장이 선납입할 돈(계약금)은 9억원이었다.

작년 220억대 인사동 건물 경매로 사들여
매입 전 고미술상과 수상한 임대차 계약

그런데 문씨는 남 회장과 임대차계약서에 직접 날인하지 않았다. 문씨는 공씨의 아들인 공상구 마이아트옥션 대표에게 인감도장을 넘겼고, 남 회장은 관광협회 홍모 사무국장을 대리인으로 세웠다.

공 대표는 계약 협상 당시 자신 명의의 계좌로 계약금을 수령하고자 했다. 하지만 관광협회는 "임대인 본인 명의의 계좌가 필요하다"라며 문씨가 개설한 통장을 요구했다. 문씨는 이날 오후 공 대표의 연락을 받고 동행인과 함께 우리은행을 찾아 현금 1000원이 든 통장을 개설했다. 신규 계좌가 우리은행 전산망에 등록된 시간은 12월10일 오후 3시27분이다.

그러나 문씨 측은 "이때까지 관광협회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라고 주장했다. 공 대표가 '가계약'을 맺겠다고 했을 뿐 계약금에 대한 내용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관광협회는 "인감을 들고 왔기 때문에 공 대표를 믿고 계약금을 송금했다"라고 반박했다. 같은 날 오후 3시53분 관광협회는 두 차례에 걸쳐 5억원과 4억원을 각각 문씨 계좌로 입금했다.

문씨 측은 "임대인에게 확인 한 번 안 하고 9억원이라는 거액을 송금하는 게 가능한 일이냐"라고 물었다. 문씨의 은행거래 내역과 현장 CCTV 기록 등을 살피면 입금된 9억원은 당일 오후 3시59분께 수표로 전액 인출됐다. 수령인은 신원미상의 여성이며, 이날 오후 3시50분께부터 입금시간까지 우리은행 지점 한 창구를 서성인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은행 홍보팀은 "내부 절차대로 처리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수표 인출해
가족이 현금화

실제 문씨는 올 3월 금융감독원에 우리은행 측의 과실을 묻는 민원을 넣었다. '9억원에 달하는 거액이 6분 사이에 입금과 출금을 반복했음에도 은행 측이 이를 방기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은 올 4월 "관련 법규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은행 홍보팀 역시 "(인출한 사람이 가져온) 통장과 전표, 인감, 비밀번호가 모두 일치했기 때문에 수표를 지급했다"라고 말했다.

타행 관계자는 "입금 직후 갑자기 거액이 인출되는 경우 입금자에게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우리은행 측은 "내부 매뉴얼에 없는 것이라 별도로 확인해보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문제의 9억원은 여러 계좌에 흘러들었다. 30장의 수표를 각각 추적한 결과 계약금은 교회 목사 박모씨, 화랑 대표 김모씨, 유명 대학교수 유모씨 등의 계좌로 흘러갔다. 일부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에 쓰였다.

이 중 목사 박씨는 공씨의 아내이며, 받은 수표를 수차례 현금화했다. 박씨는 과거 필리핀 선교사업을 추진한 전력이 있다. 박씨는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연락하지 말라"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거액이 입금된 교수 유씨 역시 전화와 문자를 통한 문의에 답변을 거부했다.


사라진 9억원의 행방은 여전히 미궁이다. 단 공씨의 장녀가 1억원가량을 직접 수령한 사실이 계좌추적에서 밝혀졌다. 조심스레 이들 일가가 유용했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관련 계약을 성사시킨 공 대표와 연락했지만 회신을 받을 수 없었다.

문제의 9억원은 정부가 건물 임대보증금으로 빌려준 55억원 가운데 일부다. 결과적으로 당시 관광협회는 정부 보조금을 철저한 검증 없이 집행했다. 더구나 관광협회는 법원 경매가 진행되던 '인사동 사이에'에 입주를 시도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급한 사정이 없다면 유찰이 거듭되던 건물에 전세를 놓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라고 말했다.

관광협회는 임대차계약서를 작성한 다음날인 12월11일 채권단인 푸른상호저축은행에 "임대 계약의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자 한다"라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푸른상호저축은행은 계약일보다 앞선 10월22일 임의경매를 법원에 신청했다.

관광협회 사무국 직원은 지난 3일 "전임인 홍 국장이 새로 세들 건물을 찾던 중 공 대표의 지인을 통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사동 건물을 소개받았다"라며 "(채권자인) 저축은행과도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선계약, 후질의'에 대해선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관광협회는 계약이 체결되자 곧장 내부 인테리어 공사에 착수했다. 처음부터 건물 인수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특히 관광협회는 계약서에 별도 항목으로 "임대인이 임차인의 인테리어 공사에 적극 협조할 것"을 명시했다.

또 푸른상호저축은행이 지난해 2월 관광협회로 발송한 공문에 따르면 "경매가 완료될 경우 귀 협회의 임대차계약은 보호받지 못한다"라는 설명과 "(인테리어) 공사를 중단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음에도 공사를 강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관광협회는 1층 영업점에서 취급 제한 품목을 팔다가 지난해 8월 종로구청으로부터 고발당했다. 종로구청 측은 "우린 규정에 따라 고발했지만 수사기관이 처벌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문씨는 지난해 관광협회 측 직원들과 수차례 만나 '임대차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반면 관광협회 측은 "몰랐다"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같은 기간 문씨는 공 대표 등을 수사기관에 고발했다. 공 대표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중 관광협회는 160억원에 '인사동 사이에'를 단독 낙찰 받았다. 최저 입찰가(140억원)보다 20억원가량 웃돈을 지급한 사실도 확인됐다. 단독 입찰임을 고려하면 수상쩍은 대목이다.

전략적 매입?
보조금 투입!

관광협회의 인사동 건물 매입은 국회와 감사원으로부터 '보조금 유용' 사례로 지적됐다. 새정치민주연합 배재정 의원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관광협회가 당초 용도와 달리 보조금을 활용해 인사동 건물을 매입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관광협회는 정부 임대보증금과 남 회장 소유 프린스호텔로부터 대출받은 111억원을 더해 '인사동 사이에' 매입자금을 충당했다. 흥미로운 점은 관광협회가 인사동 건물을 매입한 뒤 다시 해당 건물에 108억원의 근저당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관련 담보대출금은 프린스호텔에 진 채무를 갚는데 사용됐다. 프린스호텔은 가만히 앉아서 이자를 챙긴 셈이었다. 감사원은 올 1월 공개한 특정감사 결과 발표에서 '보조금법 위반'과 '정관 위반' 사실을 적시했다.

문씨는 공 대표와 남 회장 사이의 사전 공모 여부를 의심한다.  관광협회 사무국과 푸른상호저축은행 관계자가 주고받은 이메일을 보면 이들은 2013년 11월부터 '인사동 사이에'의 임대차계약과 관련한 견적을 뽑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매와 상관없이 임대보증금을 보장받는 방안도 논의됐다. 아울러 문씨는 "우리가 갖고 있던 부실채권을 관광협회가 대신 사들였다"라며 "우리가 인사동 사이에 매각을 추진하자 건물에 가처분신청도 걸었는데 평범한 임차인이라면 왜 이런 짓을 하겠느냐"라고 말했다.

하지만 관광협회는 "우리가 처음부터 건물을 인수하려고 임대차계약을 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우리도 피해자다. 공 대표 등을 상대로 법적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해명했다. 당시 공 대표와 협상테이블에 앉았던 홍 국장은 회사를 퇴직한 상태로 전해졌다.

문씨 주장의 사실 여하를 떠나 사라진 9억원의 행방은 이번 수사를 통해 반드시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입장이 난처해진 공씨 등이 이곳저곳을 돌며 '인사'를 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 가운데 일부가 의외의 곳으로 전달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검찰 관계자는 "돈이 배달된 직접적인 진술 혹은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angeli@ilyosisa.co.kr>

 

<한국관광협회 200억 빌딩 편취 의혹 관련 정정 및 반론보도문>

본 신문 <일요시사>는 지1026호 종합면 및 인터넷 <일요시사> 2015.9.8.자 사건사고면 ‘<단독> 한국관광협회 200억 빌딩 편취 의혹’제목의 기사에서 한국관광협회가 서울 인사동 소재 200억 상당의 건물 소유권을 부당하게 이전받았고, 소유권 이전에 앞서 박근혜 정부에서 지원받은 55억원의 임대보증금 가운데 일부를 수상한 임대차계약에 썼으며 이 가운데 9억원이 사라졌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확인 결과 한국관광협회는 해당 건물을 정당한 법적 절차에 의해 소유권을 취득했으며 55억원의 임대보증금은 박근혜 정부가 아닌 1999년에 이미 지원받은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져 이를 바로 바로잡습니다.

아울러 한국관광협회는 임대차계약에 사용한 계약금 3억원은 정부 관련부서로부터 승인을 받고 집행한 것이며, 약 4억3000만원은 이미 회수하였고 나머지 금액은 회수를 위한 법적 절차를 진행 중에 있다고 알려 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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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