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어깨 무거운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신임 원내대표

문재인과 궁합은…찰떡? 물과 기름?

[일요시사 취재 1팀] 박창민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의 신임 원내대표로 이종걸(경기 안양 만안) 의원이 선출됐다. 이 원내대표는 당내에서 비주류·중도 성향으로 분류되는 4선 의원이다. 지난해 두 차례 원내대표 선거 탈락의 아픔을 딛고 삼수 끝에 제1야당의 원내 사령탑에 올랐다.
           
 
 
1957년 5월22일 이종걸 원내대표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선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이 원내대표는 서울 덕수초등학교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다 안양으로 이사했다. 안양시 만안에 있는 만안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1970년 이 원내대표는 만안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민변 변호사 활동
99년 정치 입문
 
이 원내대표는 경기중학교 진학을 목표로 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중학교 입시가 무시험 전형으로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는 환경이 좋다는 이유로 서울의 예술전문학교인 예원학교 피아노과에 지원 입학시켰다. 중학생 시절 그는 안양에서 서울까지 완행열차 정기권으로 통학했다.  
 
이 원내대표는 예원학교 피아노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예원학교 3학년 무렵부터 예술 전공이 자신의 가야 할 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경기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그의 핏속에 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원내대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유신 독재에 반대하며 친구들과 ‘귀 있는 자 들어라’라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학교 교내 전관에 뿌리는 일에 가담했다. 평소 온화한 성격으로 알았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한편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 원내대표는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싶어 이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수학적 재능이 없음을 느끼고 문과로 전과한다. 1976년 2월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77년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성균관대 진학 이후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종로 경찰서의 학생담당 정보과 형사의 주요 시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독립운동 자금을 부치기 위해 마련한 하숙집에 할아버지의 동지가 찾아왔다가 가면 여지없이 종로경찰서 고등계형사가 와서 괴롭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라며 이 원내대표가 형사들의 감시를 받는 것에 대해 슬퍼했다. 그러면서 그의 아버지는 이 원내대표의 행동이 경솔하지 않도록 조심시키면서도 그의 학생운동에 대해 ‘그만두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이 원내대표는 대학교에 다니며 아카데미 운동을 했다. 서울 마포지역의 노동자 야학운동에 참여했다. 야학 은강학교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학변자(운동학생들이 시위하다 잡히면 바로 군대로 끌려가는 것)로 군에 징집되어 입대했다. 
 
삼수 끝에 당선 1야당 사령탑 접수
당내 비주류·중도 성향…4선 의원
 
이 원내대표는 양평에서 3년 남짓 복무하고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그는 복학 후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중퇴했다. 이후 1983년 서울대학교 인문 2계열에 다시 입학했다. 1987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후 다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에 학사편입한다. 서울대학교 공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범 시험을 2년간 준비한 끝에 1988년 제30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1989년 졸업 이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이 원내대표는 사법연수원 2년 차 때부터 변호사 운동을 준비했다. 그 무렵 당시 시민운동가였던 박원순 변호사를 만난다. 그는 잠시 박 변호사와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참여연대’ 설립 기초를 마련했다. 이 원내대표는 참여연대 기초 사항을 작성했다. 
 
1991년 그는 사법연수원을 마치자마자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에서 인권 변호사로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민변의 간사 변호사로 활동하며 전국연합 인권위원회 위원, 천주교 인권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인권 관련 사건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김영삼 정부 당시 노동악법 및 개악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를 시도할 때 안양에서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이를 계기로 모인 시민운동가들로 창립된 안양의 대표적인 시민운동단체인 ‘안양지역시민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서울대 민족활동가 사건, 천주교 기독교 애청사건, 시노맹사건 등 많은 시국 사건을 도맡아 승소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동티모르 인권침해반대투쟁, 간첩조작사건의 재심사건, 양심수석방을 위한 위원회 활동 등 인권운동도 전개했다. 
 
무계파로 분류
투사 이미지도 
 
노동분야의 활동에서도 노동조합의 법률자문을 역임하며 사업자와 임금협상 등 단체교섭 시에 발생하는 노동법률문제를 자문했다. 수많은 해고 무효확인 소송, 임금 소송 등 노동관계 소송을 맡았다. 
 
이 원내대표는 한국 사회 여성의 권리 신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의 초안을 마련해 입법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사건을 담당하여 승소했다. 그 공로로 1998년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그는 법제정 분야에서도 성폭력특별법 제정 및 가정폭력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에서 여성인권운동의 일환으로 초안도 작성했다. 이 때문에 1999년 <여성신문사>가 선정한 ‘여성인권에 가장 기여한 남성 10인’에 선정됐다. 
 
 
1999년 11월 새천년민주당은 이 원내대표를 변호사 20인 중 한 명으로 영입한다. 이듬해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했다. 
 
2000년 4월 이 원내대표는 제16대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 안양 만안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활동한다. 이때 그는 노무현 후보 비서실 차장이 됐다. 선거 직전인 12월에는 수행실장 역까지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2004년 4월 제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안양 만안구)에 출마해 재선의원이 됐다. 그는 이후 같은 지역구에서 내리 4선에 성공한다. 당선 후 열린우리당 원내 수석부대표로 선출됐다. 이 원내대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 집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대중에게 인지도를 늘렸다.
 

이 원내 대표는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에 재선되고 국회 문화체육관광통신위원회 위원,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을 맞으며 종횡무진 했다. 그해 12월 민주당 내 소장파 모임인 민주연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9년 4월 이 원내대표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포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신문사 이름과 최고경영자 실명을 거론해 소송에 휩싸이기도 했다. 당시 이 원내대표는 “장자연 문건에 따르면 당시 XX일보 X사장을 모셨고, 그 후로 스포츠XX X 사장을 모셨다고 했다. 보고받았나”라고 질문했다. 이 때문에 해당 신문사는 이 원내대표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결국 철회하면서 사실상 이 원내대표의 승리로 끝났다. 
 
2010년 경기도지사에 예비후보로 입후보했으나 당내 여론에 따라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양보했다. 2012년 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 체제가 들어선 6.9전당대회에서 5등 최고위원으로 지도부에 입성했다. 하지만 대선 한달 앞둔 그해 11월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인적 쇄신 취지로 이해찬 대표 등과 함께 지도부에서 사퇴했다. 
 
이후 김한길 대표 체제에서는 당 정치혁신실행위원장을 맡아 국회의원 지위 남용 금지를 골자로 한 정치혁신의 로드맵을 그렸다. 최근에는 ‘클린 종걸’을 자처하며 야당 의원들에 대한 사정기관 수사의 대응책을 마련하는 야당탄압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5월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특별위원장, 올해 2월 박상옥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특별위원장을 잇따라 맡았다.
 
지난 7일 새정치민주연합의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 원내대표가 당선됐다. 그는 이날 오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표 경선에서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127표 가운데 66표를 얻었다. 61표를 얻은 최재성 의원을 8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앞서 1차 투표(128표 참석)에서 이 원내대표 28표, 최 의원은 33표를 각각 얻었다. 하지만 재적 과반(66명) 득표자가 없어 두 사람을 상대로 경선투표가 실시됐다. 역전은 없었다.
 
정치혁신 로드맵
‘클린종걸’ 자처
 
4·29 재보선에서의 참패와 그로 인한 계파 갈등의 위기를 극복하고 1년도 채 남지 않은 내년 총선에서의 승리를 가져올 적임자로 당심은 이 원내대표를 택한 것이다. 그는 당선 소감에서 “원내대표 3수 끝에 영광을 주셔서 그 힘으로 해나가겠다”며 “새정치민주연합의 어렵고 참담한 상황을 여유 있게 힘 있게 풀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선거에 패배하고 무시당하고 소수당의 참담한 심정을 더 신중하게 풀어나가겠다”며 “서로 나누고 소통해서 어려운 난국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원내대표 당선으로 대여 관계가 심각한 대척 구도로 기울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다. 
 
 
그동안 현안에 따라 강경 성향이 도드라지는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원내대표는 선수가 늘어가면서 의회주의자 면모 역시 강하게 드러내고 있어서다. 이날 당선 뒤 첫 기자간담회에서 이 원내대표는 "공적연금의 강화를 먼저 처리하겠다"면서도 "국민의 불편이 없도록 지난 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해야 했던 민생 입법들을 이달 중에 처리하도록 합의하는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이 원내대표는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위원장을 맡았다. 당내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청문회 개최를 이끌어냈다. 
 
독립운동 할아버지 영향
독재정권 학생운동 주도
 
이 원내대표는 정계 입문 초기에는 당시 다수파였던 DY(정동영)계로 분류됐다. 하지만 18대 국회 이후로는 사실상 계파가 없는 ‘중도파’로 분류된다. 그는 19대 국회에 들어서는 김한길계로 분류되고 있다. 중도 온건 성향 의원 모임은 ‘민주당의 집권을 위한 모임’ 소속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 원내대표에게는 투사의 이미지가 서려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적인 행보로 이 원내대표를 강경 이미지로 기억하는 여당 의원들이 적지 않다. 
 
실제 5명의 원내대표 후보 중에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가장 괴롭힌 의원 중 한사람이다.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이 원내대표가 되레 까다로운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당내에서 이 원내대표가 ‘럭비공 리더십’ ‘비노 강경파’로 불리는 이유기도 하다. 
 
제16대 총선 때 출마해 여의도에 입성한 이 원내대표는 당시 당내 ‘대여 공격수’로 이름을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8년 국정감사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 비판하던 과정 유인촌 문화부 장관 등을 ‘졸개’로 비하했다가 논란을 일으켰다. 또 2012년 때는 트위터에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그년’으로 표현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원내대표 경선 투표를 앞둔 정견발표에서 "투쟁과 화합만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서 "대여 투쟁의 선봉이 되겠다"고 다짐한 것도 여야 관계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당선 뒤에도 향후 공무원연금개혁 법안 무산에 대해 여당에 책임을 물으며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라 생각한다. 야당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국민을 짓밟았다”고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이어 “새누리당이 스스로 파기한 약속 불이행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순 없다고 생각한다”고도 경고했다.
 
약자 위해 뛰었다
국민들 위해 뛴다
 
이번 대여 관계가 어떻게 형성될지는 공무원연금개혁의 향후 처리 과정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권은 “당장 여야가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지는 않겠지만 우윤근 원내대표 시절보다는 갈등과 대결 구도가 더욱 부각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원내대표도 협상만으로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 원내대표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향후 여야 관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 이종걸은?
 
▲서울 종로(1957년생) 
▲경기고, 서울대 법대 
▲사법시험 30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기획간사 
▲노무현 대통령 후보 수행실장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18대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새정치민주연합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 위원장 
▲경기 안양 만안구 4선 국회의원(16∼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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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