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직속' 새판 짜지는 법무-검찰라인 대해부

'까라면 까는' 본격 공안통 시대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청와대는 황교안 국무총리를 선택했다. 공안검사 출신인 그는 이완구 전 국무총리에 이어 '부패와의 전쟁'을 추진할 예정이다. 검사출신 총리를 임명해 지금의 공안정국을 강화하겠다는 속셈이 읽힌다. 후임 법무부장관에도 왕년의 공안검사가 대기 중이다. 그러나 이들의 손발이 돼야 할 사정기관은 정권 초만큼 '충성'하지 않는 모습이다. 사정기관의 중추인 검찰총장 교체론이 나도는 배경이다.

'슈퍼특검'이 물밑 추진되고 있다. 지지부진한 '성완종 리스트' 수사와 관련해 새정치민주연합 측은 이른바 슈퍼특검 도입을 여당 측에 제안했다. 지난 11일 여야 원내수석부대표는 6월 임시국회 일정을 합의하면서 특검 등 성완종 리스트 후속 대책을 의논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는 같은 날 취재진과 만나 "우리당은 원칙적으로 상설특검이 아닌 슈퍼특검을 제안했다"라며 "새누리당에서는 (슈퍼특검이 아닌) 상설특검 형태라면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라고 말했다. 앞서 새정치민주연합 민병두 의원은 지난 4월 특검 전환과 관련해 "'미니특검' 대신 '슈퍼특검'이 수사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부실한 수사
슈퍼특검 도입?

문무일 대전지검장을 정점으로 한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은 현재 15명의 인력(수사관 등 실무진 제외)이 파견돼 있다. 문 지검장은 특별수사팀장으로서 청사를 지켜왔다. 주말도 없이 직원들을 독려하며 수사에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방대한 수사 분량에도 인력이 보충되지 않아 '윗선'의 방해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실제 성완종 리스트 수사는 18대 대선자금 의혹에 이르러 한 달 가까이 진전 없는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이대로라면 특검법이 통과해도 진실 규명은 요원한 모습이다. 현행 특검법에 따라 특검 수사팀 인력은 5명 이내로 제한된다. 사실상 '미니특검'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따라서 야당은 15명 이상의 수사 인력이 가동되는 슈퍼특검 도입을 주장했다. 반면 새누리당은 슈퍼특검 도입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별수사팀은 금명간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 짓고 늦어도 19일 이내에는 수사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다. 사건은 이완구 전 국무총리와 홍준표 경남도지사를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봉합될 전망이다.

전·현직 대통령 비서실장 등 친박 실세들에 대해선 불기소 방침이 확정됐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은 의혹에 휩싸인 새누리당 홍문종 의원은 지난 8일 소환조사로 사실상 면죄부를 받았다. 이날 홍 의원은 취재진과의 대화에서 '성 전 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수수한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다음날 홍 의원은 훨씬 여유로운 모습으로 청사를 빠져나왔다.

유야무야된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은 서병수 부산시장과 유정복 인천시장의 서면답변서를 끝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지난 12일 기준 모두 2차례에 걸쳐 질의서가 오갔고, 검찰은 이들에게서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 전 회장으로부터 2012년 2억원을 전달받은 혐의로 소환 통보된 새누리당 김모 전 수석부대변인은 불구속 기소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일각에선 현재 수사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는 김 전 대변인의 '입'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회유에 넘어갈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다. 특별수사팀은 김 전 대변인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당하며 체면을 구겼다. 김 전 대변인의 침묵으로 대선자금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정권의 도덕성과 직결된 대선자금 수사가 성역 없이 진행될 것이라 기대했던 이는 드물다. 문 지검장조차 성완종 리스트 수사 과정에서 받은 심리적 압박이 상당했다고 한다. 앞서 문 지검장은 "양심을 지키겠다"라며 '검사직'을 내건 듯한 인상을 내비쳤다. 이른바 '채동욱 찍어내기' 논란을 일으킨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성완종 수사 사실상 종결…슈퍼특검 추진
특검 도입 앞두고 검찰총장 교체설 고개

김진태 검찰총장은 아예 수사팀으로부터 직보를 받고 수사를 지휘했다. 외부의 개입과 방해를 최소화하려는 시도였다. 수사 착수를 앞두고는 '진인사대천명'이란 당부로 성역 없는 수사를 주문했다. 그런데 잠재적 수사 대상자인 청와대는 김 총장을 믿지 못하고 여러 안전장치를 만들었다고 한다. 황교안 당시 법무부장관(현 국무총리 내정자)은 청와대가 내세운 안전장치 가운데 하나였다.

황 장관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당시 채동욱 전 검찰총장과 선거법 적용을 놓고 마찰을 빚었다. 황 장관은 공직선거법을 적용한 기소에 반대했으나 채 전 총장은 선거법 적용에,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구속수사까지 요구했다. 당시 두 '장관급 검사'는 서로 통화도 안 할 만큼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는 후문이다.

 

이들의 갈등은 원 전 원장을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봉합됐다. 하지만 채 전 총장은 불과 석 달 만에 석연찮은 이유로 옷을 벗었다. 같은 맥락에서 김 총장이 대선자금 수사에 착수했다면 채 전 총장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됐다. 전·현직 대통령 비서실장이 검찰에 출두하는 풍경은 정권에 큰 부담이다.

지난달 14일 <일요시사>는 '성완종 게이트 대선자금 수사 막힌 진짜 이유'라는 기사에서 황 장관의 국무총리 발탁 소식을 최초로 전한 바 있다. 당초 청와대는 개점휴업 상태인 '부패와의 전쟁'을 황 장관에게 맡기는 방안을 고려했다.

하지만 황 장관은 이 전 총리에 대한 수사 막바지까지 법무부에 남아 있었다. 국무총리 내정 발표를 서두르지 않은 것이다. 성완종 사건의 파장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황 장관의 역할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인지 수사팀도 모르는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왔다. 야당 의원이 대거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일보>의 '성완종 장부' 보도가 대표적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황 장관을 겨눠 "수사에서 손을 떼라"라고도 했다.

특검 무마할
구원투수 고심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퇴진은 김 총장의 힘을 약화시킨 원인으로 지목된다. 현재 검찰은 인사철을 앞두고 빠르게 권력이 재편되고 있다. 지난 2월 김수남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은 대검 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RO사건의 주역이었던 김 차장은 차기 검찰총장 '0순위'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김 차장의 이른 승진은 김 총장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됐다.

현재 김 차장은 김 총장을 거르고 청와대와 직접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선자금 수사가 가로막힌 배경에는 김 총장의 약화된 장악력이 몫을 했다고 전해진다. 한 검찰 관계자는 "요즘 들어 김 총장의 짜증이 부쩍 늘었다"라며 "검사들도 어디에 줄을 대야할지 고민하는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임기는 비록 6개월이나 남았지만 법무부 장관이 곧 바뀔 터라 김 총장의 자진 사퇴 가능성이 조심스레 점쳐진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차례 공개된 채널로 '특사(특별사면) 수사'를 압박했다. 지난 4월28일 "성완종 특별사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라고 말한데 이어 5월4일에도 "사면제도를 전면 개선하라"라고 지시했다. 특사 카드는 성완종 메모가 발견된 직후 국정원이 기획하고 제공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국정원은 성 전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난 4월9일 정치개입 중단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특사 수사는 처음부터 무리한 '하명 수사'라는 지적이 많았다. 청와대의 메시지는 지난 2007년 성 전 회장이 사면을 받는 과정에 참여정부 실세나 이명박대통령직인수위 인사가 로비를 받고 개입했으니 이를 입증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특사 로비는 청와대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이를 입증할 증거는 무엇도 없었다. 메모와 인터뷰가 있는 성완종 리스트와는 시작점부터 달랐다.

더구나 이명박대통령직인수위 비서실에 있던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MB 측 핵심인사가 성 전 회장의 사면을 특별히 챙겼다"라고 증언했다. 새누리당 내부에서조차 "청와대가 너무 나갔다"라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정치권의 '민원'이야 어찌됐든 김 총장은 청와대의 하명을 처리해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검찰은 참여정부 당시 사면 업무를 담당했던 박모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을 서면조사하는 선에서 수사를 중단했다. 마땅한 혐의가 없는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청와대는 김 총장의 '충성도'를 의심하는 눈치다. 수사 결과에 따라 김 총장의 거취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란 분석이 잇따른다.

정치권이 논의 중인 특검법도 김 총장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야당은 물론 여당 또한 성완종 특검법에 찬성하는 모습이다. 나아가 특검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면 수사를 지휘한 김 총장의 책임론이 불가피하다. 청와대로서는 특검 도입과 동시에 법무부-검찰 라인을 재정비할 가능성이 크다. 만에 하나라도 성완종 리스트의 불씨가 불법 대선자금 의혹으로 번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황 장관의 후임이 될 법무부 장관을 찾고 있다. 언론은 길태기 전 서울고검장과 곽상욱 감사원 감사위원 등을 유력 후보군으로 보도했다. 길 전 고검장은 사법연수원 15기이며, 곽 위원은 14기이다. 두 전직 검사는 청와대에 인사검증동의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황교안과 호흡 맞출 공안출신 법무장관 거론
힘 빠진 김진태 총장…떠오르는 김수남 차장

김 총장의 사법연수원 기수는 14기이다. 조직 관례상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보다 낮은 기수가 임명된다. 다시 말해 14기 이하의 장관 임명은 김 총장에겐 용퇴 압박과 다름없다. 덧붙여 국무총리 지명자인 황 장관의 기수(13기)와 나이를 고려하면 후임 법무부 장관은 2기수 아래인 15기에서 나올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 같은 조건에 부합하는 후보군은 길 전 고검장이다. 길 전 고검장은 황 장관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이다. 그런데 길 전 고검장에게는 꼬리표가 있다. 채 전 총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는 과거다.


길 전 고검장은 당시 대검 차장으로 채 전 총장이 사퇴하자 2개월간 검찰총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이후 서울고검장으로 사실상 좌천돼 옷을 벗었다. 때문에 길 전 고검장이 재신임될 가능성은 높지 않은 분위기다. 특히 길 전 고검장은 지난해부터 법무법인 광장 대표변호사를 맡아 고액 수임료 문제가 지펴질 수 있다.

또 다른 15기인 소병철 전 법무연수원장은 당초 유력 후보군으로 분류됐다. 소 전 원장은 길 전 고검장과 함께 40대 검찰총장 최종 후보군에 오른 바 있다. 지난해 소 전 원장은 대형 로펌행을 거부하며 박근혜정부 임명직을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경합 후보군으로 강등되며 차기 권력에서 멀어지는 모습이다.  소 전 원장이 강등된 배경으로는 불리한 출신 지역(전남 순천)이 꼽히고 있다.

의외의 다크호스는 곽상도(15기)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이다. 박근혜정부 초대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을 지낸 곽 이사장은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당시 황 장관과 호흡을 맞춘 공안 검사다. 곽 이사장은 '채동욱 찍어내기'에도 개입한 의혹을 받았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공신'이라 요직에 중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15기 가운데는 석동현 전 서울동부지검장과 김홍일 전 부산고검장이 경합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공안통 심고
레임덕 막아

만약 14기로 눈을 돌린다면 곽 위원이 유력한 후보로 떠오를 수 있다. 곽 위원은 지난 2012년 4월 감사원 감사위원으로 임명됐고 현재 그 직을 유지하고 있다. '전관예우 논란'에서 자유로워 여권의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14기인 안창호 헌법재판관과 노환균 전 법무연수원장도 경합 후보로 거론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른바 '공안통'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인물이 법무부 장관이 되더라도 전임자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공안수사를 강화하고 사정정국을 확대해 레임덕을 막겠다는 것이 정권 차원의 '의지'로 해석된다. 덤으로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야당을 겨냥한 기획수사까지 성공하면 금상첨화다. 최근 야당 중진 의원이 연루된 부동산 비리 수사가 터져 나온 것이 한 예다. '황교안-000-김수남'으로 이어지는 공안라인의 마지막 퍼즐에 관심이 쏠린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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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