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소신 지킨 정의화 국회의장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강골 의장님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강력히 거부했다. 여야는 눈치만 살폈다. 대통령 앞에서 꼼짝도 못 하는 형국. 정의화 국회의장은 달랐다. 박 대통령이 재의를 요구한 국회법 개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해 우선 처리하겠다고 결단했다. 대한민국 의전서열 2위의 역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청와대와 국회는 국회법 개정안 문제를 두고 헌정 사상 유례없는 충돌 사태가 벌어진 상태다. 정 의장은 박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법에 따라 재의결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법 개정안과 관련해 자신의 중재안으로 위헌 소지가 완전히 없어졌다며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사실상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다. 역대 국회의장과 다르게 소신을 갖고 국회의장으로서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권위 있는 국회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다.
 
부드럽고 강직
노련함 돋보여 
 
지난달 30일 정의화 국회의장은 이날 발표문을 통해 “7월1일 예정된 본회의를 7월6일로 변경해 국회법 개정안 재의의 건을 우선 처리하고 인사안건 2건과 본회의에 부의 된 60건의 법안 전체를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정안 재의 날짜가 잡히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의사일정 보이콧을 풀어 국회가 이날부터 정상화됐다. 개정안 처리 문제가 현안으로 부상하면서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 거취를 둘러싼 여권 논란도 당분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정 의장은 재의 날짜를 6일로 미룬 이유를 헌법 준수와 ‘경제·민생법안’에서 찾았다. “헌법 제53조 제4항에 따르면 대통령이 재의를 요구하면 국회는 재의에 부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헌법을 수호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는 게 의장의 의무”라는 것이다. 6일 본회의에서는 크라우드펀딩법, 하도급거래 공정화법 등 60여건이 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정 의장의 중재는 새정치연합에 ‘명분’을, 새누리당에는 ‘실리’를 챙겨준 것으로 평가된다. “개정안 재의 날짜를 확정하면 상임위를 정상 가동하겠다”는 야당 주장을 수용해 국회 정상화 명분을 줬고 재의 뒤 민생법안을 처리하는 일정을 잡아 새누리당이 부담 없이 본회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정 의장의 중재로 국회 정상화를 이루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개정안 재의결은 국회가 청와대의 뜻대로만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미다. 정 의장은 과거 역대 의장들과는 다르게 소신 있는 태도를 보였다. 이번 거부권 정국을 거치면서 정 의장도 어느 정도 존재감을 키웠다.
 
정 의장의 정치적 노련함이 돋보였던 것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세월호 특별법 합의 과정 여야가 모두 참석한 국회 본회의를 여는 뚝심도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여야 양쪽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본회의가 열리면서 정 의장의 대화와 타협, 합의 정신이 성과를 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청와대-국회 ‘국회법’ 두고 정면충돌
원칙서 벗어나지 않는 카리스마 작렬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여야가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국회 정상화가 이뤄지기까지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정 의장은 “타협의 정신으로 세월호 특별법 국면을 넘어야 할 것”이라며 국회 정상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국회는 파행을 거듭했다.
 
새누리당이 단독 본회의 개회를 추진했지만 정 의장은 이를 저지하고 의장직권으로 본회의 일정을 잡았다. 정 의장은 “여야 합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며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본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법안을 처리하려고 했다. 이때도 정 의장은 또다시 의장직권으로 법안표결을 하지 않고 30일로 본회의를 연기했다.
 
당시 여당의 반발도 거셌다. 정 의장이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장우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정족수가 충족된 상황에서 국회의장이 의사진행을 포기한 것은 의원 개인의 발언권과 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정 의장이 사퇴하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체계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의원 10명 가량이 국회의장 사퇴촉구 결의안에 서명했다.

비주류 계파 타파
책임형 리더 평가
 
본회의가 열릴 때도 정 의장은 의원총회를 이유로 오후 2시 본회의 개회를 연기해달라는 야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본회의를 오후 7시로 미뤘다. 
 
정 의장은 여당의 비난에도 “야당이 본회의를 지연시키는 것으로 판단하면 예정대로 본회의를 진행할 것”이라며 “내 이름이 부의화로 바뀌지 않는 한 약속을 지킬 것”이라며 합의가 이뤄지길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세월호 특별법에 전격적으로 합의했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본회의에 참석했다. 정 의장의 인내가 성과를 거둔 순간이었다.
 
정 의장은 1948년 경남 창원군 웅동면 소사리(현재 창원시 진해구 편입), 웅동중학교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정 의장은 1955년 여름 부산 건국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부산 중앙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부산 땅을 밟게 된다.
 
 
고교 2학년 때 형님의 권유로 시작한 사진은 한국일보 국제사진살롱전에 입선을 하는 등 각종 사진전에서 수상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대학 시절 부산의 대학생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만큼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정 의장은 또 대학 시절 학보사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합리적 대안을 모색하는 안목을 키우기도 했다. 
 
지금도 차에 항상 카메라를 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출장을 가거나 지방에 갈 때는 전문가용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틈만 나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가 세계 각국을 돌며 직접 찍은 사진 12장으로 달력도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사진 찍는 정치인’이다.
 
정 의장은 미세 뇌혈관수술의 대가이자 세계가 인정한 의학박사기도 하다. 또 의사로서뿐만 아니라 병원원장으로서 일자리 1200개를 창출해낸 성공한 CEO로 이름을 날렸다. 1974년 초대 병원장인 김원묵 박사가 별세하고, 1978년 2월 25일 정의화 의장이 4대 병원장으로 취임했으며, 1985년 3월 김원묵 기념 봉생병원을 종합병원으로 승격시켰다.
 
정 의장은 극도로 악화된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뜻 있는 의료계와 학계 인사들과 영호남민간인협의회를 만드는 등 NGO 활동에도 적극나섰다. 1996년 정 의장은 15대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서 단행한 공천에 발탁돼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초선시절부터 8년 연속 국감 베스트 의원에 선정될 만큼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지역감정 해소와 영호남 화합을 위해 1991년부터 헌신해온 정 의장은 2004년부터 한나라당 내 ‘지역화합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호남 예산확보, 현안 과제 해결 등 당내 ‘호남 창구’ 역할을 해왔다.
 
특히 여수세계박람회유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여수엑스포 유치 성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1월 여수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이어 2008년 11월엔 영호남 화합과 교류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한나라당 의원 최초로 광주 명예시민으로 추대됐다. 2009년 2월엔 ‘영남 출신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호남 지역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한 공적’으로 조선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야 안가르고
화합형 스타일
 
이와 함께 2015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위원장으로 2009년 5월 광주유치를 이뤄냈는데, 정부와 국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 낸 그의 노력이 유치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0년 1월 대회 조직위원장으로 추대되면서 2015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성공개최의 토대 마련을 위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정 의장은 평소 “조그마한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려있는 데다가 동서마저 간극이 있으면 우리나라에 미래가 없다”는 소신으로 영호남 화합을 위해 노력해왔으며, 이러한 배경에는 영호남 화합이 남북통일의 선결과제라는 확고한 신념이 깔려있다.
 
그동안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주창해온 정 의장은 2010년 6월, 한나라당 내 국회부의장 경선에서 압도적 표차로 부의장 후보로 선출됐으며, 다음날인 6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참석의원 238명 중 231명의 지지로 국회부의장에 당선됐다.
 

당선인사에서 그는 “18대 국회는 정쟁의 국회를 정책과 상생의 국회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뒤 “헌정 60년이 넘었기 때문에 민주적인 의회상을 정립할 때가 왔다”면서 “최소한 여야 간 상호 호혜의 원칙을 지키고, 국회의원 간 상호 존중의 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불문율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 2015월 4·27재보선 패배로 당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정 의장은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의 변화, 쇄신을 위해 역량을 쏟았으며, 성공적인 전당대회로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해내는 등 화합과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경제·민생법안 우선시
“절대 끌려가지 않겠다”
 
부의장 시절인 지난 2011년 통합진보당 김선동 의원이 한·미 FTA 국회 비준동의안 의결을 막기 위해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뜨린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끝까지 의장석을 지키며 한미FTA 비준안과 14개의 부수 법안을 처리시킨 일화는 정 의장의 뚝심과 강인함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2012년 4월 국회의장 대행 시절에는 국회 선진화법에 대해 ‘식물국회’를 만들 수 있다며 기자회견까지 자처해 반대하기도 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 부산 중·동구 국회의원으로 내리 5선에 성공한 정 의장은 ‘외교는 통일을 앞당기는 견인차' ‘국가의 위상은 외교적 역량이 결정한다’고 주창하며 국회 한미의원외교협의회 회장과 국회 외통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사회에 만연한 물질주의와 이기주의로 인해 예가 무너지고 각종 사회 병리 현상이 심화되는 상황을 인성교육 강화를 통해서 바로잡아보고자 국회 인성교육실천포럼을 창립했으며, 지난달 26일에는 1년 6개월간 활동과 노력을 담은 인성교육진흥법을 대표발의하기도 했다.
 
정 의장은 당내 비주류였다. 자신의 정치철학과 원칙에 부합되지 않으면 결코 타협하지 않는 탓에 계파 간 줄서기 풍토를 외면, 당내 비주류로 적잖은 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경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열린 선출 투표에서 총투표수 147표 가운데 101표를 획득해 46표에 그친 황우여 전 새누리당 대표에 압승을 거뒀다.
 
지역감정 해소
영호화합 앞장
 
옛 친이(친이명박)계를 포함한 비주류 측과 초선 의원들로부터 몰표를 받아 친박 주류에서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황 의원을 상대로 예상 밖의 압승을 거뒀다. 정 의장은 이명박정부 시절 친이계 주류로 분류됐지만, 친박계와도 원만한 사이를 유지해 당내 온건파로 불린다.
 
<min1330@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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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