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속내 궁금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어떻게 일궜는데 네놈들이…”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그동안 롯데그룹 경영권을 놓고 두 아들 사이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창업자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두 아들은 기어코 아버지를 가운데 두고 ‘형제의 난’을 벌였다. 장남은 신 총괄회장을 앞세워 경영권을 장악하려 했고, 차남은 그런 아버지를 총괄회장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게 했다. 자식들의 재산 싸움과 복잡한 가계도로 신 총괄회장의 노년은 복잡하기만 하다.

신 총괄회장은 1922년에 태어났다. 원래는 1921년생이지만 호적에 1년 늦게 올라간 것으로 전해진다.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울산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경남도립 종축장에 말을 돌보는 기수보로 일했다. 
 
단돈 38엔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 총괄회장이 19살이 되던 1941년 돈을 벌 작정으로 단돈 83엔을 들고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조선인’이라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에 있는 고향친구 자취방에 얹혀살며 신문·우유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잡일을 했다.
 
신 총괄회장은 이때 당시만 해도 작가를 꿈꾸는 문학도였다. 돈만 모이면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특히 세계적인 문학가인 괴테를 동경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학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서였다. 그는 결국 기술만이 살길이라 느끼며, 와세다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신 총괄회장은 1944년 대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일본 패전의 기색이 짙었다. 조선인 청년의 성실성을 평소 눈여겨보던 한 일본인 노인은 신 총괄회장에게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사업을 제안했다. 그 노인은 선뜻 6만엔을 내놓았다. 그러나 첫 사업체는 미군의 공습을 맞아 완전히 불타버렸다. 신 총괄회장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많은 한국인은 귀국에 올랐다. 신 총괄회장 친구들 역시 “귀국선을 타고 돌아가자”며 종용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는 살 수 없다며, 일본에 남았다. 그는 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의 낡은 창고에 가마솥을 내걸었다. 그는 커팅오일을 응용해 비누와 크림을 만들어 팔았다. 신 총괄회장이 만든 비누는 불티나게 팔리면서 1년반만에 노인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으며, 감사의 표시로 집을 한 채 사서 선물했다. 이때부터 그의 사업가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 총괄회장은 남은 밑천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린다. 유지류나 특수고무 같은 물질들을 연구했다. 당시 시판된 껌들을 연구했는데, 이들의 장점을 모두 집약해서 껌을 개발했다. 신 총괄회장이 개발한 껌은 인기가 좋았다. 과자점 주인들이 서로 납품하겠다고 신 총괄회장의 연구소 앞에는 새벽부터 줄설 정도였다. 신 총괄회장은 투자자를 모집에 본격적으로 회사를 차려 껌을 팔기로 했다. 
 
껌으로 세운 재계 5위…무너진 성공신화
장·차남 경영권 싸움…아버지 누구 편?
 
1948년 신 총괄회장은 신주쿠 허허벌판에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를 탄생시켰다. 롯데라는 이름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샬롯데 이름에서 유래됐다. 껌회사에 붙인 이름 치곤 생뚱맞아 보이지만, 못다 한 신 총괄회장의 문학 작가의 꿈을 투영한 것이었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껌으로 시작한 롯데는 오늘날 재계 롯데그룹의 효시였다.
 
신 총괄회장은 껌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롯데 상사, 롯데 부동산, 롯데아도, 롯데 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상업, 유통업을 망라한 일본의 10대 재벌이 됐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의 롯데 오리온스를 인수해 현재까지 3대 구단주로 소유하고 있다. 
 
1965년 한일수교로 일본 기업이 한국에 대한 투자가 가능해지자 1966년 롯데알미늄,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국내에서 라면과 과자로 종합 식품기업의 토대를 다져갔다. 그 뒤 한국에서도 사업을 다른 분야로 확장한다. 1973년 호텔롯데, 롯데 전자, 롯데 기공을 설립. 1974년 롯데 산업, 롯데 상사, 롯데 칠성 음료를 설립한다. 이외 한국 후지 필름, 대홍기획 등 건설사와 화학 공장 등 식품·유통·관광·건설을 아우르는 국내 재계 5위 종합 그룹으로 성장했다.  
 
신 총괄회장은 나이를 먹어가며, 그의 꿈을 대부분 이뤘다. 하지만 마지막 꿈이 남았다. 세계 최고 높이의 테마파크를 짓는 것이었다. 이른바 지금의 ‘제2롯데월드’였다. 
 

끝없는 사업 확장
제2롯데 화룡정점
 
신 총괄회장이 제2롯데월드 사업을 구상한 것은 1987년부터였다. 당시 계획은 잠실 롯데월드 부지 옆에 108층 높이의 마천루를 짓겠다는 거였다. 1994년부터 본격적인 사업 준비를 했다. 하지만 1998년 암초에 부딪혔다. 인근에 있는 성남 서울공항 활주로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공군 기지로 쓰이는 곳이라, 근처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 전투기 조종사 시야 확보가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근처에 고층 빌딩 높이 제한으로 부지 허가를 받기 어려웠다. 게다가 외환 위기도 겹쳐 자금 조달도 어려웠다. 

신 총괄회장은 꿈을 접을 수 없었다. 김대중정부 말기 사업을 다시 추진했다. 계획도 더 키웠다. 계획했던 108층 높이(450m)를 123층 높이(555미터)로 수정했다. 노무현정부 시절 2006년 착공식을 했다. 하지만 서울공항 활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탓에 공사는 곧바로 중단됐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서자 건물 높이 제한 규제가 풀렸다. 2009년 최종 허가가 났다. 
 
2013년부터 제2롯데월드는 부분 개장했다. 당초 2015년 12월 완공 예정이었으나, 약 1년 연기되어 2016년 말에 완공될 예정이다. 이 건물은 그동안 한반도 최고층 빌딩이었던 높이 330m, 101층의 평양 류경호텔을 제치고 한반도 최고 높이의 건물이 되며, 완공 시 세계에서 6번째(555m)로 높은 빌딩이 된다. OECD 국가 중에서는 미국의 1WTC를 제치고 가장 높은 건물이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500m)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제2롯데월드를 개장하고 온갖 사고가 잇따랐다. 거푸집 장비가 무너져 노동자가 사망했으며, 배관이음 폭발, 추락사 등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또 메가기둥, 피복 균열, 석촌호수 수위 변화, 석촌지하차도 싱크홀 등 안전성 논란도 끊이질 않았다. 여론이 나빠지자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으며, 서울시가 나서기도 했다. 정밀 안전 진단을 실시했고, 재개장 허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롯데월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신 총괄회장은 1970년대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사업이 점차 확장되자 홀수 달엔 한국에서, 짝수 달엔 일본에서 머물며 셔틀경영을 펼쳤다. 이 때문에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93세가 된 현재까지 경영일선을 지켜왔다.
 
신 총괄회장은 성공한 사업가인 반면, 가족사는 전체적으로 불운하다. 신 총괄회장은 유난히 형제간 다툼이 심해 '비운의 빅 브라더'로 불리기도 했다. 롯데그룹 초창기 신 총괄회장은 남동생을 모두 경영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크고 잦은 분쟁이 이어지면서 동생들은 모두 분가(分家)했다. 남동생은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이다.
 
아래 동생인 신철호 전 롯데사장은 1958년 신 총괄회장이 국내에 없는 틈을 타 서류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롯데를 인수하려다 발각돼 구속됏다. 이후 신격호 회장과 틀어진 그는 작은 제과 회사를 차려 독립했고, 지금은 고인이 됐다. 3남 신춘호 회장과는 현재 전혀 교류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불씨는 ‘라면’이었다.
 
신춘호 회장은 일본 롯데 이사로 재직하던 1960년대 신격호 회장의 만류에도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1965년 아예 롯데공업을 차리며 기존 롯데의 라면 사업과 경쟁을 벌이자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신춘호 회장은 롯데공업을 농심으로 개명하면서 롯데 이름을 포기했다.두 사람 사이의 앙금은 깊어 신춘호 회장은 아직까지 부친 제사에도 일절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막내동생인 신준호 푸르밀 회장은 롯데제과ㆍ롯데칠성ㆍ롯데물산 등 주요 계열사의 대표를 두루 거쳤고 롯데그룹의 컨트롤타워인 운영본부의 부회장을 맡는 등 사실상 신 총괄회장을 대신해 한국 롯데 경영을 실무적으로 총괄했다.
 
그러나 지난 1996년 서울 양평동 롯데제과 부지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법정 소송을 치르며 사이가 벌어졌다. 이후 그는 그룹의 요직에서 밀려났고 2007년 롯데그룹에서 분할된 롯데우유 회장으로 취임했다. 롯데우유는 롯데 브랜드 사용 금지 요청에 2009년 사명을 푸르밀로 바꾸면서 롯데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
 
복잡한 갈등구도

복잡한 가족관계
 
신 총괄회장은 24살 터울 막내 여동생 부부와도 갈등의 골이 깊다. 막내 매제인 롯데관광 김기병 회장과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 부부를 상대로 샤롯데 엠블럼 사용을 금지하는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갈등을 겪었다. 특히 롯데그룹이 2007년 롯데JTB를 설립하면서 관광업에 진출해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신 총괄회장의 가족사 또한 복잡하다. 신 총괄회장은 18세 때 노순화와 결혼했다. 노씨는 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인 신영자씨의 모친이다. 신 총괄회장은 노씨와 결혼을 한 상태에서 1941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 딸인 다케모리 하쓰코와 1950년 중혼을 했다. 
 
두 번째 부인이 된 하쓰코는 1945년 9월2일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석했다가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전범 시게미쓰 마모루의 조카다. 그녀의 부친은 일본 육군대좌로 1944년 사이판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또 신 총괄회장이 일본에서 성공한 데에는 하쓰코의 친정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신격호는 하쓰코와 결혼하면서 그의 외삼촌의 성씨를 따 시게미쓰 다케오로 창씨개명을 했고, 부인 역시 남편 성을 따른다는 일본의 관습에 따라 시게미쓰로 성씨를 바꿨다. 타국에서 사업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일본 명문가와 피를 섞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으로 귀화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신동주(히로유키), 신동빈(아키오) 형제 역시 한국 국적이다. 신격호가 일본에서 사업 기반을 다지는 사이, 첫 번째 부인인 노씨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동안 잡음 끊이지 않더니…
결국 갈등 수면 위로 떠올라
 
신격호의 세 번째 부인 서미경씨도 빼놓을 수 없다. ‘롯데의 별당마님’으로 불리는 서미경씨는 제1회 미스롯데(1977) 출신으로 영화배우로 활동하다 돌연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37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신격호의 세 번째 부인으로 깜짝 등장해 구설에 올랐다. 그는 백화점과 영화관 매점 사업권 등 알짜 사업을 소유하며 그룹 내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딸 신유미씨를 신격호의 호적에도 올릴 정도로 각별한 사이라고 한다.
 
 
이번 ‘형제의 난’으로 드러난 불투명한 롯데그룹의 지배 구조가 드러났다. 특히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경영권 분쟁이 첨예한 가운데 롯데그룹 지배구조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혔다. 첫째 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과 셋째 부인 서미경씨의 딸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도 롯데그룹의 소수지분을 갖고 있어 팽팽한 지분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일단 재계 안팎에서는 신동주 전 부회장의 경영권 확보 시도를 무산시킨 차남 신동빈 회장의 절대 우세를 점치고 있다. 하지만 롯데그룹의 복잡한 지분구조 등을 고려할 때 신동주 전 부회장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분을 확보한 뒤 신동빈 회장을 향한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룹의 총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롯데판 왕자의 난'이 사실상 본 궤도에 들어섰다는 분석이다. 
 
롯데그룹 계열사의 대표격인 롯데쇼핑의 경우 신동빈 회장(13.46%)과 신동주 전 부회장(13.45%)의 지분율은 사실상 동일하다. 롯데제과도 신동빈 회장은 5.34%, 신동주 전 부회장은 3.92%를 보유하고 있다.
롯데칠성은 각각 5.71%와 2.83%다. 무엇보다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일본 비상장 법인 광윤사의 경우 현재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은 29%씩, 신 총괄회장은 3%를 보유하고 있다. 신 총괄회장의 지분율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오랜 기간 광윤사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롯데그룹을 지배해 왔다. 따라서 신 총괄회장의 의중에 따라 후계구도에 변동이 생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등의 행보도 변수로 꼽힌다. 앞서 신동주 전 부회장이 지난달 27일 신 총괄회장의 일본행을 주도할 때 신 이사장 역시 조카인 신동인(69) 롯데자이언츠 구단주 직무대행 등과 동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놓고 재계에서는 신 총괄회장의 형제자매도 신동빈 회장의 반대편에 섰다는 관측이 나왔다.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영자 이사장이 연합할 경우 한국 롯데그룹 일부 계열사에서는 신 회장의 지분율을 앞서게 된다.
 
경영승계 임박
자녀끼리 혈투
 
한편 지난달 30일 신동주 전 부회장이 자신을 다시 롯데홀딩스 사장에 임명한다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서명 지시서를 공개했다. 신 총괄회장이 이 지시서로 이사들을 해임시키려 했으나 이사들이 불복하자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게 신 전 부회장의 주장이다. 
 
 
<min1330@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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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이 매섭다.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한국인 수십명을 발 빠르게 송환한 데 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옥죌 계획이다. 정보·수사기관은 제일 먼저 대학생 피살 사건 핵심 인물인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리광호는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리광호는 지난주에 이미 떴어요.” 리광호에게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가 <일요시사>와의 연락에서 한 말이다. 리광호는 캄보디아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미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 밀입국했다. 정보·수사기관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이다. “지난주에 이미 떴다” 리광호의 신상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텔레그램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1991년생인 리광호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신이다. 키는 160㎝로 단신이며 각진 턱과 짧은 머리가 특징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소학교) 졸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수사당국은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중국 국적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 앞서 박씨는 지난 7월17일 “현지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3주 뒤 깜폿 보코산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캄보디아 캄폿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박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 이들 조직원 3명은 박씨의 시신을 옮길 때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A씨는 “캄보디아 경찰이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리광호를 잡기 위해 지난 8월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었는데 리광호가 몇 시간 전에 미리 알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인터폴, 경찰,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도 캄보디아와의 공조를 통해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그는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라오스로 넘어갈 때 캄보디아 국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넘어가기 직전에 대포 통장과 핸드폰을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한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인 건 맞다”며 “현지 경찰과도 공조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리광호는 5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조직 내 수익을 빼돌리려는 계획이 탄로나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난해 7월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국해 자신과 친분을 쌓은 이들을 모아 시아누크빌에 자리 잡았다. 리광호와 친분을 쌓은 인물 대부분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리광호는 조직에서 간부급은 아니었다. 납치 담당, 고문·협박 담당 등 맡는 일이 다 다른데 리광호는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몸으로 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설명했다. 라오스 북부 통해 미얀마 밀입국 준비 다른 주범 김, 강남 마약 음료 총책 이어 “조직 간부인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구금된 여자를 강간하거나 남자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폭행한다. 이건 리광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다가 구금된 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태운다”고 주장했다. 리광호는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인천지검의 수배 대상자다. 인터폴에서도 적색수배 상태로 확인됐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마약 밀수 혐의로 수배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에 다시는 못 들어간다. 들어갔다가 걸리면 사형”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리광호 외에 김모씨도 추적 중이다. 김씨는 리광호와 함께 박씨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다. 특히 리광호와 김씨는 2년 전 강남 대치동에서 발생했던 마약 음료 사건의 유통책으로 확인됐다. 마약 음료 사건은 지난 2023년 이모씨 등이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를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제공하고 마시게 했던 사건이다. 당시 이씨 일당은 마약 음료 수백병을 만든 뒤 2023년 4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시음 행사라며 미성년자 13명에게 제공하고 실제 9명이 마시게 했다. 이후 음료를 마신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해 “당신 자녀가 마약 음료를 마셨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으려고 시도했다. 불특정 다수의 미성년자를 속여 급성 중독성 마약을 투약하고 부모까지 노린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중국에 있던 주범 이씨는 사건 발생 50여일 만인 2023년 5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중국 공안에 검거돼 강제로 송환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이씨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마약 음료 제조자 길모씨는 징역 18년, 마약 공급책 박모씨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진짜 두목 따로 있다 당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 총책은 검거돼 캄보디아 법원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리광호와 김씨는 수사를 통해 추적해 왔던 인물이다. 필로폰 4kg 이상을 밀반입하는 걸 주도했고 그걸 이씨와 박씨가 국내에 뿌렸던 사건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리광호가 속한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웹사이트 중 일부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구축한다는 게 <일요시사>와 접촉한 이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조직원 B씨는 “전부 다 북한 애들이 하진 않는다. 허술한 웹사이트는 북한 전문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피싱으로 중국 조직에 1억원의 수익을 안겨주면 수수료로 7~10%의 수고비를 받는다. 북한과 조선족은 더욱 싸다. 3~5% 정도면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중국 조직 입장에서는 한국인들보단 북한이나 조선족을 동원하는 경우를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을 단장으로 정부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는데 여기에는 경찰청, 국정원 등이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캄보디아 스캠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국정원에 “발본색원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확실하게 해결해 국민 걱정을 덜어드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리광호와 김씨와 같은 조직원들 추적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국정원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조직은 중국 등 다국적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로 침투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프놈펜, 시아누크빌을 비롯해 총 50여곳에 약 20만명의 조직원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 조직들의 범죄수익은 2023년 기준 125억 달러(약 18조원)로 캄보디아의 국내 총 GDP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다국적 범죄조직 이들 조직은 과거 카지노 자금 세탁 등을 했던 조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경이 폐쇄되면서 캄보디아로 침투해 스캠 범죄로 범죄를 변경했다. 이들 조직은 자체적으로 무장경비원까지 배치하고 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장악한 지역이나 경제특구 등 캄보디아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돼있어서 캄보디아 정부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정원은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인원과 스캠 단지(웬치) 인근 한식당 이용 현황 등을 통해 스캠 단지에 있는 한국인 범죄 가담자를 1000~2000명가량으로 추산했다.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100%는 아니지만, 피해자라기보다는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자금을 관리하는 배후로는 프린스그룹과 후이원이라는 현지 기업이 언급된다. 이 두 기업은 웬치에서 감금,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북한 해킹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등 전방위 범죄를 저지르며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 인신매매와 불법 감금, 사기 등의 배후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불법 도박이나 성매매 등으로 범죄 자금을 벌어들였다. 베트남 국경 지역에 있는 진베이 단지는 중국 9개 성의 법원에서 심리된 83건의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 센 전 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천즈는 수많은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며 캄보디아의 최고위층 귀족 칭호인 ‘옥냐’를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국내 은행사가 이들의 범죄 자금을 유통·세탁하는 데 이용됐을 우려도 나온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국민은행·전북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IM뱅크 등 국내 금융사의 캄보디아 현지 법인 5곳은 프린스그룹과 총 52건의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액은 1970억4500만원에 달한다. 아직 9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웹사이트 서버 북한이? 국정원·정보사 해외 파트·대북팀 동원해 추적 후이원은 범죄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후이원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라고 불리는 후이원페이를 가지고 있는 금융, 결제, 정보기술(IT) 서비스 복합 기업이다. 이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 해킹 조직이 사이버 사기, 랜섬웨어 등으로 얻은 범죄수익을 세탁해 왔다. 후이원페이는 훈 센 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주요 주주로 등록된 회사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 기업은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이원은 공개·비공개 텔레그램 등 채팅방을 이용해 사기 조직과 자금 세탁범을 연결하고 범죄수익을 해외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21년 이후 700억~890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했고 일부는 라자루스로 흘러 들어갔다. A씨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피싱·스캠 관련 웹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라며 “북한이 제작한 사이트의 경우 퀄리티가 상당하다. 그 대가로 후이원이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북한 쪽에 수익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외 파트인 해외정보국과 대북 업무 담당자 상당수는 이미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곳곳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 중이다. 국정원은 1차장이 해외 파트, 2차장이 대북·대공 업무를 담당한다. 2차장은 특히 북한 정보수집·분석 등 국정원의 대북 분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이외에도 국군정보사령부 동남아팀 휴민트(HUMINT·인간정보)들도 현지서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사 출신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캄보디아 수도권에 대남공작원들이 많긴 하지만 웬치에 북한 대사관 관계자나 공작원들이 있진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단지 대가를 받고 캄보디아 범죄조직 사이트를 만들어주거나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세탁해 주는 게 북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배후? 북한 연루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도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사가 이번 캄보디아 사건에서 할 수 있는 건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본 금액이 얼마나 많은지와 북한에도 그 금액이 흘러 들어갔는지, 북한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등이다. 캄보디아에서의 대남 관련자들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시로 캄보디아 무역 또는 사업가,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 등이 대남공작원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