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당당한 개선장군 천정배

혈혈단신 야권 재편 선봉서나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기나긴 야인생활 끝에 국회의원 천정배가 다시 여의도로 돌아왔다. 무소속으로 보궐선거에 나섰던 그는 제1야당의 성지이자 텃밭인 광주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다. 천 의원이 내세운 ‘호남정치 복원론’의 발판이 마련됐다. 호남신당 창당도 공언했다. 그는 단숨에 내년 총선 돌풍의 핵으로 부상했다.      

 
천정배 의원은 1954년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모 슬하에서 암태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목포중학교로 진학하며 가족이 있는 목포로 왔다. 천 의원은 중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재학 중에 전라남도 학술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공부에 소질을 보였다. 중학교 졸업 후 목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천 의원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 한 번도 학급 반장을 맡아본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천 의원은 1972년 목포고등학교를 전체수석으로 졸업하고 그해 대학예비고사에서 인문계 전국수석을 차지한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며 ‘목포 3대 천재’로 불렸다. 
 
법관 임용 거부
변호사로 시작해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학년 재학 중에 사법시험 1차 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2차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다시 3학년 때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1976년 졸업과 동시에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8년 천 의원은 사법연수원을 3등으로 수료한다. 주변에서는 우수한 그가 판사나 검사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천 의원은 수원에 있는 전투비행단에서 공군 법무관으로 복무한다. 그러던 중 1980년 전두환정권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그는 당시 정권에서 법관 임용을 거부하고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다.  
 
DJ와 함께 '목포 3대 천재'
인권변호사로 활발한 활동
 
이후 1981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입사했다. 4년간 외환무역 조세관련 국제변호사로 활동한다. 1985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나와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남대문합동볍률사무소를 열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자처했다. 이후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국제인권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맡았던 주요 사건은 ‘구로구청 부정 투표함 사건’ ‘임수경·문익환·리영희 방북사건’ ‘정태춘 음반 사전검열 사건’ 등을 맡았다. 특히 가수 정태춘 사건에서 천 의원은 헌법재판소로부터 ‘음반 사전심의제’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1994년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으로 유명한 경상대학교 교양교재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변론을 맡아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DJ 권유 정치 입문
참여정부 법무부장관
 
1993년 그는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법무법인 해마루를 창립한다. 1995년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경기 안산을(경기 안산시 단원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다시 안산을에 출마해 재선이 됐다. 그해 민주당 수석원내부총무를 지냈다. 그는 자유민주연합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을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추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2002년 천 의원은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현역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노 전 대통령을 지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2003년 그는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했다. 소위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이라 불리는 당내 강경세력으로 지칭됐다. 민주당의 분당과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한 장본인이 천 의원이다. 이듬해 2004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냈지만 그해 말 4대 쟁점법안 처리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도 사퇴했다.
 
2005년 6월 천 의원은 법무부장관에 임명된다. 10월에는 강정구 동국대학교 교수의 한국전쟁 관련 발언에 관해 검찰 수사지휘권을 발동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검찰총장의 사퇴를 불러오게 된다. 하지만 그는 국회의원 시절 법무부장관의 검찰 지휘권을 삭제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을 제안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소신을 바꿨다는 비판이 있었다. 
 
정치철새 오명
긴 인고의 세월
 
그는 2007년 1월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해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예비경선에서 탈락한 그는 문국현 전 의원과 함께 정책연대를 구상하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 의원으로 경기 안산시 단원구갑에 출마해 당선된다. 이로써 4선 국회의원이 됐다. 동시에 안산시 최초로 4선 의원의 영광을 안았다. 그는 18대 국회에서 이명박정부를 상대로 언론자유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민주당의 MB언론악법저지와 언론자유수호특별위원장, 언론장악저지대책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으로서 활동했다. 
 
천 의원은 2009년 18대 국회에서 미디어법이 강행 처리되자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다. 이후 그는 원외투쟁에 주력했다. 이듬해 2010년 소속 상임위인 문화체육관광통신위원회 첫 회의에 참석해 유감을 표시하고 공식 복귀를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은 천 의원의 복귀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2010년 10월 민주당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서 총 득표수 5598표, 득표율 10.05%로 5위에 오르며 최고위원으로 뽑혔다. 12월 그는 수원역 앞에서 열린 ‘이명박 독재심판 경기지역 결의 대회’에서 “이명박정부를 소탕해야지 않겠나. 끌어내리자”며 “헛소리하며 국민을 실망시키는 이명박정권을 확 죽여 버려야 하지 않겠나”며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당시 청와대는 “그런 발언을 했다면 패륜아”라고 반박했다. 이어 한 시민은 그를 국가내란죄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해 검찰은 내란죄 혐의로 천 의원을 수사했다.
 
3년 만에 여의도무대 복귀
제1야당 텃밭 아성 무너뜨려
 
2011년 8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사퇴하자 천 의원은 후임 서울시장 자리에 도전했다. 곧바로 그는 민주당에서 제일 먼저 서울시장 보선 출마를 선언했다. 천 의원은 오 전 시장의 사퇴로 10월26일 재보선이 치러지는 것으로 확정되면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자신의 국회의원 지역구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주소지를 서울시장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서울 관악구로 옮겼다. 하지만 9월 치러진 민주당 경선에서 박영선 의원에게 패해 서울시장선거에 나가지 못하게 됐다. 
 
 

2012년 천 의원은 민주통합당 간판으로 서울 송파을 선거에 나섰다. 서울 송파을은 새누리당의 텃밭이다. 그는 46%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석패했다. 
 
이후 천 의원은 호남에서 재기를 노렸다. 2013년 광주에 법무법인 해마루를 열었다. 그는 호남 곳곳을 누비며 호남정치 부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난해 7·30 광주 광산을 보궐선거 때 출사표를 내면서 “경선까지 불사하겠다”며 승부수를 띄웠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권은희 의원을 전략공천해 출마를 접어야 했던 아픔을 겪기도 했다. 
 
“호남정치 복원” 역설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
 
지난 3월16일 천 의원은 4·29재보선을 앞두고 새정치연합 탈당을 선언했다. 당시 야권에서는 “탈당에 명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국민모임의 정동영 전 의원은 천 의원에게 함께하자며 여러 차례 제안했다. 하지만 천 의원은 “호남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민모임 합류 대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천 의원은 이번 재보선에서 52.37%를 얻어 새정치연합 조영택 후보(29.80%)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승리를 확정 지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줄곧 호남정치 복원론과 호남 대권주자 육성을 역설해왔던 그는 “당선되면 다음 총선에 신당을 만들어 광주지역에 공천을 모두 하겠다”며 “새로운 DJ를 길러내겠다”고 공약했다. 안팎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강력한 대권주자를 가져본 적 없는 호남민심을 자극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또 그의 당선에는 옛 통합진보당 지지자들의 표심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옛 진보당 후보로 나선 조남일 전 후보가 “광주 기득권정치 타파를 위해 대승적으로 천정배 후보에게 힘을 모아주자”는 시민사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퇴하면서 무소속인 천 의원에게 표가 모인 것이다.
 
천 의원의 당선으로 호남 대망론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천 의원의 승리를 놓고 새정치연합 안팎에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호남발 야권 개편의 신호탄이 오른 것 아니겠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갈 곳 없는 정동영 '어쩌나?'
명분·실리 다 잃어버린 거물 
 
정동영 전 의원이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탈당까지 하며 배수의 진을 쳤지만 돌파구를 차지 못했다. 그는 지난 3월 ‘4·29 재보선 서울 관악을에 출마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정치생명을 건 모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결국 무릎을 꿇었다. 이에 더해 야권 분열 책임론까지 감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 전 의원의 성적표는 20.1%의 득표율로 3위. 대선후보까지 지낸 거물급 정치인으로서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 그가 공언했던 제1야당 심판은 이루지도 못했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에 의석을 내주는데 일조한 셈이 됐다. 정 전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정태호 후보의 득표율을 합치면 54%로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의 득표율(43.89%)을 훌쩍 넘는다.
 
정 전 의원은 지난달 29일 패배가 확정된 뒤 “패배했지만 꿈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국민모임의 꿈은 앞으로도 계속 전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도전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단순히 원내 진입 실패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시생명에도 상당한 타격을 안겨 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각에서는 정 전 의원이 선거에서 호남출신 유권자들이나 진보진영 유권자들의 지지세를 일정 부분 확인한 만큼, 내년 총선에서 정치적 고향인 전주·덕진 지역 등에 도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정 전 의원은 1953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했다. MBC <뉴스데스크> 주말앵커 출신인 그는 서울대 동기인 이해찬 전 총리의 권유로 1996년 정계에 입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15대 총선에 출마한 그는 전주 덕진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6대 총선에서도 전국 최다득표를 획득하며 재선에 성공,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배수진 쳤지만 3위로 패배
“야권 분열 원흉” 질타 이어져
 
국민회의 시절 당대변인과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며 당시 권력 2인자였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을 겨냥 ‘정풍운동’을 벌이면서 깨끗한 이미지의 차세대 주자로 떠올랐다. 2002년 당 대선후보경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맞붙어 패배했지만 경선을 완주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04년 신기남·천정배 의원 등과 함께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으나 17대 총선을 앞두고 ‘노인 폄훼 발언 파문’으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17대 총선 비례대표후보까지 사퇴하며 물러난 그는 같은 해 참여정부 통일부장관으로 재기했다. 2006년엔 당의장으로 여의도 정가에 복귀했으나 그해 지방선거에서는 패배했다.

지난 17대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에 선정됐지만 역대 최대표 차이로 낙선했다. 18대 총선에서도 고배를 마시자 지난해 7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2009년 4월 재보선 출마 선언을 하며 귀국했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공천 배제를 결정하자 탈당했다. 그후 전북 전주 덕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0년 2월10일 민주당에 복당했으며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의 고문으로 활동하다 탈당했다. 이후 국민모임에 합류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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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