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31) '룸살롱 황제' 이경백

몰락한 '밤의 제왕' 가족은 '떵떵'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항상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40조원에 이른다. <일요시사>는 연재 30번째를 맞아 국세청 기준 100억원 이상을 체납한 '고액체납자 특집'을 두 차례 마련할 예정이다. 31화는 123억7700만원을 체납한 '룸살롱 황제' 이경백씨다.

'룰루랄라'는 유흥업계에서 전설로 회자된다. 2000년대 후반까지 룰루랄라는 '선릉역 룸살롱'의 대명사로 불렸다. 서울 역삼동 인근 한 호텔에서 운영되던 룰루랄라는 여종업원 수만 2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해가 저물면 50여개의 룸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손님 상당수는 술자리가 끝나고 성매매를 했다. 이곳 룸살롱의 대표는 이경백씨(이하 이경백). 이른바 '룸살롱 황제'로 알려진 유명 인사다.

북창동식 히트

이경백은 룰루랄라 외에도 '로데오' 등 서울 강남 일대에 '북창동식 유흥주점'을 확산시켰다. '북창동식'은 여성 접대부와의 퇴폐적인 술자리(나체쇼 등) 및 유사 성행위를 핵심 서비스로 제공했다. 2차인 성매매는 손님이 지불하는 돈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경백은 한때 서울 강북과 강남 유흥가에 모두 13~17곳의 북창동식 룸살롱을 운영했다. 전성기 한 해 매출은 1000억원에 이르렀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표현을 빌면 이경백은 소위 '삐끼'라고 불리는 웨이터 출신이다. 이경백은 업계에서 나름 신화적인 존재로 알려졌다. 이경백은 2000년대 초반 서울 북창동에 룸살롱을 개업하면서 획기적인 서비스로 입소문을 모았다.

그는 폐업 위기에 몰린 룸살롱을 헐값에 인수한 뒤 '양주 1병에 맥주 무제한 공짜'라는 영업 방식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손님들로서는 구미가 당길 제안이었다. 맥주를 무료로 제공하는 대신 룸TC(방 대여료)는 따로 챙겼다. 룸TC에는 여성 접대부와의 술자리 값이 포함돼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북창동식 서비스는 흥행을 거듭했다. 이경백은 다시 전재산을 털어 고급 외제차를 구입했다. 투자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2000년대 중반 강남으로 진출하면서는 '매직미러 초이스'를 도입했다. 매직미러 초이스는 룸살롱에 들어선 손님들이 특수유리를 통해 여종업원 대기실을 둘러보고 '파트너'를 직접 고를 수 있는 서비스를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이경백은 양주 2병을 시키면 한 병을 무료로 주는 '2+1 행사', 낮 시간대 손님에게 가격을 할인해주는 '조조할인 행사' 등을 연달아 히트시켰다. 일각에선 그가 틈나는 대로 경영학을 독학했다고 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이경백이 강남 유흥가를 석권하면서 나온 소문이 일부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경백의 성공비결은 '거미줄 인맥'에 있었다. 조 전 청장은 지난 2012년 이경백에 대해 "평소 경찰, 국세청은 물론 법원, 검찰에도 든든한 인맥이 있음을 과시하였고, 실제로 바지사장들만 수사 대상에 올랐을 뿐 이경백 본인은 단 한 차례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특히 이경백은 지역 경찰과 유착했다. 단속을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경찰관 수십명에게 뇌물을 상납했다.

강남의 '밤거리'와 관련한 정보는 이경백에게 몰렸다. 경쟁업소까지 이경백의 입을 쳐다보는 형세였다. 지난 2006년 H그룹 김모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이 은폐되자 이경백은 일선 경찰에 정보를 흘렸다. 이 사건으로 경찰 수뇌부가 옷을 벗으면서 지방경찰청 차원의 '이경백 수사팀'이 구성됐다. 그러나 몇 달 못가 팀이 해체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수사팀의 룸살롱 접대사실을 쥔 이경백이 검찰을 동원해 반격에 나선 까닭이었다.

경찰 고위 간부에까지 손을 뻗친 이경백은 강남 풀살롱(성매매를 제공하는 룸살롱)을 인수하는 등 날로 사업 외연을 넓혔다. 이경백이 세운 '룸살롱 제국'은 영원할 듯 보였다. 하지만 뜻밖의 계기로 제국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서울 서초경찰서에 실종신고가 접수되면서부터다.

서울시 2억9900만원 국세청 120억원
성매매 알선·세금포탈·불법카지노 운영

지난 2010년 2월 A양(당시 18세로 미성년자)의 부모는 '딸이 몇 달째 소식이 없다'라며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은 로데오라는 룸살롱에서 A양을 찾아냈다. A양은 경찰 조사에서 "(업주로부터) 성매매를 강요받았다"라고 진술했다. 로데오의 실소유주는 이경백이었다.


조 전 청장(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특별수사팀'을 꾸리고 여종업원들의 진술을 차례로 확보했다. 조 전 청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경백은 모든 룸살롱에 바지사장을 채용하고, 세무사와 회계사를 고용해 수익금 추적을 회피했다. 또 판·검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해 수사를 방해했다. 2010년 7월 이경백은 42억6000만원의 세금을 포탈하고 미성년자를 고용해 룸살롱 내에서 유사 성행위를 하도록 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경찰 조사결과 이경백은 이중장부를 만들어 306억원가량을 유용하고, 이 돈 상당수를 접대비 등으로 사용했다. 또 가족이 있는 호주로 일부 돈을 송금하고, 장인·처제 등의 명의로 반포동·광장동·동부이촌동의 고급 아파트를 사들였다. 국세청은 전방위 세무조사로 이경백을 옥좼다. 업계에서조차 이경백의 재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경백은 보란 듯이 구속 두 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배경을 놓고 전관예우라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경백은 법원을 빠져나오자마자 잠적했다. 지명수배를 당하면서도 룸살롱 호객행위는 계속했다. 북창동에선 이른바 '방석집' 2~3곳을 운영했다. 경찰은 수배 8개월이 지나서야 이경백을 체포했다. 이마저도 이경백의 경쟁업체가 그를 검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란 소문이 돌았다.

이경백은 1심에서 징역 3년6월에 벌금 30억원을 선고받았다. 이 무렵 '이경백 사건'의 여파는 메가톤급으로 확대됐다. 검·경 수사권 갈등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앞서 경찰은 이경백과 접촉한 직원 39명을 자체 징계했으나 검찰은 이른바 ‘이경백 리스트’를 확보는 데 이르렀다. 검찰은 2012년 3월부터 전·현직 경찰관 18명을 구속시켰다. 당시 이경백은 여종업원을 통해 경찰에게 상납한 돈을 회수한다는 명목으로 일종의 함정을 팠다고 전해진다.

때문인지 이경백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벌금은 5억5000만원까지 줄었다. 경찰은 검찰의 '플리바게닝'을 의심했다. 이어 불법 대출 등의 혐의로 이씨를 재소환하는 등 검찰과 신경전을 벌였다. 이경백은 이들 틈에서 구속과 석방을 반복했다.

경찰은 이경백이 집행유예 기간 동안 북창동 소재 유흥업소 업주를 협박해 3000만원을 뜯어낸 혐의와 도곡동 한 건물에서 판돈 10억원 규모의 불법 카지노를 운영한 혐의를 밝혀냈다. 2013년 5월 구속된 이경백은 같은 해 12월 구속기간 만료로 보석이 허가됐다. 그러다 다음해 9월 도박장개설죄가 인정돼 또다시 수감됐다. 검찰은 지난해 11월 성매매 알선 혐의를 추가로 적용해 이경백을 기소했다. 현재 이경백은 수감 상태로 모두 3건의 형사재판을 진행 중이다.

또다시 구속

이경백은 변호인을 선임해 재판을 받고 있지만 세금은 내지 않고 있다. 2007년부터 종합소득세 등 139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체납액은 120억7800만원이다. 이경백은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있다. 2009년 8월부터 지방소득세 등 9건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서울시가 거둘 체납액은 2억9900만원이다.

업계에 따르면 룸살롱 영업은 중과세 부과 대상이다. 세금을 다 내면 마진이 남지 않는 구조다. 십중팔구는 탈세에 노출된다. 그런데도 이경백은 세무조사 없이 돈을 벌었다. 당국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으로 의심된다. 역삼동 인근에선 아직 다수의 성매매 업소가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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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 전 국방부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