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맛따라 ②경북 포항시

걷고, 먹고, 즐기고…영일만 봄 별미여행

첫 목적지 내연산계곡은 봄 풍경을 만끽하며 트레킹을 즐기기 좋다. 계곡 따라 산길이 이어지는데, 곳곳에 폭포가 즐비해 지루할 틈이 없다. 내연산계곡의 입구 격인 보경사에서 경상북도수목원까지 12.8km 숲길에 데크 로드와 안전 펜스 등이 설치되어 남녀노소 모두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봄 나들이 떠나기 좋은 내연산계곡·기청산식물원

내연산계곡의 좋은 점은 굳이 모든 코스를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연산폭포까지 다녀와도 내연산계곡의 하이라이트는 다 구경하는 셈이다. 아이와 함께 걸어도 왕복 2시간이면 넉넉하다. 내연산계곡 최고 절경은 연산폭포다. 연산폭포 가기 전에 구름다리가 아찔하게 걸려 있고, 그 아래로 관음폭포가 흘러내린다. 출렁이는 구름다리를 건너면 굉음과 함께 쏟아지는 연산폭포를 만난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불리는 겸재 정선이 청하현감으로 재직할 때 〈내연산삼용추도〉라는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니, 내연산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내연산 절경
연산폭포

내연산계곡에서 나와 찾을 곳은 기청산식물원이다. 아름다운 식물원으로 손꼽히는 이곳에는 토종 들풀과 수목, 각종 꽃 등 식물 2500여종이 자란다. 5~6월이면 작약, 초롱꽃, 약모밀, 쪽동백, 당조팝나무 등이 환하게 꽃을 피운다. 새들이 지저귀고 온갖 꽃과 나무가 울창한 식물원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절로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양치식물원, 자생화원, 아열대원, 희귀멸종위기 식물원 등이 있는데, 아이들은 커다란 낙우송이 있는 곳에 가장 흥미를 보인다. 나무 둘레에 뿌리가 송이처럼 솟아났기 때문이다. 뿌리로 숨을 쉬는 희한한 모습에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식물원에서 나와 포항 시내로 가는 길, 사방기념공원도 들러볼 만하다. 1960~1970년대 사방 사업에 종사하며 국토 녹화에 힘쓴 사방 기술인의 자료를 전시한 곳이다.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조형물이 있다.

동해 최대 규모 농수산물 집결 ‘죽도시장’
매콤 물회·깊은 맛 전복죽 한 그릇 뚝딱


자, 이제 출출해질 시간이다. 죽도시장에 가면 전복죽과 물회 등 포항의 별미가 기다린다. 죽도시장은 포항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 동해안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상설 시장이자, 경북과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이 집결·유통되는 요충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작은 시장이었지만, 1970년대 초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대형 상설 시장이 되었다. 2000여개의 점포가 빼곡하며, 김과 파래, 매생이부터 상어, 고래 고기까지 동·서·남해안에서 나는 수산물이 거래된다. 어시장 구역 외에도 농산물거리와 먹자골목, 떡집골목, 이불골목, 한복골목 등이 있다. 

시장 구경에서 음식이 빠질 수 없는 법. 죽도시장의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물회다. 시장 한쪽에 물회골목이 있다. 물회는 고기를 잡느라 바쁜 어부들이 한 끼 식사를 빨리 해결할 요량으로 먹던 음식. 방금 잡은 물고기를 회 쳐서 고추장 양념과 물을 넣고 훌훌 들이마신 데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어부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차차 주민에게 알려지면서 ‘포항물회’라는 지방 특유의 음식으로 정착했다. 죽도시장 입구에 자리한 ‘운하회대게식당’은 가자미, 광어, 우럭, 도다리, 노래미 등 제철에 나는 흰 살 생선으로 물회를 만든다. 배, 마늘, 미나리, 양파, 오이, 당근, 쪽파, 고추장, 참기름, 김 등 양념도 12가지나 들어간다. 갖가지 해산물 반찬에 매운탕을 곁들이는 것도 특징이다. 매콤하고 시원한 물회 한 그릇 비우면 나른한 몸에 생기가 도는 느낌이다.

군침 도는
다양한 별미

전복죽도 유명하다. 굵직하게 썬 전복에 참기름을 두르고 끓이는데, 고소한 풍미가 남다르다. 내장을 함께 넣고 끓여 깊은 맛이 난다. 그 맛에 반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다 보면 금세 바닥이 보여, 배가 부르지 않으면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정도다.뜨끈한 수제비도 지나치면 섭섭하다. 시장 한쪽에 수제비를 파는 좌판 식당이 늘어선 골목이 있다. 메뉴는 수제비와 칼국수, 칼제비가 전부. 감자와 부추 등을 넣고 팔팔 끓인 멸치 국물에 칼국수와 수제비를 넣고 김 가루를 뿌려 낸다. 탁자마다 양념장과 다진 청양고추가 있어 취향에 따라 넣어 먹는다. 칼국수와 수제비 중 뭘 먹을지 고민이라면 ‘섞어’로 통하는 칼제비를 선택한다. 한 그릇에 칼국수와 수제비를 반씩 담아준다. 

죽도시장 앞으로는 포항운하가 흐른다. 1970년대 초 포항제철을 준공하며 물길이 막힌 동빈내항 일대에 오염물이 쌓여 죽도시장까지 악취가 진동했는데, 이를 과거의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1.3km 길이의 물길을 냈다. 포항운하관에 가면 동빈내항의 역사, 운하의 설립 배경과 건설 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영일대해수욕장은 따뜻한 봄 바다의 정경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원래 이름은 북부해수욕장이었지만, 해상 누각인 영일대가 세워지면서 영일대해수욕장으로 바뀌었다. 해수욕장 뒤편으로 카페와 레스토랑, 횟집 등 유흥 시설이 밀집해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기에도 좋다.
이왕 나선 걸음이니 구룡포까지 가보자.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어부들의 부지런한 모습, 생선을 손질하는 여인네들의 웃음소리, 바다를 분주히 오가는 고깃배의 모습이 정겨운 곳이다.

요즘 구룡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근대문화역사거리다. 좁다란 골목 양쪽에 1910년대 일본인 어부들이 살던 적산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특히 1938년 구룡포어업조합장을 지내면서 큰 부를 쌓은 하시모토 젠기치의 이층집이 눈길을 끈다. 일본에서 공수한 건축자재로 지은 이 건물은 부쓰단, 고타쓰, 란마, 후스마, 도코노마 등 일본 건축양식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지금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며, 건물 내부에는 당시 구룡포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었다.
골목 가운데 자리한 일본식 찻집 ‘후루사토야’도 이색적인 경험을 하게 해준다. 일본어로 ‘고향 집’이라는 뜻의 일본식 목조 가옥으로, 일본 장식품과 인형, 다기 세트 등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민 방이 일본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본 녹차, 호지차, 커피 등을 판매하는데, 다다미방에 앉아 편안하게 차를 마시며 지친 다리를 쉴 수 있다. 

구룡포에는 아주 오래된 국수 공장이 있다. 1971년 문을 연 ‘제일국수공장’이다. 당시 구룡포에는 국수 공장이 일곱 개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문을 닫고 이 집만 남았다고 한다. 일흔이 훨씬 넘은 이순화 할머니가 지금도 소금물로 반죽하고 재래식 기계로 면을 뽑아 바닷바람 부는 건조장에 내다 말린다. 자연 건조를 고집하는 이유는 온풍기로 말리면 염분이 국수 표면에 달라붙어 짠맛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 집 국수는 탱탱하고 쫄깃해 씹는 맛이 좋다. 공장 뒷마당으로 가면 국수 말리는 것을 구경할 수도 있다. 봄 햇살에 말라가는 국수 가닥이 고운 무명실처럼 보인다.
맞은편에 자리한 ‘할매국수’는 제일국수공장의 국수만 사용해 멸치국수를 말아 내는 집. 고명으로 시금치와 깨소금을 단출하게 올린 국수가 어린 시절 할머니가 만들어준 국수를 떠올리게 한다.
구룡포초등학교 앞의 ‘철규분식’은 찐빵으로 유명하다. SBS-TV 〈생활의 달인〉에서 찐빵 최강 달인으로 소개될 만큼 유명세를 떨치는 곳이다.
구룡포 지역의 토속 음식 모리국수도 맛보자. 큼지막한 솥에 그때그때 잡힌 생선과 채소, 고춧가루, 칼국수 등을 듬뿍 넣고 걸쭉하게 끓인다. 어부들이 뱃일을 마치고 먹던 음식으로, 매콤한 국물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게 한다. ‘많다’는 뜻이 있는 일본어 ‘모리(森)’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자료제공 : 한국관광공사
www.visitkorea.or.kr

--------------------------<여행 정보>--------------------------
당일 코스

기청산식물원→죽도시장→포항운하

1박 2일 코스
첫째 날 : 내연산계곡→기청산식물원→사방기념공원→죽도시장→영일대해수욕장(숙박)
둘째 날 : 포항운하→구룡포→근대문화역사거리→구룡포시장

관련 웹사이트
· 포항시 문화관광 http://phtour.ipohang.org
· 기청산식물원 www.key-chungsan.co.kr
· 포항운하 http://innerharbor.ipohang.org

문의 전화
· 포항시청 국제협력관광과 054-270-2373
· 기청산식물원 054-232-4129
· 사방기념공원 054-270-5884
· 포항운하 주중 054-270-5177, 주말 054-270-5173
· 구룡포 근대역사관 054-276-9605

대중교통
기차> 서울역-포항역 :
KTX 하루 8~10회(05:15~22:10) 운행, 약 2시간30분 소요.
* 문의 : 레츠코레일 1544-7788, www.letskorail.com
버스> 서울-포항 :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하루 22회(07:00~24:00) 운행, 약 4시간30분 소요.
* 문의 : 동서울종합터미널 1688-5979, www.ti21.co.kr

자가운전
· 서울 출발 : 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익산포항고속도로→대련 IC→동해대로→보경로→보경사(내연산계곡 입구)
· 부산 출발 : 경부고속도로→경주 IC→서라벌대로→동해대로→보경로→보경사(내연산계곡 입구)
· 대구 출발 : 경부고속도로→익산포항고속도로→대련 IC→동해대로→보경로→보경사(내연산계곡 입구)

숙박
· 베니키아호텔 포항 : 남구 중앙로, 054-282-2700, www.benikeapohang.com
· 영일대호텔 : 남구 행복길, 054-221-9452, www.yeongildae.co.kr
· 씨캐슬펜션 : 북구 청하면 해안로2000번길, 054-261-1600, www.seacastlepension.com
· 네이처풀빌라 : 북구 청하면 해안로, 010-6700-1200, www.naturepoolvilla.com
· 갤럭시관광호텔 : 북구 해안로, 054-251-9988, www.galaxyhotel.kr

식당
· 운하회대게식당 : 물회, 북구 죽도시장길, 054-246-5656
· 유화초전복죽 : 전복죽, 북구 죽도시장2길, 054-247-8243
· 제일국수공장 : 국수, 남구 구룡포읍 호미로221번길, 054-276-2432
· 후루사토야 : 호지차, 남구 구룡포읍 호미로, 054-276-9461
· 할매국수 : 멸치국수,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길, 054-284-2213
· 철규분식 : 찐빵,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길, 054-276-3215
· 까꾸네 모리국수 : 모리국수, 남구 구룡포읍 호미로, 054-276-2298

주변 볼거리
호미곶, 오어사, 칠포해수욕장, 포항함, 일월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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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