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400홈런 달성 국민타자 이승엽

‘라이언킹’ 살아있는 전설이 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라이언킹’ 이승엽이 기어이 400홈런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이다. 한국과 일본 무대 홈런을 합치면 559개다. 그가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400 고지는 일찌감치 넘었을 것이다. 이승엽이 그동안 기록한 1호 홈런부터 400호 홈런까지, 그가 남긴 발자취를 돌아본다.  
 
 
이승엽(40)은 청소년 시절 투수와 타자로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좌완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이던 1993년 청룡기대회에서는 발군의 실력으로 맹활약하며 12년 만에 모교에 우승기를 안겼다. 그는 대회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 청소년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승엽은 거듭 활약을 펼치며 우승기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고3 때 팔꿈치 부상을 당하면서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 부상이 오늘의 금자탑을 쌓는 결정적 계기가 된 셈이다.   
 
[ 1∼100호  ]
[1995-1999년]
 
이승엽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에 입학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당시 수능에서 총점 40점 이하를 기록해 대학 진학 자격을 잃게 됐다. 이 때문에 이승엽은 연고 지명을 통해 계약금 1억3200만원에 연봉 2000만원의 조건으로 1995년 연고팀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이승엽은 좌완투수 유망주였지만 경북고등학교 시절 당한 팔꿈치 부상으로 고생했다. 삼성 입단 초기부터 투수훈련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우용득 감독과 타격코치는 이승엽에게 배팅 재능이 있음을 알아봤다. 사실상 그는 청룡기 결승전에서 결승홈런을 쳤으며, 청소년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때도 타자로만 활약해 홈런상과 득점상을 받은 바 있다. 스프링캠프에서 돌연 이승엽을 타자로 전향시켜 1년간 타자로 기용한다.  
 

그의 첫 번째 홈런은 1995년 5월2일 광주 무등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KIA의 전신)를 상대로 뽑아냈다. 당시 그는 만으로 18세였다. 이승엽은 데뷔 첫 시즌 타율 0.285에 13홈런으로 신인으로서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같은 팀인 이동수에게 밀려서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1996년 삼성라이온즈에 백인천 감독이 부임했다. 백 감독은 이승엽에게 외다리타법을 전수했다. 그는 두 번째 시즌을 조정기로 보내며 전 시즌보다 저조한 기록으로 홈런 9개를 치며 3할의 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시기가 이승엽이 다음 시즌 홈런제조기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국프로야구 통산 400호 홈런 신기록
영원한 홈런왕…일본까지 합치면 559개
 
1997년 이승엽은 본격적으로 장타에 눈을 뜬다. 이때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화려한 타선의 중심축에 서게 된다. 그는 3할을 쳐내는 정교함과 필요할 때마다 나오는 타격 본능으로 팬들에게 ‘라이언킹’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해 이승엽은 홈런 23개(1위), 타점 114개(1위), 최다안타 170개(1위)를 기록한다. 정규시즌 MVP와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 
 
1998년 이승엽의 기량은 더욱 무르익었다. 이미 전반기에만 홈런 25개를 때리며 2위와 8∼9개 차이를 벌렸다. 홈런왕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뒤에서 좇아오던 두산 베어즈의 타이론 우즈가 9월과 10월에만 11개의 홈런을 추가하면서 이승엽을 앞질렀다. 이에 반해 이승엽은 후반기 들어 좀처럼 홈런을 치지 못했다. 결국, 그해 홈런왕은 타이론 우즈가 됐다. 이승엽은 38개 홈런과 102타점을 기록했다.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왕을 빼앗긴 뒤 이승엽에게 남은 것은 독기뿐이었다. 그는 1999년 5월5일 홈구장인 대구에서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100홈런을 뽑아냈다. 당시 22세로 최연소 100호 홈런 고지를 정복했다. 
 

[101∼200호 ]
[1999-2001년]
 
이승엽은 1999년 8월까지 약 34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괴력을 보였다. 7월에 이미 전년 타이론 우즈가 세운 42개 홈런을 돌파했다. 그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에 50홈런을 치며 신기원을 이뤄냈다. 한화 이글스의 장종훈이 40홈런 시대를 연 지 7년 만에 기록을 깬 것이다. 그는 홈런 54개(1위), 타점 123개(1위), 득점 128점(1위), 출루율 0.458(1위), 장타율 0.733(1위)을 기록하며 타격 5관왕에 올랐다.
2000년과 2001년은 이승엽에게 위기의 시기였다.
 
 
외다리타법의 약점이 드러나자 2000년에는 홈런 36개와 2001년에는 홈런 39개를 기록했다. 지나 시즌 50홈런을 기록한 선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타율도 0.279로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만 24세이던 2001년 6월21일 대구 홈구장에서 한화 이글스와 경기에서 200홈런을 달성했다. 외다리타법이 약점이 됐지만 꾸준한 기량을 과시했다.
 
또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일본과 예선전에서 괴물투수로 불리던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2점 홈런을 날렸고,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또다시 마쓰자카를 상대로 결정적인 2타점 2루타를 때려 동메달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2002년 시즌 현대 유니콘스의 심정수와 홈런경쟁을 벌여 홈런 47개를 기록해 홈런왕을 차지했다. 그해 한국시리즈 LG 트윈스와의 6차전 경기에서 마지막 타석 전까지 20타수 2안타로 극도의 타격 부진을 겪는다. 9회말 이승엽은 극적인 동점 3점홈런을 터뜨리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다음 타석에 나온 마해영의 끝내기홈런으로 이어져 삼성 라이온즈가 창단 후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는 수훈을 세웠다. 비록 상대적으로 부진한 시즌을 보냈지만, 이승엽은 시즌MVP, 홈런왕, 골든글러브 1루 부분을 수상했다. 
 
[201∼300호 ]
[2001-2003년] 
 
이승엽에게 2003년은 전성기였다. 타격폼을 수정한 그는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6월22일 대구구장, 이날은 이승엽의 300홈런 볼을 잡기 위해 관중석에 잠자리채가 등장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날 팀이 2대3으로 뒤지던 8회말 이승엽은 초구 직구가 가운데로 몰리자 주저없이 방망이를 돌렸다. 홈런임을 직감한 그는 두 팔을 번쩍 들며 경기장을 돌았다. 300홈런을 축하하는 축포가 달구벌 경기장 밤하늘을 수놓았다.
 
이날은 단순히 300홈런만 기록한 날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연소 300홈런을 달성한 선수가 됐다. 이승엽의 경기수는 1075경기로 아쉽게도 일본 다부치 고이치가 기록한 세계 최소기록인 1072경기를 뛰어넘지 못했다. 하지만 이승엽의 당시 나이는 26세로 일본 왕정치(27세)의 세계 최연소 300홈런 기록을 무려 5개월 앞당겼다. 
 
이날 동점이던 9회말 2사 만루에서 생애 첫 끝내기 만루홈런을 터뜨리며 자신의 대기록을 자축했다. 9시즌 만에 300홈런을 달성한 이승엽은 종전 장종훈이 14시즌 만에 달성한 기록을 5시즌이나 앞당겼다. 경기수로는 490경기, 타수로는 1271타수를 줄였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해 이승엽이 몇 개의 홈런을 치느냐로 모아졌다. 그는 아시아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2003년 9월25일 광주 KIA전에서 이승엽은 아시아 한 시즌 최다 55홈런을 뽑아냈다. 그 당시 이승엽의 홈런 타구가 많이 나오는 우측 외야 쪽부터 관중석이 꽉 채워졌다. 관중들은 그곳에서 역사적인 홈런볼을 잡기 위해 잠자리채를 들고 있었다. 이승엽의 55홈런볼의 가치는 현재 1억2500만원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승엽은 아시아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을 보유한 일본 왕정치(55홈런)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승엽이 한 번만 홈런을 때리면 아시아의 신기록을 새로 쓰게 된다. 당시 모든 관심은 이승엽의 신기록 달성 여부에 모였다. 수십명의 기자들은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매일같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좀처럼 남은 홈런 한 개를 추가하지 못했다. 
 
10월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는 이승엽이 홈런을 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당연히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날 이승엽은 2회초 공격 4번타자로 나왔다. 선발투수가 던진 공을 통타한 그는 드디어 56호 홈런을 기록했다. 일본의 왕정치가 1964년 55개의 홈런을 터뜨린 후 무려 39년 만에 나온 대 신기록이었다. 이날은 이승엽이 ‘국민타자’로 거듭난 날이었다.
 
[301∼400호 ]
[2004-2015년] 
 

이승엽은 이미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역사에 남을 만한 대기록을 세웠다.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2003년 시즌이 종료되고 FA자격을 얻게 됐다. 그의 거취는 야구팬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승엽은 이미 오래전부터 메이저리그 진출을 희망하고 있었다. 팬들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인 그가 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에서 뛴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며 미국 진출은 불투명해졌다. 그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이루지 못하고 그해 12월 일본의 지바 롯데 마린스와 계약한다. 이후 약 8년간 일본 무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승엽은 한국에서 화려했던 전성기와 달리 일본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기복과 부침이 심했다. 그의 야구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시리즈 우승반지를 껴보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2011년 10월21일 이승엽은 기자회견을 열어 8년간의 일본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귀국했다. 그해 12월5일 연봉 8억원, 플러스옵션 3억원에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2012년에는 타율 0.307,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해 여전히 강타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 1차전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홈런 타이기록을 수립했고 6차전에서 결정타였던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첫 번째이자 최고령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2013시즌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는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과 결승대결에서 6대2로 이기며, 데뷔 이후 첫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을 맛봤다. 두산 베어스와 맞붙었던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타격 부진이 계속되어 7경기에서 타율 1할4푼8리(27타수 4안타)에 그쳤다. 2013년 11월1일 대구에서 열린 7차전까지 단 한 점의 타점을 뽑아내지 못하다가 7차전에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한 동점 적시타를 기록했다.
 
2014년에는 타격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 30홈런 100타점을 달성하며 국민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2014년 6월14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고, 7월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쓸어담았다. 9월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을, 한 달 후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투수서 타자로 전환
세계 최연소 100홈런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하였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때리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역대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기록은 3할8리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했다. '회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며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지난 6월3일 이승엽은 포항야구장에서 벌어진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 3회말에 투수 구승민을 상대로 두 번째 타석에 올랐다. 이승엽은 초구 스트라이크에 이어 2구를 우익수 뒤로 날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통산 400홈런을 기록했다.
 
개인통산 400홈런은 1982년 KBO리그가 출범한 이후 34시즌 만의 첫 기록으로 이승엽은 1995년 데뷔 이후 13시즌 만에 대기록을 달성했다. 현역선수 중 2위는 NC 다이노스의 이호준으로 그는 299홈런으로 이승엽에 100개 이상 뒤져있다. 
 
역대 KBO에서 300홈런 이상을 때린 선수는 양준혁(351홈런), 장종훈(340홈런), 심정수(328홈런), 박경완(314홈런), 송지만(311홈런), 박재홍(300홈런) 등 총 7명이다. 이승엽을 제외하면 심정수가 15시즌으로 가장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고, 박경완은 23시즌을 소화했다.  
 
이승엽의 개인통산 400홈런은 국내에서 처음 나온 기록인 만큼 의미가 깊다. 세계에서 지금까지 400홈런의 위업을 달성한 선수는 총 70명뿐이다. 147년 역사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52명. 80년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8명만이 400홈런의 위업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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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계 스캔들과 정치권 음모론

연예계 스캔들과 정치권 음모론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한때 연예계를 떨게 했던 ‘마의 11월’이 다시 온 걸까? 매년 11월마다 연예계와 방송가에서 각종 이슈가 터진다는 말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아슬아슬하게 11월은 넘기는가 싶더니 12월이 되자마자 연예계 이슈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동시다발로 터져 나온 연예계 사건·사고에 정작 중요한 이슈들이 가라앉고 있다. SNS에서 의혹이 제기되고, 이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게재된다. 얼마 가지 않아 기사로 보도된다. 유튜브 쇼츠로 제작돼 확산한다. 다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다. 방송으로 퍼진다. 방송분이 편집돼 다시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생산된 콘텐츠는 SNS를 통해 재생산된다. 다른 이슈가 불거진다. 반복된다. 하루 사이 연달아서 최근 이슈가 퍼지는 방식이다. 기사 등을 통해 정보가 대중에게 전달되던 시기는 이제 끝났다. 이제는 오히려 언론이 온라인 커뮤니티 글을 소스로 기사를 작성하는 판이다. 동시에 레거시 미디어를 통해 정보가 확산하던 시기도 지나간 지 오래다. 이제 모두가 유튜브로 이슈를 확인하고 댓글을 통해 의견을 표출한다. 문제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레거시 미디어로, 또다시 유튜브로 대표되는 뉴미디어로 정보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자극도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동시에 확인되지 않은, 왜곡된 내용이 처음 올라온 정보에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확산 속도 또한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몇 시간이면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를 비롯해 유튜브까지 퍼진다. 이 사이클은 무한정 돌아간다. 시간이 가면서 대중은 짧은 영상에 목말라 하고 있다. 분 단위의 영상보다는 초 단위 쇼츠에 더 열광한다. 영상 제작자는 조회수가 곧 돈이기에 대중의 입맛에 콘텐츠를 맞출 수밖에 없다. 도파민을 바라는 대중의 눈에 들기 위해선 흡인력 있는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불과 일주일 새 연예계에서 동시다발로 이슈가 터졌다. 과거, 약물, 갑질, 조폭 의혹 등 언급되는 단어만으로 충격이 일었다. 여기에 의혹에 연루된 연예인의 면면이 전부 각 분야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라는 점은 이슈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순식간에 커뮤니티와 유튜브 등이 불타올랐다. 배우 조진웅이 과거에 소년범이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올해 광복절 경축식을 비롯해 정부 행사에 자주 얼굴을 드러냈던 터라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반응이 많았다. 비상계엄 사태 때에도 SNS에 글을 올리는 등 말할 때는 하는 이른바 ‘개념 연예인’으로 알려져 있어 대중은 조진웅의 반응을 기다렸다. 기사, SNS로 한꺼번에 유튜브 타고 빠른 확산 하지만 소년범이었던 과거가 사실로 드러나고 그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동시에 조진웅의 은퇴를 두고 ‘과거의 일’이라는 의견과 ‘피해자를 생각하라’는 의견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일부 진보 진영 정치인이 한두 마디씩 말을 보태면서 의견 대립은 정치권으로까지 번졌다. 여기에 소년범 의혹을 최초로 기사화한 언론의 보도 윤리도 도마 위에 올랐다. 개그우먼 박나래는 매니저 갑질 의혹과 불법 의료 시술 의혹이 동시에 불거졌다. 매니저들이 박나래를 상대로 고소했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 줄줄이 이어진 후속 보도에서 드러난 의혹들이다. 박나래가 매니저들과 진실 공방을 벌이는 내용이 거듭해서 언론 보도, 유튜브 쇼츠 등으로 이어지면서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특히 불법 의료 시술 의혹은 ‘주사 이모’라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판이 커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 주사 이모는 박나래에게 주사 등을 통해 투약한 인물로 추정된다. 해당 인물의 SNS가 공개되면서 몇몇 연예인이 연루 의혹을 받고 있다. 경찰 조사가 예정돼있어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개그맨 조세호는 조폭 연루설에 휘말렸다. 조세호 의혹은 SNS를 통해 사진이 공개되면서 확산했다. 폭로자가 조세호와 조폭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그 여파로 조세호는 고정 출연하고 있던 <유 퀴즈 온 더 블럭>과 <1박 2일>에서 하차했다. 유명 연예인 도마 위에 아이돌 그룹 BTS의 정국과 에스파 윈터의 열애설도 비슷한 시기에 터졌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두 사람이 비슷한 위치에 ‘커플 타투’를 했다는 의혹이 나왔다. 두 멤버의 소속사인 하이브와 SM엔터테인먼트는 ‘노코멘트’라고 입장을 밝혔다. 두 그룹이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만큼 계속 언급되는 중이다. 한 건만으로도 상당한 파급력을 지닐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일각에서는 누군가가 민감한 이슈를 덮기 위해 연예계 사건·사고를 일부러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게 아니냐는 이른바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앞서 매년 11월마다 연예인 관련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두고 나왔던 이야기가 이번에 다시 나온 것이다. 정치나 사회 이슈와 비교해 연예계 관련 사건·사고 소식은 대중에게 직관적으로 다가가는 편이라 몰입도가 높다. 동시에 휘발성도 크다. 또 대중에게 잘 알려진 연예인일수록 사건의 파급력이 크다. 물론 연말연시를 앞두고 머리 아픈 이슈에 질린 대중에게 연예계 문제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소재라 말이 나오는 것일 뿐 확인된 바는 없다. 말 그대로 ‘도시괴담’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 심심찮게 보인다. 실제 여야가 한데 얽힌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교 문제, 야당에서 강하게 반발 중인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등이 연예계 이슈에 묻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3300만명이 넘는 고객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쿠팡 사태도 그 사건 규모에 비해 관심도가 떨어지고 있다. 마의 11월 12월로? 통일교 관련 논란은 당초 야당인 국민의힘에 포커스가 집중됐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통일교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다. 그러다 최근 그 범위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으로까지 확대됐다. 윤영호 전 통일교 세계본부장이 통일교에서 금품을 제공한 정치인을 진술하면서 민주당 인사들도 입길에 올랐다. 민중기 특별검사팀은 지난 8월 윤 전 본부장으로부터 ‘통일교가 국민의힘 외에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도 지원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했다. 윤 전 본부장이 언급한 인물 가운데 1명이 전재수 전 해양수산부 장관(당시 민주당 의원)이었다고 한다. 명품 시계 2개와 함께 수천만원을 한일 해저터널 추진 등 교단 숙원사업을 위해 줬다는 것이다. 금품수수 의혹이 보도되자 전 전 장관은 지난 11일, 전격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불법 금품수수는 없었다”면서 “장관직을 내려놓고 당당하게 응하는 것이 공직자로서 해야 할 처신”이라고 했다. 이어 “저와 관련된 황당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논란”이라며 “해수부가 또는 이재명정부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정권이 흔들릴 수도 있는 사안이라는 목소리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통일교 관련 논란으로 국민의힘에 맹공을 퍼부었는데 역풍이 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 국민의힘은 ‘통일교 특검’을 주장하면서 민주당과 이 대통령을 몰아가는 중이다. 공수가 뒤바뀐 것이다. 범여권에서 추진 중인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폐지를 두고 정치권이 갈등을 빚고 있다. 국민의힘이 국보법 폐지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여야 간 힘겨루기로 비화했다. 정치권 이슈 묻히고 쿠팡도 잠잠해지나? 지난 7일 민주당 민형배, 조국혁신당 김준형, 진보당 윤종오 의원은 국보법 폐지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의원들은 “국보법은 제정 당시 일본제국주의 치안유지법을 계승해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 악법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며 “국보법의 대부분 조항은 형법으로 대체 가능하며 남북교류협력법 등 관련 법률로도 충분히 규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국보법 폐지를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는 ‘국가보안법 폐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토론회에서 “국가정보원에서 대공수사권을 떼어내 경찰에 이관했지만 경찰은 그만한 준비가 제대로 안 돼 사실상 대공수사가 공중에 붕 뜬 느낌”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국보법을 폐지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연예계 이슈에 바로 직전 가장 큰 이슈였던 쿠팡 사태도 상대적으로 잠잠해졌다. 지난달 말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알려진 쿠팡 사태는 3370만명의 개인정보가 해외로 유출된 사건이다. 사실상 모든 고객의 정보가 털린 셈이다. 올 한 해 통신사, 카드사 등에서 개인정보 유출을 겪은 이용자는 또 한 번 직격탄을 맞았다. 쿠팡 사태는 해킹 등으로 정보가 유출된 여타 업체와 달리 전 직원의 소행으로 드러나면서 이커머스 업체의 보안 실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시에 2010년 창업 이래 이커머스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쿠팡 생태계의 민낯이 낱낱이 알려졌다. 동시에 쿠팡에서 일어난 노동자 사망사고도 재조명받는 중이다. 지난 10일에는 박대준 쿠팡 대표가 사임했다. 쿠팡은 “최근의 개인정보 사태에 대해 국민께 실망하게 한 점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이번 사태의 발생과 수습 과정에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경질이라는 의견이 많다. 당분간은 계속될 듯 일각에서는 음모론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여당 쪽에서 연예계 이슈를 터트린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고 있다. 통일교 논란, 국보법 폐지, 쿠팡 논란 등 대형 이슈가 여당 쪽에 불리한 내용이 아니냐는 설명이다. 한편에서는 여야가 동시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안인 만큼 특정 진영의 유불리를 따질 수 없다는 반박도 나온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