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석유화학 비자금 진실게임

'검은돈 뇌관' 잘못 건드렸나?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금호석유화학(이하 금호석화) 직원들의 비리 의혹과 관련해 경찰이 혐의 입증에 나섰다. 본사 직원 A씨와 무역대리점 운영자 B씨는 배임수재 및 사기 혐의로 입건됐다. 경찰은 이들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한편 조사에 필요한 소환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 그런데 A씨 등은 도리어 "회장 일가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라며 자신들을 고소한 회사에 반발하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선 "이번 수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란 추측을 내놓는 상황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아직 모릅니다. 그거 경찰발 기사잖아요. 직원들이 폭로전에 나설 것 같지도 않고요. 단정하듯 추측하는 건 절대 금물입니다." 지난 9일 정유업계 관계자는 금호석화 직원들의 비리 의혹과 관련해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날 <경향신문> 등은 경찰이 금호석화 직원들의 불법 리베이트 의혹과 관련해 고소장을 접수하고 조사에 나섰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딸 임원 선임
사건과 연관?

고소장을 접수한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약 한 달간 사건과 관련한 여러 정보를 취합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흥미로운 점은 직원들을 고소한 주체가 금호석화 본사라는 데 있다. 금호석화는 지난 5월 본사 간부 A씨에 대한 감사를 벌여 대기발령 조치하고 경찰에 고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대기발령 통보를 받은 직원은 모두 6명이며 이 가운데 혐의가 중한 A씨와 B씨(무역대리점 운영자)를 먼저 고소했다는 것이 금호석화 측의 설명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을 종합하면 A씨 등은 금호석화 구매파트 직원이다. 지난 4월께 금호석화는 자체 감사에 착수해 차장급 A씨를 시작으로 서울과 울산, 여수에서 일하던 직원 6명의 보직을 해임했다. 이들은 모두 '자택 대기발령' 징계를 받았다.

주된 감사내용은 금호석화 전직 직원이 설립한 홍콩 소재 무역대리점(오퍼상)에 이들이 물량을 몰아주고 거액의 뒷돈을 챙겼다는 것이다. 해당 대리점은 2010년부터 올 초까지 수백억원대의 순이익을 올려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리점이 금호석화와의 원자재 거래로 얼마만큼의 이득을 봤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향후 수사과정에서 B씨가 거둔 수익은 쟁점으로 부각될 소지가 있다. 혹여 B씨가 '금호석화와의 거래로 자신도 손해를 봤다'고 주장할 수 있는 까닭에서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당연히 자신 있으니까 회사(금호석화)가 직원들을 상대로 고소장까지 써서 낸 것 아니겠느냐"라며 "물량 몰아주기와 '백머니'는 해외 사업파트에서 흔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관계자가 지적한 백머니는 계약 상대방과 거래할 때 구매대금을 과다 계상하고 남은 돈의 일부를 되돌려받는 관행을 뜻한다.

실제 포스코 수사는 백머니가 발단이 됐다. 지난 2010~2012년 해외 사업파트에서 벌어진 부당 내부거래로 임원 2명은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포스코 상무인 두 박모씨는 직원 10여명과 공모해 1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 돈의 일부를 한국에 송금한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 포스코는 지난해 8월 자체 감사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도 별도 고발조치를 하지 않았다.

리베이트 수수 혐의 전현직 직원 고소
원자재 수입 과정서 거액 '뒷돈' 의혹

'표적'을 찾던 검찰로서는 문제의 비자금이 수사로 전환하게끔 만든 구실이 됐다고 한다. 사정기관 한 관계자는 "정권 초부터 포스코를 손보려는 여러 움직임이 있었지만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라며 "포스코가 비위 사실을 숨기면서 사태를 앞당긴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당시 두 박씨는 보직해임됐지만 대기발령 상태로 올 초까지 임원직을 유지했다. 포스코가 한발 앞서 이들에 대한 감사사실을 외부로 통보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 됐을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홍콩을 무대로 벌어진 이번 금호석화 리베이트 의혹은 포스코 동남아사업단 비자금 의혹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해외 사업과 관련해 유사한 방식의 부정이 벌어졌고, 의심 직원들이 자체 감사결과 보직해임과 대기발령 통보를 받은 것도 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금호석화는 감사 즉시 발견한 비위 혐의를 수사기관 쪽으로 통보했다는 데 있다. 금호석화 관계자는 "포스코 사례도 참조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처리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빠른 자진신고 배경을 놓고 일각에선 '그룹 회장이 연관된 재판이 영향을 주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요약하자면 '수사기관에 약점 잡힐 빌미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포석'을 깐 것이란 주장이다.

지난해 10월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부장판사 황병하)는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위반 등 혐의(횡령·배임)로 기소된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포스코 염두?
자진신고 왜?

앞서 1심은 같은 혐의로 기소된 박 회장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법원 관행상 1심보다 항소심에서 더 높은 형량을 선고하는 경우는 드물다. 재판부는 1심에서 무죄로 판단한 횡령 혐의에 대해 "업무상 임무 위배 행위에 해당한다"라며 판결을 뒤집었다.

법원이 사실로 인정한 부분은 금호피앤비(비상장 계열사)라는 회사가 박 회장의 아들로부터 원리금을 제때 변제받지 못했음에도 2010∼2011년 34억원을 추가 대출해줬다는 것이다. 이는 박 회장이 대표직에서 물러났던 시기 아들에 대한 대여가 이뤄지지 않은 정황에 비춰 '특정시기 개인의 필요에 따라 편법 거래가 이뤄진 것'으로 판단됐다.

또 재판부는 31억9880만원을 납품대금 명목으로 금호석화 명의의 전자어음으로 발행하고 지급한 혐의에 대해선 "회사 재산을 적정하게 관리해야 할 임무가 있음에도 개인 용도의 자금을 빌리기 위해 채무를 회사가 부담하게 했다"라며 "결국 회사가 어음금을 갚아야 할 상황이 됐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1심 때와 마찬가지로 협력업체와 공모해 거래대금을 부풀려 지급한 뒤 차액을 되돌려받는 등의 수법으로 200억∼3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는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다. 앞서 1심 재판부는 "피고인(박 회장)이 법인자금을 마치 개인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듯 손쉽게 이용했다"라면서도 "원리금을 변제해 실제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2심 역시 "대여금과 약속어음금 등이 모두 변제되고 손해발생 위험이 현실화 되지 않은 점을 (양형에) 참작했다"라고 판시했다.

직원 협박용에
침소봉대 우려

현재 박 회장의 횡령·배임죄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확정되지 않았다. 2심 선고 직후 금호석화 측은 "유죄 부분의 혐의 및 금액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간 금호석화 측은 검찰 공소사실에 직간접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1심 판결 직후인 지난해 1월 박 회장은 사내 인트라넷에 올린 글을 통해 "남은 혐의에 대해 적극 무죄를 입증할 예정”이라고 알렸다. 또 "금호아시아나그룹과의 악연으로 비롯된 검찰의 무리한 기소로 3년간 이어진 길고 지루한 공방 속에서도…(중략)"라며 수사와 관련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 같은 상황에서 수사 대상으로 오른 A씨 등은 "박찬구 회장 일가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수사기관에 폭로하겠다"라며 협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향신문> 등에 따르면 A씨 등이 문제 삼고 있는 회사는 화물운송 중개업체 J사다. J사는 박 회장의 처남이 운영했던 회사로 알려졌다. 2005년까지 수십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던 J사는 2008년 500억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였다.

A씨 등은 J사가 성장하는 과정에 금호석화의 일감 몰아주기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울산과 여수에 있는 공장의 물량을 J사가 수주해 다시 수수료 형식으로 박 회장에게 돌려줬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금호석화 측은 "터무니없는 얘기"라며 A씨 등을 공갈 혐의로 추가 고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앞서 검찰은 박 회장에 대한 횡령·배임 수사 당시 관련한 조사를 진행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폭로할 내용이 언론에 알려진 것과 별건이 아니라면 A씨 등이 불리한 상황이다.


"친인척 회사에 일감 주고 수수료"
'보복성' 회장일가 비리 폭로 협박

경찰은 A씨 등으로부터 고소가 들어와 사건이 접수되면 조사에 착수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A씨는 현재까지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정유·산업을 담당하고 있는 한 일간지 출입기자는 "다른 문제도 아니고 비자금인데 A씨가 언론에 접촉하든 직접 나와서 얘기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폭로는 의미가 없다고 봐야한다"라며 "기자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금호석화에 적대적인 일부 세력은 아예 A씨 등이 입을 열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사건의 본질과 관계없이 비자금 의혹으로 확대시킬 계획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일각에선 박 회장의 형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막후에서 A씨를 설득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나온다.

이들 형제는 지난 2010년 그룹 분할로 생긴 앙금을 털어내지 못하고 상호 민형사상 고발을 주고받고 있다. 앞서 동생 박 회장은 자신의 형을 수천억원대 배임 혐의로 고소했다.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를 거쳐 특수2부로 재배당됐다. 검찰은 금호아시아나그룹과 관련한 비자금 의혹을 들여다보고 있다.

금호석화와 관련한 일련의 움직임은 정황상 회사 차원의 사전 준비 및 조율을 거친 것으로 추정됐다. 금호석화는 지난 3일 "박찬구 회장의 차녀 박주형씨가 의결권 있는 주식 1만4285주를 장내매수 했다"라고 공시했다. 이어 경찰 발표를 앞두고는 "딸 주형씨가 구매·자금 담당 임원으로 신규 선임됐다"라고 발표했다.

주형씨의 임원 선임은 의외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이는 그동안 금호일가가 '금녀의 원칙'을 고수해왔기 때문이다. 금호가는 선대 때부터 여성의 경영 참여를 금지해왔다.


진짜 이유는
직원들 불신?

그런데 다른 분야도 아니고 구매·자금 담당 임원으로 주형씨를 선택한 배경에는 이번 리베이트 의혹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해석이 잇따랐다. 하지만 금호석화 측은 깜짝 인사의 이유로 "구매·자금 운영의 투명성 강화"를 언급하며 "주형씨의 경영 참여는 A씨에 대한 감사 전부터 준비돼 왔었다"라고 밝혔다.

같은 날 국민연금공단은 금호석화 주식 65만9853주(지분 2.16%)를 추가 취득해 전체 지분율을 9.33%까지 늘렸다. 이는 시장이 비자금 수사 확대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일부 재계 호사가들의 주장처럼 "비자금 수사 등 예상 밖의 일을 대비해 믿을 수 있는 가족을 임원으로 앉힌 것"이란 의심도 가능하다. 금호석화 측은 "사건을 이상한 쪽으로 끌고가는 세력을 주시하고 있다"라며 "자세한 건 곧 조사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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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