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당당한 개선장군 천정배

혈혈단신 야권 재편 선봉서나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기나긴 야인생활 끝에 국회의원 천정배가 다시 여의도로 돌아왔다. 무소속으로 보궐선거에 나섰던 그는 제1야당의 성지이자 텃밭인 광주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다. 천 의원이 내세운 ‘호남정치 복원론’의 발판이 마련됐다. 호남신당 창당도 공언했다. 그는 단숨에 내년 총선 돌풍의 핵으로 부상했다.      

 
천정배 의원은 1954년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모 슬하에서 암태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목포중학교로 진학하며 가족이 있는 목포로 왔다. 천 의원은 중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재학 중에 전라남도 학술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공부에 소질을 보였다. 중학교 졸업 후 목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천 의원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 한 번도 학급 반장을 맡아본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천 의원은 1972년 목포고등학교를 전체수석으로 졸업하고 그해 대학예비고사에서 인문계 전국수석을 차지한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며 ‘목포 3대 천재’로 불렸다. 
 
법관 임용 거부
변호사로 시작해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학년 재학 중에 사법시험 1차 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2차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다시 3학년 때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1976년 졸업과 동시에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8년 천 의원은 사법연수원을 3등으로 수료한다. 주변에서는 우수한 그가 판사나 검사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천 의원은 수원에 있는 전투비행단에서 공군 법무관으로 복무한다. 그러던 중 1980년 전두환정권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그는 당시 정권에서 법관 임용을 거부하고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다.  
 
DJ와 함께 '목포 3대 천재'
인권변호사로 활발한 활동
 
이후 1981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입사했다. 4년간 외환무역 조세관련 국제변호사로 활동한다. 1985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나와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남대문합동볍률사무소를 열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자처했다. 이후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국제인권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맡았던 주요 사건은 ‘구로구청 부정 투표함 사건’ ‘임수경·문익환·리영희 방북사건’ ‘정태춘 음반 사전검열 사건’ 등을 맡았다. 특히 가수 정태춘 사건에서 천 의원은 헌법재판소로부터 ‘음반 사전심의제’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1994년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으로 유명한 경상대학교 교양교재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변론을 맡아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DJ 권유 정치 입문
참여정부 법무부장관
 
1993년 그는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법무법인 해마루를 창립한다. 1995년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경기 안산을(경기 안산시 단원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다시 안산을에 출마해 재선이 됐다. 그해 민주당 수석원내부총무를 지냈다. 그는 자유민주연합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을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추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2002년 천 의원은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현역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노 전 대통령을 지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2003년 그는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했다. 소위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이라 불리는 당내 강경세력으로 지칭됐다. 민주당의 분당과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한 장본인이 천 의원이다. 이듬해 2004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냈지만 그해 말 4대 쟁점법안 처리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도 사퇴했다.
 
2005년 6월 천 의원은 법무부장관에 임명된다. 10월에는 강정구 동국대학교 교수의 한국전쟁 관련 발언에 관해 검찰 수사지휘권을 발동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검찰총장의 사퇴를 불러오게 된다. 하지만 그는 국회의원 시절 법무부장관의 검찰 지휘권을 삭제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을 제안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소신을 바꿨다는 비판이 있었다. 
 
정치철새 오명
긴 인고의 세월
 
그는 2007년 1월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해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예비경선에서 탈락한 그는 문국현 전 의원과 함께 정책연대를 구상하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 의원으로 경기 안산시 단원구갑에 출마해 당선된다. 이로써 4선 국회의원이 됐다. 동시에 안산시 최초로 4선 의원의 영광을 안았다. 그는 18대 국회에서 이명박정부를 상대로 언론자유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민주당의 MB언론악법저지와 언론자유수호특별위원장, 언론장악저지대책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으로서 활동했다. 
 
천 의원은 2009년 18대 국회에서 미디어법이 강행 처리되자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다. 이후 그는 원외투쟁에 주력했다. 이듬해 2010년 소속 상임위인 문화체육관광통신위원회 첫 회의에 참석해 유감을 표시하고 공식 복귀를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은 천 의원의 복귀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2010년 10월 민주당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서 총 득표수 5598표, 득표율 10.05%로 5위에 오르며 최고위원으로 뽑혔다. 12월 그는 수원역 앞에서 열린 ‘이명박 독재심판 경기지역 결의 대회’에서 “이명박정부를 소탕해야지 않겠나. 끌어내리자”며 “헛소리하며 국민을 실망시키는 이명박정권을 확 죽여 버려야 하지 않겠나”며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당시 청와대는 “그런 발언을 했다면 패륜아”라고 반박했다. 이어 한 시민은 그를 국가내란죄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해 검찰은 내란죄 혐의로 천 의원을 수사했다.
 
3년 만에 여의도무대 복귀
제1야당 텃밭 아성 무너뜨려
 
2011년 8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사퇴하자 천 의원은 후임 서울시장 자리에 도전했다. 곧바로 그는 민주당에서 제일 먼저 서울시장 보선 출마를 선언했다. 천 의원은 오 전 시장의 사퇴로 10월26일 재보선이 치러지는 것으로 확정되면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자신의 국회의원 지역구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주소지를 서울시장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서울 관악구로 옮겼다. 하지만 9월 치러진 민주당 경선에서 박영선 의원에게 패해 서울시장선거에 나가지 못하게 됐다. 
 
 

2012년 천 의원은 민주통합당 간판으로 서울 송파을 선거에 나섰다. 서울 송파을은 새누리당의 텃밭이다. 그는 46%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석패했다. 
 
이후 천 의원은 호남에서 재기를 노렸다. 2013년 광주에 법무법인 해마루를 열었다. 그는 호남 곳곳을 누비며 호남정치 부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난해 7·30 광주 광산을 보궐선거 때 출사표를 내면서 “경선까지 불사하겠다”며 승부수를 띄웠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권은희 의원을 전략공천해 출마를 접어야 했던 아픔을 겪기도 했다. 
 
“호남정치 복원” 역설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
 
지난 3월16일 천 의원은 4·29재보선을 앞두고 새정치연합 탈당을 선언했다. 당시 야권에서는 “탈당에 명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국민모임의 정동영 전 의원은 천 의원에게 함께하자며 여러 차례 제안했다. 하지만 천 의원은 “호남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민모임 합류 대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천 의원은 이번 재보선에서 52.37%를 얻어 새정치연합 조영택 후보(29.80%)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승리를 확정 지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줄곧 호남정치 복원론과 호남 대권주자 육성을 역설해왔던 그는 “당선되면 다음 총선에 신당을 만들어 광주지역에 공천을 모두 하겠다”며 “새로운 DJ를 길러내겠다”고 공약했다. 안팎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강력한 대권주자를 가져본 적 없는 호남민심을 자극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또 그의 당선에는 옛 통합진보당 지지자들의 표심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옛 진보당 후보로 나선 조남일 전 후보가 “광주 기득권정치 타파를 위해 대승적으로 천정배 후보에게 힘을 모아주자”는 시민사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퇴하면서 무소속인 천 의원에게 표가 모인 것이다.
 
천 의원의 당선으로 호남 대망론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천 의원의 승리를 놓고 새정치연합 안팎에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호남발 야권 개편의 신호탄이 오른 것 아니겠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갈 곳 없는 정동영 '어쩌나?'
명분·실리 다 잃어버린 거물 
 
정동영 전 의원이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탈당까지 하며 배수의 진을 쳤지만 돌파구를 차지 못했다. 그는 지난 3월 ‘4·29 재보선 서울 관악을에 출마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정치생명을 건 모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결국 무릎을 꿇었다. 이에 더해 야권 분열 책임론까지 감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 전 의원의 성적표는 20.1%의 득표율로 3위. 대선후보까지 지낸 거물급 정치인으로서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 그가 공언했던 제1야당 심판은 이루지도 못했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에 의석을 내주는데 일조한 셈이 됐다. 정 전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정태호 후보의 득표율을 합치면 54%로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의 득표율(43.89%)을 훌쩍 넘는다.
 
정 전 의원은 지난달 29일 패배가 확정된 뒤 “패배했지만 꿈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국민모임의 꿈은 앞으로도 계속 전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도전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단순히 원내 진입 실패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시생명에도 상당한 타격을 안겨 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각에서는 정 전 의원이 선거에서 호남출신 유권자들이나 진보진영 유권자들의 지지세를 일정 부분 확인한 만큼, 내년 총선에서 정치적 고향인 전주·덕진 지역 등에 도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정 전 의원은 1953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했다. MBC <뉴스데스크> 주말앵커 출신인 그는 서울대 동기인 이해찬 전 총리의 권유로 1996년 정계에 입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15대 총선에 출마한 그는 전주 덕진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6대 총선에서도 전국 최다득표를 획득하며 재선에 성공,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배수진 쳤지만 3위로 패배
“야권 분열 원흉” 질타 이어져
 
국민회의 시절 당대변인과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며 당시 권력 2인자였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을 겨냥 ‘정풍운동’을 벌이면서 깨끗한 이미지의 차세대 주자로 떠올랐다. 2002년 당 대선후보경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맞붙어 패배했지만 경선을 완주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04년 신기남·천정배 의원 등과 함께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으나 17대 총선을 앞두고 ‘노인 폄훼 발언 파문’으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17대 총선 비례대표후보까지 사퇴하며 물러난 그는 같은 해 참여정부 통일부장관으로 재기했다. 2006년엔 당의장으로 여의도 정가에 복귀했으나 그해 지방선거에서는 패배했다.

지난 17대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에 선정됐지만 역대 최대표 차이로 낙선했다. 18대 총선에서도 고배를 마시자 지난해 7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2009년 4월 재보선 출마 선언을 하며 귀국했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공천 배제를 결정하자 탈당했다. 그후 전북 전주 덕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0년 2월10일 민주당에 복당했으며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의 고문으로 활동하다 탈당했다. 이후 국민모임에 합류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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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