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는 광복 70주년 ④대구광역시

애국심으로 나라 지킨 ‘국채보상운동’ 역사 속으로

대구 사람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대구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국채보상운동 때문이기도 하다. 1904년 이래 일제는 대한제국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기 위해 일본에서 막대한 차관을 도입하도록 강요한다.

흥미로운 사료 통한 국채보상운동 탐방
민중 계몽·민족 사상 교육하던 ‘조양회관’

일제는 1905년 대한제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300만원을 차입한 뒤 1907년까지 들여온 차관 총액이 1300만원에 달하는데, 이는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제의 경제적 예속 정책에 저항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쉽게 말하면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아 국권을 지키자는 운동으로, 1907년 1월29일 대구에서 서상돈이 발의했다.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300만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000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는 건의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라 지키는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된다. 2월22일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되고, 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운동 단체 20여개가 창립된다. 대구 중구에 자리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은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자료를 모아놓은 곳으로, 국채보상운동의 태동에서 확산, 일제 탄압과 좌절까지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남자들은 담배를 줄이고 부인들은 비녀와 은가락지, 은장도를 내놓은 사연, 기생과 거지, 도적까지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한 일화, 통감부가 국채보상기성회 간사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다양한 미니어처와 모형, 역사적 사료를 통해 흥미롭게 전달해 아이들과 함께 돌아보기에도 좋다. 

국채보상운동 관련 유적과 더불어 중요한 독립운동 유적이 대구 효목동 조양회관(등록문화재 제4호)이다. 이곳은 3·1
운동 이후 서상일과 대구구락부 회원 등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문화정치에 맞서 민중과 청년을 계몽하고, 민족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교육 회관이다. 원래 달성공원 앞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조양회관은 ‘조선의 빛이 되어라’는 뜻이다.
조양회관이 지어진 1922년, 대구·경북 지역에선 가장 규모가 큰 공사였다고 한다. 당시 들어간 돈은 4만3080원50전.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도 서상일이 경북 성주에 있는 논과 대명동 산대못을 팔아 건축비를 충당하며 우여곡절 끝에 완공했다. 설계는 대구에서 건축업을 하던 윤학기가 맡았고, 건축 공사는 벽돌 공장을 경영하던 백남채의 책임 아래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했다. 압록강 근처에서 생산된 낙엽송을 사용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건물이 완공되고 대구구락부, 대구여자청년회, 대구운동협회, 농촌 봉사 단체 등이 입주해 민족 계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했지만, 영남 지역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지목되면서 조선총독부에 징발되어 대구부립도서관으로 사용되고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일본군 보급 부대가 주둔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지금은 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 회관으로 사용되며, 독립운동과 항일 투쟁 관련 사진과 유품을 전시한다. 


대구 근대문화골목 코스에도 독립과 관련한 곳이 많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근처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고택이 있다. 대구에서 태어난 이상화 시인은 1939년부터 1943년 작고하기까지 이 집에 살면서 예술혼을 불태웠다. 고택에는 시인의 작품과 생애가 잘 정리되어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로 옆에 자리한 서상돈 고택은 이상화 고택과 함께 주변에 고층 건물이 들어설 때마다 철거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뜻있는 시민들의 서명운동으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독립의 자취
근대문화골목

진골목에도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깃들었다. 진골목은 ‘긴 골목’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이 골목에 살던 아녀자들이 국채보상운동 당시 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02년 지어진 계산성당 건너편, 청라언덕으로 향하는 길은 3·1만세운동길이다. 1919년 학생 1000여명이 이 길을 통해 서문시장으로 나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계단이 모두 90개여서 ‘90계단길’, 〈운수 좋은 날〉 〈빈처〉를 쓴 소설가 현진건이 자주 산책하던 곳이라 ‘현진건길’로도 불린다.
향촌문화관도 돌아보자. 1912년 대구 최초의 일반은행인 선남상업은행이 있던 곳을 1950년대 향촌동 일원의 모습으로 재현했다. 지하 1층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감상실 ‘녹향’도 있다. 서문시장 옆에 자리한 계성고등학교는 1919년 3월 전교생이 3·1운동에 동참하면서 대구·경북 지역 3·1운동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친 역사적 장소다. 영화 〈용의자 X〉에서 천재 수학자 석고(류승범)가 근무하는 학교로 나오기도 했다.

대구 바로 옆에 자리한 칠곡도 함께 돌아보자. 흔히 칠곡을 ‘호국의 고장’이라고 한다. 왕건과 견훤의 혈투가 벌어진 곳이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에도 칠곡을 배경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한국전쟁의 가장 치열한 현장 가산산성(사적 제216호)도 칠곡에 있다.
가산산성은 해발 901m 가산에 쌓은 석축 산성으로, 가산면 가산리와 동명면 남원리에 걸쳐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1640년부터 축성된 것으로, 험준한 자연지세를 이용한 조선 후기의 축성 기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산성이다. 가산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된다. 내성은 1640년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축조했고, 1700년에 외성을, 1741년에 중성을 쌓았다. 가산산성 주차장에서 진남문을 통해 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데, 성벽과 문 터가 소실되지 않고 남아 당시의 위용을 오롯이 전해준다. 숲이 우거져 초여름 트레킹을 즐기기에도 좋다.

자료제공 : 한국관광공사
www.visitkorea.or.kr

----------------------<여행 정보>----------------------
당일 코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진골목→이상화·서상돈 고택→3·1만세운동길→향촌문화관→조양회관

1박 2일 코스
첫째 날 : 가산산성→국채보상운동기념관→진골목→이상화·서상돈 고택→3·1만세운동길→향촌문화관
둘째 날 : 서문시장→계성고등학교→달성공원→조양회관

관련 웹사이트
· 대구관광안내 http://tour.daegu.go.kr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www.gukchae.com
· 이상화 고택 www.sanghwa.or.kr
· 향촌문화관 http://hyangchon.jung.daegu.kr


문의 전화
· 대구광역시청 관광과 053-803-6511
· 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 053-951-0815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053-745-6753
· 이상화 고택 053-256-3762
· 서상돈 고택 053-256-3762
· 향촌문화관 053-661-2331
· 가산산성 054-979-6452

대중교통
기차> 서울역-동대구역 :
KTX 하루 70회(05:10~23:00) 운행, 약 1시간50분 소요.
* 문의 : 레츠코레일 1544-7788, www.letskorail.com
버스> 서울-동대구(대구한진) :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루 50여 회(06:00~다음 날 01:30) 운행, 약 3시간 30분 소요.
* 문의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1688-4700 코버스 www.kobus.co.kr

자가운전
서울 출발 :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북대구 IC→신천대로→국채보상운동기념관
부산 출발 : 중앙고속도로→대구부산고속도로→수성 IC→국채보상로→국채보상운동기념관

숙박
· 히로텔 : 중구 국채보상로, 053-421-8988, www.herotel.net
· 노보텔 앰배서더 대구 : 중구 국채보상로, 053-664-1101, https://novotel.ambatel.com/daegu/main.amb
· 호텔 인터불고 엑스코 : 북구 유통단지로, 053-380-0114, www.ibexco.co.kr
· 리츠모텔 : 동구 동부로26길, 053-753-4975

식당
· 아리조나막창 : 막창, 수성구 지산로3길, 053-782-9323
· 국일따로국밥 : 따로국밥, 중구 국채보상로, 053-253-7623
· 벙글벙글식당 : 육개장, 중구 동성로3길, 053-424-7745
· 옛집식당 : 육개장, 중구 시장북로, 053-554-4498
· 낙영찜갈비 : 찜갈비, 중구 동덕로36길, 053-423-3330, www.nakyoung.com

축제와 행사
· 제9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 2015년 6월26일~7월13일, 대구오페라하우스 외
                                                053-622-1945, www.dimf.or.kr

주변 볼거리
팔공산, 동화사, 계산성당, 대구제일교회, 약전골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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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