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36)정한근 한보그룹 부회장

수백억 빼돌리고 해외 잠적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40조원에 달했다. <일요시사>는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을 토대로 체납액 5억원 이상(법인은 10억원 이상)의 체납자를 추적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36화는 750억3400만원을 체납한 동아시아가스(EAGC)의 실소유주 정한근씨다.

고액체납자 정한근씨는 현재 행방불명 상태다. 그의 행적은 15년 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근씨는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의 4남으로 여러 차례 언론에 소개됐다. IMF 직전에는 한보그룹 부회장이란 직함도 달았다.

15년째 행방불명

정태수 일가는 각각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에 달하는 세금을 체납하고 있다. 정 회장은 1997년 1월부터 주민세 등 78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서울시가 징수할 체납액은 28억5100만원이다. 국세청의 자료에 따르면 정 회장은 1992년부터 증여세 등 73건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누적된 체납액은 2225억2700만원이다.

<일요시사>는 지난해 12월29일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⑤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편에서 정 회장의 숨겨진 재산과 근황 등을 조명한 바 있다. 당시 그의 아들 한근씨는 고액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근씨는 1997년부터 증여세 등 15건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한근씨가 체납한 세금은 293억8800만원이다.

정태수 일가가 떼먹은 세금의 합은 국세청 기준으로만 3199억5000만원에 이르렀다.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가 거둬갈 세금까지 더하면 실제 체납액은 3300억원을 초과할 것으로 추산됐다. 그러나 이를 징세할 대안이 없었다. 정 회장과 한근씨가 한국을 떠나는 동안 우리 사법당국은 일손을 놓고 있었다.


특히 한근씨는 1998년 한보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자취를 감췄다. 수사당국의 신병 확보가 늦어지면서 한근씨는 도주할 시간을 벌었다. 이후 미국에서 한근씨를 봤다는 소문이 무성할 뿐 실제 행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일각에선 한보그룹이 살포해 놓은 뇌물이 어마어마해 그를 잡지 않는 것이란 주장까지 나왔다.

행정당국 관계자는 "안 잡는 것이 아니라 못 잡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마음먹고 해외에서 잠적한 사람의 거처를 알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근씨 같은 경우) 자신 명의로 된 재산도 없을 텐데 힘들여 잡아봐야 무슨 실효가 있겠느냐"라며 "한 세무 공무원이 담당하는 체납자만 적게 잡아도 수백명인데 한근씨에게만 매달릴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렇지만 한근씨는 반드시 잡혀야 될 이유가 있다. 그는 지명수배자다. 지난 2008년 검찰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 국외 도피 및 횡령 혐의로 한근씨를 불구속기소했다"라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한근씨는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을 위해 설립된 동아시아가스㈜ 이사를 지내면서 회사 임직원들과 짜고 회사돈 3270만달러(당시 환율기준 323억5000만원)를 스위스 소재 한 은행의 차명계좌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한근씨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점을 고려해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소를 결정했다.

국세청 681억3500만원 서울시 69억원
스위스은행 차명계좌 수천만달러 은닉
 

한근씨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탈세를 실행한 1세대 가운데 한 명이다. 한근씨가 연루된 민사사건의 판결문을 보면 그의 범행수법이 잘 드러나 있다.

먼저 한근씨가 실소유주로 지목된 EAGC라는 회사가 있다. 언론에선 한글로 순화시켜 동아시아가스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다. EAGC는 '주식회사 이에이지씨' 'EAGC International Ltd' '사우스아시아 걸프 코퍼레이션' 등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이들 회사는 모두 EAGC가 만든 페이퍼컴퍼니다.
 


EAGC는 1996년 8월 현금 300억원을 들여 러시아에 있는 루시아석유회사 유상증자에 참여했다. 당시 EAGC는 미화 2512만달러에 루시아석유회사의 주식 1237만5000주를 취득했다. 지분율은 27.5%였다. 또 1449만달러를 투자담보금으로 러시아 수출입은행에 예치했다. 결론적으로 EAGC는 루시아석유회사를 통해 러시아 이르쿠츠크 지역 천연가스전 개발사업에 투자했다.

하지만 1997년 초 한보그룹이 부도를 맞고 계열사인 EAGC의 경영권이 채권단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한근씨가 움직였다. 한근씨는 대표이사였던 전모씨, 기획부장 임모씨 등과 공모해 루시아석유회사 주식에 대한 불법 처분을 감행했다.

한근씨는 1997년 11월 EAGC가 소유하고 있던 주식 가운데 900만주를 러시아에 있는 시단코사에 매각하기로 계약했다. 예상 매각대금은 5790만달러였다. 그런데 한근씨는 이 과정에서 남은 주식 매각과 관련해 날조된 계약서를 작성했다. 머스틸엔터프라이즈라는 회사에 540만주를, 보이드엔터프라이즈라는 회사에 360만주를 매각한 것처럼 꾸미고 계약대금은 각각 1512만달러, 1080만달러라고 기재했다. 실제 매각대금 중 2680만달러는 해외로 은닉했다.

문제의 비자금은 스위스 취리히 소재 히포스위스 은행에 윌카스사 명의로 예치됐다. 이 가운데 2230만달러는 1998년 3월 한근씨의 지시에 따라 싱가포르 소재 디비에스 은행에 송금됐다. 예금주는 '미주 인터내셔널 PTE'였다.

1998년 4월 한근씨는 말레이시아 자유무역지대에 투자목적회사 '사우스아시아 걸프 코퍼레이션'을 설립했다. 회사 자본금은 1달러에 불과했다. 사우스아시아 걸프 코퍼레이션의 주소지는 EAGC가 말레이시아에 세운 법인인 'EAGC International Ltd'의 주소지와 같았다. 이들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같은 달 사우스아시아 걸프 코퍼레이션은 '아시아엠 앤드 에이'라는 주식회사를 대리인으로 앞세워 EAGC에 300억원을 투자하는 내용의 외국인 투자신고서를 한국에 제출했다. 다음달 사우스아시아 걸프 코퍼레이션은 시티은행 서울지점에 2100만달러를 역으로 송금했다. 사우스아시아 걸프 코퍼레이션은 EAGC가 발행한 신주인수권 600만1주를 모두 사들여 EAGC의 대주주가 됐다. EAGC가 이 같은 거래로 챙긴 돈은 3270만달러에 달했다.

유령회사 이용

EAGC의 등기상 대표는 송태주씨다. 그러나 송씨는 한근씨의 하수인이었을 뿐 실제 책임은 한근씨에게 있다. EAGC(동아시아가스)는 1997년부터 근로소득세 등 7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국세청이 과세한 세금은 387억4700만원이다. EAGC는 1999년 3월부터 주민세 등 16건의 지방세도 내지 않았다. 서울시가 거둘 세금은 68억9900만원이다.

최근 세무당국 관계자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정 회장이 아직 중앙아시아에서 자원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정 회장을 돕는 세력이 한근씨를 비롯한 자녀들이라고 관계자는 귀띔했다. 또 검찰에 따르면 한근씨는 스위스 외에도 미국 등에 비자금 계좌를 따로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쯤에서 의문은 다시 돌아온다. 한근씨는 못 잡는 것일까, 아니면 안 잡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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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