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속내 궁금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어떻게 일궜는데 네놈들이…”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그동안 롯데그룹 경영권을 놓고 두 아들 사이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창업자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두 아들은 기어코 아버지를 가운데 두고 ‘형제의 난’을 벌였다. 장남은 신 총괄회장을 앞세워 경영권을 장악하려 했고, 차남은 그런 아버지를 총괄회장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게 했다. 자식들의 재산 싸움과 복잡한 가계도로 신 총괄회장의 노년은 복잡하기만 하다.

신 총괄회장은 1922년에 태어났다. 원래는 1921년생이지만 호적에 1년 늦게 올라간 것으로 전해진다.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울산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경남도립 종축장에 말을 돌보는 기수보로 일했다. 
 
단돈 38엔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 총괄회장이 19살이 되던 1941년 돈을 벌 작정으로 단돈 83엔을 들고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조선인’이라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에 있는 고향친구 자취방에 얹혀살며 신문·우유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잡일을 했다.
 
신 총괄회장은 이때 당시만 해도 작가를 꿈꾸는 문학도였다. 돈만 모이면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특히 세계적인 문학가인 괴테를 동경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학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서였다. 그는 결국 기술만이 살길이라 느끼며, 와세다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신 총괄회장은 1944년 대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일본 패전의 기색이 짙었다. 조선인 청년의 성실성을 평소 눈여겨보던 한 일본인 노인은 신 총괄회장에게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사업을 제안했다. 그 노인은 선뜻 6만엔을 내놓았다. 그러나 첫 사업체는 미군의 공습을 맞아 완전히 불타버렸다. 신 총괄회장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많은 한국인은 귀국에 올랐다. 신 총괄회장 친구들 역시 “귀국선을 타고 돌아가자”며 종용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는 살 수 없다며, 일본에 남았다. 그는 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의 낡은 창고에 가마솥을 내걸었다. 그는 커팅오일을 응용해 비누와 크림을 만들어 팔았다. 신 총괄회장이 만든 비누는 불티나게 팔리면서 1년반만에 노인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으며, 감사의 표시로 집을 한 채 사서 선물했다. 이때부터 그의 사업가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 총괄회장은 남은 밑천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린다. 유지류나 특수고무 같은 물질들을 연구했다. 당시 시판된 껌들을 연구했는데, 이들의 장점을 모두 집약해서 껌을 개발했다. 신 총괄회장이 개발한 껌은 인기가 좋았다. 과자점 주인들이 서로 납품하겠다고 신 총괄회장의 연구소 앞에는 새벽부터 줄설 정도였다. 신 총괄회장은 투자자를 모집에 본격적으로 회사를 차려 껌을 팔기로 했다. 
 
껌으로 세운 재계 5위…무너진 성공신화
장·차남 경영권 싸움…아버지 누구 편?
 
1948년 신 총괄회장은 신주쿠 허허벌판에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를 탄생시켰다. 롯데라는 이름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샬롯데 이름에서 유래됐다. 껌회사에 붙인 이름 치곤 생뚱맞아 보이지만, 못다 한 신 총괄회장의 문학 작가의 꿈을 투영한 것이었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껌으로 시작한 롯데는 오늘날 재계 롯데그룹의 효시였다.
 
신 총괄회장은 껌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롯데 상사, 롯데 부동산, 롯데아도, 롯데 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상업, 유통업을 망라한 일본의 10대 재벌이 됐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의 롯데 오리온스를 인수해 현재까지 3대 구단주로 소유하고 있다. 
 
1965년 한일수교로 일본 기업이 한국에 대한 투자가 가능해지자 1966년 롯데알미늄,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국내에서 라면과 과자로 종합 식품기업의 토대를 다져갔다. 그 뒤 한국에서도 사업을 다른 분야로 확장한다. 1973년 호텔롯데, 롯데 전자, 롯데 기공을 설립. 1974년 롯데 산업, 롯데 상사, 롯데 칠성 음료를 설립한다. 이외 한국 후지 필름, 대홍기획 등 건설사와 화학 공장 등 식품·유통·관광·건설을 아우르는 국내 재계 5위 종합 그룹으로 성장했다.  
 
신 총괄회장은 나이를 먹어가며, 그의 꿈을 대부분 이뤘다. 하지만 마지막 꿈이 남았다. 세계 최고 높이의 테마파크를 짓는 것이었다. 이른바 지금의 ‘제2롯데월드’였다. 
 

끝없는 사업 확장
제2롯데 화룡정점
 
신 총괄회장이 제2롯데월드 사업을 구상한 것은 1987년부터였다. 당시 계획은 잠실 롯데월드 부지 옆에 108층 높이의 마천루를 짓겠다는 거였다. 1994년부터 본격적인 사업 준비를 했다. 하지만 1998년 암초에 부딪혔다. 인근에 있는 성남 서울공항 활주로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공군 기지로 쓰이는 곳이라, 근처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 전투기 조종사 시야 확보가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근처에 고층 빌딩 높이 제한으로 부지 허가를 받기 어려웠다. 게다가 외환 위기도 겹쳐 자금 조달도 어려웠다. 

신 총괄회장은 꿈을 접을 수 없었다. 김대중정부 말기 사업을 다시 추진했다. 계획도 더 키웠다. 계획했던 108층 높이(450m)를 123층 높이(555미터)로 수정했다. 노무현정부 시절 2006년 착공식을 했다. 하지만 서울공항 활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탓에 공사는 곧바로 중단됐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서자 건물 높이 제한 규제가 풀렸다. 2009년 최종 허가가 났다. 
 
2013년부터 제2롯데월드는 부분 개장했다. 당초 2015년 12월 완공 예정이었으나, 약 1년 연기되어 2016년 말에 완공될 예정이다. 이 건물은 그동안 한반도 최고층 빌딩이었던 높이 330m, 101층의 평양 류경호텔을 제치고 한반도 최고 높이의 건물이 되며, 완공 시 세계에서 6번째(555m)로 높은 빌딩이 된다. OECD 국가 중에서는 미국의 1WTC를 제치고 가장 높은 건물이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500m)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제2롯데월드를 개장하고 온갖 사고가 잇따랐다. 거푸집 장비가 무너져 노동자가 사망했으며, 배관이음 폭발, 추락사 등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또 메가기둥, 피복 균열, 석촌호수 수위 변화, 석촌지하차도 싱크홀 등 안전성 논란도 끊이질 않았다. 여론이 나빠지자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으며, 서울시가 나서기도 했다. 정밀 안전 진단을 실시했고, 재개장 허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롯데월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신 총괄회장은 1970년대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사업이 점차 확장되자 홀수 달엔 한국에서, 짝수 달엔 일본에서 머물며 셔틀경영을 펼쳤다. 이 때문에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93세가 된 현재까지 경영일선을 지켜왔다.
 
신 총괄회장은 성공한 사업가인 반면, 가족사는 전체적으로 불운하다. 신 총괄회장은 유난히 형제간 다툼이 심해 '비운의 빅 브라더'로 불리기도 했다. 롯데그룹 초창기 신 총괄회장은 남동생을 모두 경영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크고 잦은 분쟁이 이어지면서 동생들은 모두 분가(分家)했다. 남동생은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이다.
 
아래 동생인 신철호 전 롯데사장은 1958년 신 총괄회장이 국내에 없는 틈을 타 서류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롯데를 인수하려다 발각돼 구속됏다. 이후 신격호 회장과 틀어진 그는 작은 제과 회사를 차려 독립했고, 지금은 고인이 됐다. 3남 신춘호 회장과는 현재 전혀 교류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불씨는 ‘라면’이었다.
 
신춘호 회장은 일본 롯데 이사로 재직하던 1960년대 신격호 회장의 만류에도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1965년 아예 롯데공업을 차리며 기존 롯데의 라면 사업과 경쟁을 벌이자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신춘호 회장은 롯데공업을 농심으로 개명하면서 롯데 이름을 포기했다.두 사람 사이의 앙금은 깊어 신춘호 회장은 아직까지 부친 제사에도 일절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막내동생인 신준호 푸르밀 회장은 롯데제과ㆍ롯데칠성ㆍ롯데물산 등 주요 계열사의 대표를 두루 거쳤고 롯데그룹의 컨트롤타워인 운영본부의 부회장을 맡는 등 사실상 신 총괄회장을 대신해 한국 롯데 경영을 실무적으로 총괄했다.
 
그러나 지난 1996년 서울 양평동 롯데제과 부지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법정 소송을 치르며 사이가 벌어졌다. 이후 그는 그룹의 요직에서 밀려났고 2007년 롯데그룹에서 분할된 롯데우유 회장으로 취임했다. 롯데우유는 롯데 브랜드 사용 금지 요청에 2009년 사명을 푸르밀로 바꾸면서 롯데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
 
복잡한 갈등구도

복잡한 가족관계
 
신 총괄회장은 24살 터울 막내 여동생 부부와도 갈등의 골이 깊다. 막내 매제인 롯데관광 김기병 회장과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 부부를 상대로 샤롯데 엠블럼 사용을 금지하는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갈등을 겪었다. 특히 롯데그룹이 2007년 롯데JTB를 설립하면서 관광업에 진출해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신 총괄회장의 가족사 또한 복잡하다. 신 총괄회장은 18세 때 노순화와 결혼했다. 노씨는 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인 신영자씨의 모친이다. 신 총괄회장은 노씨와 결혼을 한 상태에서 1941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 딸인 다케모리 하쓰코와 1950년 중혼을 했다. 
 
두 번째 부인이 된 하쓰코는 1945년 9월2일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석했다가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전범 시게미쓰 마모루의 조카다. 그녀의 부친은 일본 육군대좌로 1944년 사이판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또 신 총괄회장이 일본에서 성공한 데에는 하쓰코의 친정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신격호는 하쓰코와 결혼하면서 그의 외삼촌의 성씨를 따 시게미쓰 다케오로 창씨개명을 했고, 부인 역시 남편 성을 따른다는 일본의 관습에 따라 시게미쓰로 성씨를 바꿨다. 타국에서 사업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일본 명문가와 피를 섞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으로 귀화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신동주(히로유키), 신동빈(아키오) 형제 역시 한국 국적이다. 신격호가 일본에서 사업 기반을 다지는 사이, 첫 번째 부인인 노씨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동안 잡음 끊이지 않더니…
결국 갈등 수면 위로 떠올라
 
신격호의 세 번째 부인 서미경씨도 빼놓을 수 없다. ‘롯데의 별당마님’으로 불리는 서미경씨는 제1회 미스롯데(1977) 출신으로 영화배우로 활동하다 돌연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37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신격호의 세 번째 부인으로 깜짝 등장해 구설에 올랐다. 그는 백화점과 영화관 매점 사업권 등 알짜 사업을 소유하며 그룹 내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딸 신유미씨를 신격호의 호적에도 올릴 정도로 각별한 사이라고 한다.
 
 
이번 ‘형제의 난’으로 드러난 불투명한 롯데그룹의 지배 구조가 드러났다. 특히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경영권 분쟁이 첨예한 가운데 롯데그룹 지배구조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혔다. 첫째 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과 셋째 부인 서미경씨의 딸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도 롯데그룹의 소수지분을 갖고 있어 팽팽한 지분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일단 재계 안팎에서는 신동주 전 부회장의 경영권 확보 시도를 무산시킨 차남 신동빈 회장의 절대 우세를 점치고 있다. 하지만 롯데그룹의 복잡한 지분구조 등을 고려할 때 신동주 전 부회장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분을 확보한 뒤 신동빈 회장을 향한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룹의 총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롯데판 왕자의 난'이 사실상 본 궤도에 들어섰다는 분석이다. 
 
롯데그룹 계열사의 대표격인 롯데쇼핑의 경우 신동빈 회장(13.46%)과 신동주 전 부회장(13.45%)의 지분율은 사실상 동일하다. 롯데제과도 신동빈 회장은 5.34%, 신동주 전 부회장은 3.92%를 보유하고 있다.
롯데칠성은 각각 5.71%와 2.83%다. 무엇보다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일본 비상장 법인 광윤사의 경우 현재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은 29%씩, 신 총괄회장은 3%를 보유하고 있다. 신 총괄회장의 지분율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오랜 기간 광윤사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롯데그룹을 지배해 왔다. 따라서 신 총괄회장의 의중에 따라 후계구도에 변동이 생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등의 행보도 변수로 꼽힌다. 앞서 신동주 전 부회장이 지난달 27일 신 총괄회장의 일본행을 주도할 때 신 이사장 역시 조카인 신동인(69) 롯데자이언츠 구단주 직무대행 등과 동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놓고 재계에서는 신 총괄회장의 형제자매도 신동빈 회장의 반대편에 섰다는 관측이 나왔다.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영자 이사장이 연합할 경우 한국 롯데그룹 일부 계열사에서는 신 회장의 지분율을 앞서게 된다.
 
경영승계 임박
자녀끼리 혈투
 
한편 지난달 30일 신동주 전 부회장이 자신을 다시 롯데홀딩스 사장에 임명한다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서명 지시서를 공개했다. 신 총괄회장이 이 지시서로 이사들을 해임시키려 했으나 이사들이 불복하자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게 신 전 부회장의 주장이다. 
 
 
<min1330@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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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