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영화처럼 살다간 이맹희

하고 싶은, 묻어둔 이야기가 많은데…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이 명예회장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비운의 삼성가 장남’으로 재계 오너의 일원으로서 누구보다 많은 파도를 탔던 그다. 화려한 출생과 비운의 주인공이었던 이 명예회장의 84년을 되돌아봤다.  

이맹희 명예회장은 1931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그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3남 5녀(이맹희·이창희·이건희·이인희·이숙희·이숙희·이순희·이명희) 중 장남이다. 이 명예회장은 어린 시절 대구 수창초등학교와 경북중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입학은 서울(수송초등학교)에서 했으나 이내 대구로 내려갔다.
 
잘나간 젊은 시절
탄탄대로였는데… 
 
이 명예회장은 광복 이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도쿄농업대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 막바지인 1956년 12월1일 손복남 CJ 고문과 결혼했다. 당시 이 둘은 만난 지 한달 만에 혼사를 올렸지만, 이 명예회장은 생전 “빠른 속도로 성사된 결혼이었지만, 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결혼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일본 유학을 마친 이 명예회장은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결혼식을 치른 지 두 달 만인 1957년 2월이다. 이 명예회장은 미국에서 미시간주립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명예회장은 그야말로 ‘황태자’에 울리는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다.
 

1960년 이 명예회장은 한국에 돌아왔다. 그의 첫 직장은 한일은행이었다. 이 명예회장은 한일은행에 입사한지 2년 만인 1962년 안국화재로 직장을 옮겼다. 당시 이 명예회장을 경계한 이병철 회장의 비서진이 이 명예회장을 모함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명예회장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이병철 회장의 일부 비서진이 이 명예회장의 그룹 경영 참여를 차단하기 위해 모함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일은행에 입행한 이 명예회장이 행장에게 대들고 대부 알선을 해주면서 ‘커미션’을 받는다는 등 근무태도가 불성실하다고 이병철 회장에게 보고됐다. 이에 화가 난 이병철 회장이 이 명예회장을 한일은행에서 나오게 해 안국화재에 들여보냈다는 비화가 전해진다.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 3남5녀 중 장남
대권 내준 비운의 황태자 파란만장한 삶
 
하지만 이 명예회장은 삼성그룹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창업주의 장남으로서 그룹 후계자 과정을 착실히 밟아 나갔다. 그러나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고, 이병철 회장이 열한 살이나 아래 동생인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후계 자리를 내주면서 그의 인생은 파도의 연속이 됐다.
 
이 명예회장의 변곡점은 1966년에 찾아왔다. 이병철 회장이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면서다. 
 
1966년 5월24일 삼성이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포대(약 55톤)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났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000여만원을 부과했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000만달러까지 들여왔다.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이토록 국가적으로 거대한 파문이 일어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박정희 정부가 내걸은 국정 구호가 구악 일소, 즉, 부패척결이었다. 그런데 사카린 사건으로 정권의 모순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당시 삼성에서 중앙일보를 세우고 언론계에 진출할 시기와 맞물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사카린 사건에 대한 경쟁사 언론들의 공격이 따가웠다. 이러한 복합적인 작용으로 사카린 사건은 범국민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의 차남 이창희 한국비료 상무가 구속됐다.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 지분 51%를 국가에 헌납한 후 재계 은퇴까지 선언하고 그룹 경영에서 물러났다. 이 계기로 이 명예회장은 삼성의 총수에 올랐다. 비록 불미스럽게 총수에 오르긴 했으나, 장남으로서 그의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이 명예회장은 10여개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당시 삼성 참모진에게 “맹희 부사장에게 세 번을 요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내게 가져오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장자 상속의 대원칙에서 삼성의 대권을 받은 이 명예회장의 경영 행보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사카린 사건 후
부친 눈밖에 나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 ‘주위의 권고도 있고 본인의 희망도 있어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 보았다’며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되어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이 명예회장으로서는 부친의 경영 부재가 자신의 경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오히려 이때가 부친의 눈 밖으로 나는 결정적인 시기가 됐다.
 
거기에 결정적인 한방이 있었다. 1969년 이병철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려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에게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는 이병철 회장이 직접 개입됐다는 내용의 투서가 전달된 것. 이른바 ‘청와대 투서사건’이다. 이 투서에는 이병철 회장의 탈세와 비리 내용을 소상히 기록돼 있었다. 이 투서의 작성자로 이 명예회장이 주목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부자 관계는 틀어지고 만다. 이 명예회장은 이 일을 두고 평생을 억울해 했다. 
 
이에 대해 이 명예회장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삼성 일가에서는 오히려 이 명예회장이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다. 결국 이 명예회장은 1973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동생인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그룹 총수 자리를 내주고 만다. 
 
이후 1976년 9월쯤 이병철 회장은 암수술 차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 밤, 가족회의에서 삼성의 차기 경영자로 삼남 이건희 회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서 구두로 유언을 밝혔다. 
 
이 명예회장은 아버지로부터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명예회장은 “그 말을 듣는 순간의 충격을 나는 잊지 못한다”며 “그 무렵엔 벌써 아버지와의 사이에 상당한 틈새가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언젠가는 나에게 삼성의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이병철 회장과 가족들이 자신을 정신병 환자로 몰아갔다는 점도 회상했다. 그는 “부산의 어느 양심 없는 의사를 찾아가 당시 돈으로 300만원인가를 주고 내가 정신병이라는 의사 소견서를 받아냈다고 한다”고 적었다.
 
1984년 9월 중순 어느 날 밤 이 명예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부산 해운대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브라우닝 6연발 샷건이 있었다. 잠시 뒤 현관문에서 건장한 사내 둘이 들어오더니 주춤거리며 “삼성 비서실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화를 참지 못하고 총을 쏴서 사내들을 별장에서 몰아냈다고 한다. 이 명예회장은 이를 가족들이 자신을 정신병 환자로 몰아 격리시키려는 시도였다고 회상했다.
 
 
1987년 이 창업주가 작고한 뒤 이 명예회장은 해외로 떠났다. 그 이유에 대해 이 명예회장은 “동생 건희가 정식으로 삼성의 총수가 된 마당에 그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혹시 조금이라도 건희가 나를 부담스러워하면 그것이 바로 삼성의 경영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외국에서 영원히 살면서 귀국하지 않을 생각을 했었다”고 했다.
 

이 명예회장은 이후 5년여 동안 아프리카, 남미,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여러 나라를 다니며 노력했지만 한 곳에 6개월 이상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아버지와의 갈등,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 등이 공개된 것은 지난 1993년 이 명예회장이 <하고 싶은 이야기> <묻어둔 이야기> 등의 책을 내면서다. 이 명예회장은 책 출간 이후 다시 은둔에 들어갔고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훗날 제일제당이 삼성에서 계열 분리해 나오고 CJ로 이름을 바꿨지만, 이 명예회장은 경영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장남인 이재현 회장의 딸이자 직계손녀의 결혼식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동생에 밀리고 
평생 야인으로
 
이 명예회장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간혹 친자확인 소송 등 양육비 소송 등으로 구설에 올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뿐, 맹희씨의 거취는 베일에 싸여있었다.
 
이 명예회장은 그동안 이건희 회장과 재산 분쟁으로 언론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2012년 이건희 회장은 형을 ‘이맹희씨’라고 지칭하며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출근길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형을 지칭해 “우리 집에서 퇴출당한 사람, 나를 포함해 누구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발했던 사람”이라며 청와대 투서 사건의 배후가 이맹희 명예회장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이건희 회장이 이 명예회장에게 날 선 비판을 쏟아낸 것은 소송 때문이었다. 지난 2012년 이 명예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아버지 유산을 내놔라”며 소송을 걸었다. 1990년대에 이 명예회장과 이건희 회장 등 자녀들의 유산 분배는 다 끝났으나 뒤늦게 알려진 유산이 따로 있었다. 
 
가족간 사이 틀어지면서 불행
결국 외국서 쓸쓸하게 눈감아
 
이병철 회장이 다른 사람 이름으로 보유했던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의 차명 주식이었다. 2007년 삼성 법무팀 소속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통해 삼성 비자금을 폭로했다. 그러자 이건희 회장은 관련 주식 명의를 자기 이름으로 변경했다. 
 
여기서 이맹희-이건희 형제 간의 법적 다툼이 시작됐다. 세간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이 명예회장이 7000억원대의 상속재산 분할 청구소송을 걸었다. 아버지의 유산이니 100% 이건희 회장 몫이 아니라며 제동을 건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이 명예회장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1, 2심에서 패했다. 지난해 2월 상고를 포기하면서 상속 소송은 끝났다. 
 
 
항소심 재판 결심공판에서 이 명예회장은 재판부에 A4 용지 5장 분량의 편지를 제출하며 이건희 회장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이 명예회장은 “CJ가 대한통운을 인수하는 것을 방해하고, 삼성이 거래하던 대한통운 물량을 빼는가 하면 재현이 CJ그룹 회장을 미행하고,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다”며 섭섭함을 드러냈다.
 
이 명예회장의 별세로 형제 간 직접 화해는 영영 이룰 수 없는 꿈이 됐다. 지난 14일 이 명예회장은 중국 베이징에서 숨을 거뒀다. 2012년 폐암 진단을 받은 뒤 수술했지만 암이 재발했고 타향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건희 회장도 지난해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지금까지 병상에 누워 있다. 이로써 삼성가 2세대의 화해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이 명예회장의 장남인 이재현 회장은 입관식과 발인 직전 두 차례에 걸쳐 입관실(시신안치실)을 찾아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지난 17일 이 명예회장의 관을 봉인하기 전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재현 회장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고, 관이 끝내 닫히는 순간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크게 오열했다. 이 명예회장은 당초 예상보다 많은 약 17분이 흐른 뒤  입관실을 빠져나와 암병동 입원실로 향했다.

말년엔 가족소송
끝내 갈등 못풀어
 
이재현 회장은 발인식 전날인 19일 밤 11시 30분경에도 다시 장례식 지하 1층에 위치한 시신 안치실을 찾았다. 다음날 있을 발인식에 앞서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일 것이다. 이재현 회장은 부인과 아들 선호 등 직계가족만 함께한 채 입관실내 시신안치실에 있던 아버지의 관을 수차례 쓰다듬으며 눈물을 삼켰으며, 약 12분이 흐른 뒤 입관실을 빠져나왔다.
 
 
<min1330@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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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