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25)전탁순 선인산업 대표

돈 없는 상인들 죽이고 자기만 살았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항상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 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40조원에 이른다. <일요시사>는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을 토대로 체납액 5억원 이상의 체납자를 추적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25화는 159억6300만원을 체납한 선인산업 전탁순 대표다.

서울 중심부에 자리한 용산. 용산은 1990년대 후반까지 컴퓨터의 메카였다. 지하철 1호선 용산역 주변엔 수많은 전자상가가 생겨났다. 주말이면 전자 제품을 보러 온 사람들이 거리마다 가득 찼다. 상가 통행로는 흥정과 호객 행위로 북적였다. 전자상가는 용산을 찾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른들의 일터였다.

IMF 때 부도

선인상가도 그랬다. 오밀조밀 가게가 밀집한 선인상가는 용산 일대의 랜드마크로 각인됐다. 1997년 부도로 운영사가 폐업하기 전까진 누구도 선인상가의 실패를 예견하지 못했다. 선인상가의 운영업체인 선인산업은 같은 해 11월14일 은행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를 냈다. 1998년 2월에는 선인산업의 대표 전선한씨의 은행 거래가 정지됐다.

선인산업의 부도는 전자 및 IT업계의 큰 사건이었다. 선인산업의 부도를 전후로 여러 컴퓨터 관련 유망 중소업체가 자금난에 휩싸여 문을 닫았다. 비교적 현금이 풍부했던 선인산업은 철강회사인 서울제강의 연대 보증으로 재정난을 자초했다. 당시 서울제강은 선인산업의 계열사 가운데 하나였다.

특수강 전문업체인 서울제강은 IMF 외환위기 여파와 판매부진이 겹치면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인천에 본사를 둔 서울제강은 당시 주거래은행인 서울은행 동인천지점에 만기도래한 12억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했다.


1997년 11월14일 1차 부도를 낸 서울제강은 다음날인 15일, 최종 부도처리됐다. 선인산업은 서울제강에 400억원의 지급보증을 섰다가 같은 날 부도를 맞았다. 부도에 따른 선인산업의 지급보증 액수는 2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선인산업은 부동산 임대업을 통해 수익을 냈지만 1995년부터는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 및 유통에 나서는 등 사업 확장에 의욕을 보였다. 이 무렵 전자제품 무역은 유래 없는 호황을 맞았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노키아 휴대폰을 대리 판매한 선인산업의 실적은 신통치 못했다. 경영진은 영상사업부를 꾸려 경기 양평 덕소에 카메라 생산 라인을 가동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선인산업은 선인상가를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사업 자금을 융통했다. 선인산업의 부도는 선인상가에 입주한 중소 상인들의 일자리가 사라짐을 뜻했다. 또 상인들과 전대차계약을 맺고 상가를 임대했던 임차인들 역시 초기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상황에 처했다. 선인상가가 채권단의 주도로 경매에 넘어가면 자칫 거리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이때 선인산업은 1200여명의 임차인들을 대상으로 임대계약을 전세계약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상가가 매각되더라도 전세권이 있으면 남은 권리금을 보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선인산업이 제시한 해결책에 찬성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선인산업 주주 부채를 떠안아서라도 상가를 정상화시키고자 했다. 선인산업이 인천지방법원에 화의신청을 냈을 당시 부채는 1218억원, 순부채는 585억원에 달했다.

서울시 29억 국세청 130억6400만원
선인산업 부도 직후 비상장주식으로 뒷돈

선인상가의 전체 부동산 감정가는 700억∼800억원으로 금융권에 정상 매각된다면 순부채를 제하고도 얼마간 버틸 수 있었다. 더구나 임차인들은 350억원상당의 임차보증채권을 갖고 있었다. 1999년 10월 임차인들은 선인산업 주주들과 합의해 경매 없이 선인상가의 근저당권과 채권을 넘겨받기로 약정했다. 또 선인산업 경영진은 미국 론스타펀드에 넘어간 일부 채권을 상인들이 인수할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그러나 약정은 휴지조각이 됐다. 선인상가가 법원 경매에 넘어간 것이다. 이때 등장한 회사가 지포럼에이엠씨다. <일요시사>는 지난 3월26일 연속기획 시리즈인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17)천세명 지포럼에이엠씨 대표'라는 기사에서 관련한 소식을 전한 바 있다.

결국 임차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값에 선인상가를 인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매물에 눈독을 들인 중견기업 대한전선은 임차인조합에 1300억원을 빌려주고 연 25%의 이자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임차인과 상인들이 버틴 것은 당시 'PC방 붐'을 타고 선인상가의 경기가 지속적인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임차인조합과 약정했던 경영진의 태도가 바뀐 것도 같은 이유다. 군인공제회를 포함한 여러 곳이 선인상가 매수에 관심을 보였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당시 선인산업 대표였던 전탁순씨는 상인들의 '뒤통수'를 쳤다. 매각금액 1500억원을 받고 미국계 투자회사인 리만브라더스에 상가를 넘기기로 합의한 것이다. 앞서 경매를 통해 상가를 낙찰 받은 임차인조합은 잔금 850억원을 납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임차인들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여론의 반대로 리만브라더스 매각은 무산됐지만 전씨는 선인상가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전씨는 1998년 선인산업에 비상장 주식을 양도하면서 수십억원의 매매대금을 챙겼다. 특히 선인산업은 전씨 소유의 주식을 사들이기에 앞서 주주총회를 통해 감자를 결의하고, 주식매입 직후 자본금을 감소시키는 등 회삿돈을 줄여 전씨에게 안겼다.

전씨는 선인산업에 빌려준 돈을 제하고 투자금을 전액 회수했다. 이 무렵 전씨는 타워크리스탈빌딩 등 부동산은 물론 다른 회사의 주식을 대량 보유한 전형적인 '투기 부자'였다. 선인산업은 전씨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도난 주식의 매매대금을 주당 100만원으로 책정했다. 대법원은 관련 내부거래의 위법성을 인정했다. 과세당국은 전씨에게 세금을 물렸다.

선인산업은 2003년 11월부터 주민세 등 3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서울시가 징수할 체납액은 25억8400만원이다. 선인산업은 2002년부터 법인세 등 5건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국세청이 과세한 체납액은 91억4400만원이다.

선인산업의 대표자 전탁순씨는 개인 자격으로도 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다. 2005년 1월부터 주민세 등 3건의 지방세를 체납했다. 서울시가 거둘 세금은 3억3300만원이다. 국세청에도 전씨는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1996년부터 종합소득세 등 12건의 세금을 체납했고, 확인된 체납액은 39억200만원이다.

전씨 앞으로 달린 세금의 합은 159억6300만원으로 집계됐다. 선인산업의 계열사인 서울제강 역시 고액체납 법인에 올라 있다. 관련 체납액까지 더하면 전체 액수가 200억원에 육박했다. 서울제강은 2004년부터 법인세 등 8건의 세금을 누락했다. 체납액은 32억5200만원이었다.

전형적인 부자

그런데 국세청이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에는 서울제강 대표자의 이름이 생략돼있다. 서울제강이 폐업한 데다 대표자도 없어 부과한 세금은 사실상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전씨의 주소지는 서울 노원구 월계동이었다가 경기 용인에 있는 보정동으로 바뀌었다. 지하철 분당선 인근에 있는 3억∼4억원대 아파트가 전씨의 새 주거지로 파악됐다. 현재 전씨는 사업 실패로 세금을 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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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