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월드컵 신화 쓴 윤덕여 여자축구대표팀 감독

때론 아빠처럼 태극낭자 이끈 때론 오빠처럼 빛나는 리더십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윤덕여 한국 여자축구대표팀 감독의 과감한 결단이 한국의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을 일궈냈다. 지난 2012년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에 감독으로 선임된 이래로 3년 만에 그가 이룬 쾌거다. 과거 대한민국 수비수로 활약했던 윤 감독. 하지만 그를 제대로 기억하는 이는 드문 편이다. 

 
윤덕여 감독은 1961년생이다. 서울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윤 감독은 한국 축구계의 대표적인 ‘대기만성형’ 선수 중 한 명이다. 일반적으로 축구 선수들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축구를 시작하는 것과 달리 윤 감독은 중학교 3학년에야 정식으로 축구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는 악바리로 통하며 쉼 없는 노력으로 팀 훈련은 물론이고, 강도 높은 개인 훈련을 통해 기량 향상을 꾀했다. 
 
수비수로 활약
주목받지 못해
 
이런 노력 덕분에 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했으며, 3학년까지 줄곧 주전으로 활약했다. 중3 때 축구를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괄목상대한 기량 향상이다. 또  경신고 시절 대회 결승전에서 팔이 부러지는 부상에도 붕대를 감고 경기를 마칠 정도로 독종이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의 외모를 보면 축구선수 출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이다. 실제로 경기장 밖에서 그는 예의 바르며 학자 타입의 감독이라고 분류할 정도다. 하지만 그는 선수시절 경기장 안에서 누구보다 끈질기며 거칠었다. 상대 공격수를 절대 놓치지 않는 악착같은 승부근성으로 유명했다. 코풀소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는 과감함 태클과 밀착수비를 자랑하는 스토퍼와 수비형 링커로 이름을 날렸다. 스토퍼는 상대의 공격을 개인 방어로 막아내기 위해 끈질기게 붙어 다니며 방해하는 역할이다. 링커는 상대방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공을 빼앗는 역할을 한다.
 

윤 감독은 25년 전인 1989년 5월 한일 정기전을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른다. 이후 1991년 6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까지 2년간의 짧은 대표생활을 했다. 그동안 윤 감독은 A매치 31경기에 출전하며 대표팀의 간판 수비수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빈번히 월드컵에서 고배를 마시며 흑역사를 보내기도 했다. 
 
윤 감독이 현역 선수로 월드컵 무대에 처음 나선 것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예선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윤 감독은 벨기에와 1차전에 벤치를 지켰다. 하지만 스페인과 2차전에 당시 대표팀 수비의 핵이었던 정용환 선수 대신 투입돼 스페인의 공격을 이끌던 훌리오 살리나스, 미첼을 전담 수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결과는 1-3완패. 스페인은 미첼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황보관의 중거리슛으로 1골을 만회한 한국을 무너뜨렸다. 생애 첫 월드컵 무대를 밟은 윤 감독은 풀타임으로 활약했지만 스페인의 3골을 막지 못했다. 후반 7분에는 경고까지 받는 등 아쉬움을 남겼다. 
 
윤 감독은 실낱같은 16강의 희망을 안고 경기한 우루과이 조별 예선 3차전에도 선발 출전했다. 하지만 후반에 퇴장까지 당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출천지 흑역사로 남았다.
 
여자축구 사상 첫 월드컵 조별리그 통과
남자축구 48년 걸렸는데 12년 만에 쾌거
 
당시 윤 감독은 우루과이의 골잡이였던 프란세스 콜리를 찰거머리처럼 수비했다. 공격을 차단했던 윤 감독은 전반에 경고 1장을 받았다. 후반전 콜리는 윤 감독의 집중 마크에 신경질이 나 심판이 보지 않는 사이 공이 아닌 윤 감독의 얼굴에 헤딩을 날렸다. 이에 윤 감독은 복수를 시도하는 등 거친 경기를 했다. 후반 25분에 그는 '시간지연 행위'라는 이유로 또다시 경고를 받아 퇴장당한다. 윤 감독의 퇴장으로 10명이 싸운 한국은 후반 종료 직전 폰세카에게 공을 허용해 우루과이에 16강 티켓을 헌납했다. 
 

윤 감독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최인영 골키퍼와 공을 주고 받는 과정을 시간 지연 행위라며 경고를준 심판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라며 “팀의 일원으로 퇴장을 당하지 않았으면 우루과이에 지지 않았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1년가량 대표팀 생활을 했던 윤 감독은 A매치 31경기 출전 기록을 남기고 더는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악바리 키운다
강도높은 훈련
 
윤 감독은 한일은행 축구단과 울산 현대, 포항 스틸러스에서 1984년부터 1992년까지 프로 선수 생활을 보냈다. 그는 프로 선수 시절 울산 현대에서 86년 컵대회 1번 우승, 88년과 91년 리그 준우승을 경험했다. 포항스틸러스에서 92년에는 리그 우승을 했다. 특이하게 그는 프로 선수 경력 동안 단 한 번도 퇴장을 당한 기록이 없다. 
 
윤 감독은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 선수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윤 감독의 선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온라인 축구 게임 피파온라인에 전설적인 캐릭터로 선정됐다. 그가 현역 시절 어떤 선수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92년 윤 감독은 선수 생활을 은퇴한다.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포항제철중학교의 축구 감독으로 선임되며 지도자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포항스틸러스의 수석코치를 맡았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는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으로 일했다. 동시에 아브라함 브람 감독에 뒤를 이어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아 활동하며 지도자 경력을 쌓아갔다.
 
 
윤 감독은 2002년 AFC U-16 챔피언십을 비롯해 3개 대회 연속 석권, 22경기 무패행진 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청소년대표팀은 축구 기자들 사이에서도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윤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대표팀이 해외에서 벌어진 3개 대회에서 연속 우승하며 연속 무패 기록도 세웠다. 이 기록은 지난 2003년 6월 부산 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부산국제청소년대회 풀리그에서 아르헨티나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후반전 연속골을 허용하며 0-2로 패해 끝이 났다.
 
이후 16년 만에 2003년 핀란드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3전 1승 2패(한국 1-6 미국, 한국 2-3 스페인, 한국 3-2 시에라리온)를 기록하며 성적 부진으로 사퇴했다. 비록 전패하기는 했지만, 당시 대표팀의 잠재력과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여줘 윤 감독은 전도유망한 지도자로 이름을 날리는 계기가 됐다. 사퇴 이후 한달만에 그는 U-18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는다. 
 
이후 경남FC, 대전 시티즌의 수석 코치를 맡으며 선수 육성에 힘쓴다. 2007년 윤 감독이 경남 FC 코치로 있을 당시 14개 K리그 감독은 시즌 동안 감독을 잘 보좌한 최고의 코치로 그를 뽑기도 했다. 그는 14명의 감독들로부터 1순위부터 3순위까지 3명씩 코치를 추천을 받은 결과 5명의 감독으로부터 1위로 꼽혔다.  
 
2011년 전남 드레곤즈는 리그 우승을 위해 윤 감독을 기술분석관으로 영입했다. 2012년 8월 정해성 전남 드레곤즈 감독이 감독직에서 사임 후 한시적으로 감독대행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후 하석주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겨주고 윤 감독은 전남 드레곤즈 수석코치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2년 12월 윤 감독은 대한축구협회에 의해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지난 18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2015년 국제축구연맹 여자월드컵 조별리그 E조 3차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2-1 역전승을 거두면서 16강 진출을 달성했다. 2003년 미국 대회에서 처음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태극낭자들은 12년 만에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조별리그에서 1승1무1패(승점4)를 기록하며 조 2위로 사상 처음 16강 진출의 쾌거를 일궈냈다. 
 
“여자 잘 알아”
고독한 승부사
 
이번 성과는 그동안 윤 감독이 쌓아온 성과가 빛을 보는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여자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윤 감독은, 이전까지 남자 선수들만 가르쳤던 지도자다. 때문에 의구심의 눈초리가 있었다. 과연 여자들을 잘 이끌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비단 결과 때문만이 아니다. 윤 감독의 지도를 받는 선수들은 절대적으로 윤 감독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 감독은 ‘아빠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술 담배도 가까이하지 않고, 조용한 성품에 말투도 부드럽다. 선수들이 실수하면 윽박지르기보다 안으로 품는 스타일이다. 혹독한 생존 경쟁 속에 축구를 해 온 선수들은 윤 감독의 배려와 믿음에 반했다. 선수들은 윤 감독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관심 속에 도전한 월드컵이지만 하나로 똘똘 뭉쳐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동메달의 주역인 전가을은 “솔직히, 감독님이 처음 부임했을 때는 걱정이 있었다. 여자를 가르쳐본 이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데, 지내다 보니 마치 오래도록 여자들만 가르쳐 오신 분 같았다”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진심이다. 아부하기 위한 발언이 아니다. 다른 모든 선수가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감독님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엄청난 신뢰를 보였다.
 

전 선수는 “작은 것 하나까지 직접 챙겨주시는 모습에 감동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라면서 “감독님과 함께라면 정말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리더에 대한 확신을 전했다. 한국 여자축구가 자랑하는 지소연 역시 비슷한 견해를 전했다.
 
지 선수는 윤 감독을 향해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그런데 가끔은 어머니 같은 느낌도 받는다. 말로 표현하기 복잡하다”는 말로 특별한 감정을 표했다. 이어 “이제는 감독님도 여자축구에 대한 적응이 완벽하게 끝나신 것 같다. 여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계신다. 무서울 때는 정말 무섭지만, 자상할 때는 한없이 자상하시다”고 말했다..
 
‘히딩크 못지 않다’
선수생활 늦게 시작
3년전 감독으로 선임
 
윤 감독은 이번 경기에서 후반 김수연을 교체 투입을 하며 과감한 승부사의 면모도 보였다.결과는 ‘신의 한수’였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이날 4-2-3-1 포메이션을 가동했다. 원톱은 ‘비장의 카드’ 박은선(로시얀카) 선수였다.
 
하지만 스페인은 경기 초반부터 좌우 측면을 완전히 장악했다. 한국은 미드필더 싸움에서 완패하며 전반 30분까지 제대로 된 슈팅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스페인은 한국의 측면 수비라인을 무너뜨리며 최전방 공격수를 향해 절묘한 크로스를 올리기 일쑤였다.
 
이에 따라 야심차게 선보인 박은선 카드도 힘을 쓰지 못했다. 이 틈을 타 공격의 강도를 높인 스페인은 전반 29분 마르타 코레데라의 왼발 크로스를 베로니카 보케테가 득점으로 연결하며 1-0 기선을 제압했다. 한국은 슈팅(2-8)과 유효슈팅(0-2) 수에서 모두 스페인에 밀리며 전반을 마쳤다.
 
윤 감독은 후반에 승부수를 던지며 맞불작전을 펼쳤다. 전반전 패인을 역이용해 상대를 공략하려 했다. 강유미와 지소연이 좌우 측면 공략에 집중하도록 주문했다. 결국 작전은 성공적으로 맞아 들었다. 스페인 측면 수비를 허물자 한국의 공격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후반 8분 주장 조소현은 측면 강유미의 크로스를 헤딩골로 연결했다. 1-1 동점이 된 후 윤 감독은 지친 박은선과 강유미 대신 유영아와 박희영을 각각 내보내며 공격의 고삐를 당겼다.
 
선수들 절대 신뢰
배려·믿음에 반해
 
한국은 후반 33분 김수연이 이른바 ‘슈터링(슛+센터링) 골’을 성공시키며 역전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김수연은 박스 오른쪽에서 크로스를 시도했지만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골망 구석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측면 공격 강화를 위해 후반 시작과 함께 김수연을 교체 투입한 윤 감독의 선택이 제대로 빛을 발한 셈이다.
 
 
<min1330@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