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이완구 ‘63일 천하’ 풀스토리

빈대 한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웠다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63일 천하’로 끝났다. 이완구 전 총리가 결국 사임했다. 총리 임명 과정 그는 언론 외압 의혹이 불거지면서 갖은 비난을 듣고 있었다. 이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의 손짓으로 어렵게 총리가 됐다. 그는 총리가 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되면서 칼이 자신에게 돌아왔다. 이 전 총리는 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중 가장 빨리 단명한 총리라는 오명도 뒤집어쓰게 됐다. 

 
이완구 전 총리는 1950년생으로 충청남도 청양 출신이다. 1966년 대전중학교를, 1970년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1974년 행정고시를 합격한 후 홍성군청 및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맡아 공직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1981년부터 경찰직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때 31세의 나이로 최연소 홍성경찰서 서장을 역임한다. 뿐만 아니라 40대 초반 최연소 충북·충남지방경찰청장을 역임하며 각종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대통령 지지로
총대 메고 앞장
 
그의 본격적인 정치 인생은 1995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충남 청양 홍성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96년 그해 15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이 전 총리는 충남지역에 출마했다.  
 

한때 이 전 총리는 ‘철새 정치인’이란 오명을 들었다. 충남지역에서 신한국당 의원으로 당선된 후 그는 1997년 김종필 전 총리가 있는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겨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역임한다. 그 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하나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한다. 이후 한나라당으로 이적한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 자금을 받아왔을까. 곧 ‘2억원 이적료 파문’이 불거졌다. 당시 이 전 총리가 2002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지원금 명목으로 2억원의 불법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에서 시작된다. 의혹이 확산되자 17대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한다. 그는 2억원의 불법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지만 2007년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 UCLA대학 교환교수로 활동한다.
 
국내로 돌아온 이 전 총리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충남도지사에 당선된다. 그는 3년 뒤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며 단식투쟁을 벌인다. 그는 세종시 원안 통과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지사직을 사퇴한다. 당시 자신과 뜻을 함께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교류를 한다. 정치권에서는 이 배경으로 이 전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총리직으로 부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하곤 한다.  
 
도지사직을 사퇴한 이 전 총리는 2009년 다발성골수종이라는 혈액암으로 투병생활을 했다. 2013년 그는 암을 이겨내고 부여·청양 재보궐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복귀한다. 당시 이 전 총리는 JP(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에 이은 충청권의 대표 주자라는 위상을 얻는다. 
 
2014년 5월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선출된다. 이 전 총리는 15·16·19대에 당선된 3선 국회의원이며 충남지사는 물론 도지사를 역임해 ‘충청권의 맹주’로 불리며 충청권 출신으로 첫 원내대표가 됐다. 
 
어렵게 청문회 통과…의욕적으로 집무
부정부패 척결 공직사회 개혁 선봉장
 

이 전 총리가 원내대표가 된 후 최전선에서 세월호특별법 제정 등의 여야 협상을 했다. 당시 국회에서는 이 전 총리가 산적한 현안들을 무난히 처리했다고 평가한다. 이어 올해 1월23일 박 대통령은 이 전 총리를 국무총리직에 내정했다. 당시 그가 국무총리직에 내정됐을 때 많은 이들은 무난하게 해낼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의 잔혹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전 총리는 지난 1월 ‘비선 실세 국정 농단 의혹’으로 위기에 처한 박근혜 정부의 구원 투수로 등장했다. 원활한 원내대표직 수행으로 여당은 물론 야당의 기대감도 높았다. 하지만 이 전 총리는 인사청문회에서부터 그의 치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각종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았다. 이 전 총리의 장인·장모, 처남 등은 2001년 경기 성남 대장동 일대의 땅을 샀다. 장인·장모가 구입한 땅은 2002년 이 전 총리의 부인에게 2011년에는 다시 이 전 총리의 차남에게 증여됐다. 이후 땅 값이 크게 올랐다.
 
야당은 “이완구 의원이 당시 재경위에서 활동했던 경제통이었다는 점에서 고위공직자로서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대리인을 내세워 땅 투기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아파트 투기 의혹도 제기됐다. 그는 서울 강남 도곡동 소재 주상복합 아파트인 타워팰리스 매매 과정에서 시세 차익 신고를 누락했고, 장인의 경기도 분당 땅 매입 당시에도 이 전 총리가 관여한 의혹이 제기됐다. 
 
까도 까도…
‘양파 총리’
 
병역면제 의혹도 나왔다. 그는 3차례의 징병 신체검사를 거쳐 1년짜리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 이 전 총리는 ‘부주상골’을 사유로 보충역 소집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병무청 기록에 따르면 이 전 총리는 애초 설명과 달리 첫 신체검사에서 1급 현역 판정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홍성군청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1975년 6월 현역으로 육군에 입영한 것도 알려졌다. 그러나 입영 뒤 재검 대상으로 분류돼 귀향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이 전 총리는 입대를 하면서 홍성군청에 휴직 신청도 하지 않았다. 야당은 이에 대해 “마치 자신이 입대 뒤 돌아올 것을 예견이나 한 것인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 그는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이하 국보위)에서 근무했다. 당시 국보위는 ‘불량배 소탕계획’을 입안해 계엄사령부가 약 4만여명을 삼청교육대에 수용하면서,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전 총리는 이에 대해 “국보위 자체가 국민들에게 많은 걱정을 끼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좀 봐야한다”고 말했다.
 
 
이런 수많은 의혹으로 이 전 총리를 두고 ‘의혹 종합 세트’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는 이 의혹들을 언론사 외압 발언으로 정점을 찍었다.
 
인사청문회 과정 언론을 통해 이 전 총리가 부동산 투기 의혹과 관련된 보도를 막기 위해 언론사에 외압을 가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전 총리는 당시 “야 우선 저 패널부터 막아. 빨리 시간 없어”라며 “(일부 언론사 간부가) ‘지금 메모 즉시 넣었다’고 하더라. 내가 보니까 빼더라”라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언론사 간부들과 친분을 통해 자신의 의혹과 관련된 내용이 방송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또한 그는 “윗사람들하고 다 내가 말은 안 꺼냈지만 다 관계가 있어요, 어이 이 국장, 걔 안돼, 해 안 해? 야 김 부장, 걔 안돼, 지가 죽는 것도 몰라요, 어떻게 죽는지 몰라”라고 말했다.  
 
인사청문회 과정 여야는 이 전 총리의 언론 외압 논란을 빚은 녹음파일 공개 여부로 인사청문회가 두 차례 정회하는 등 파행까지 했다. 여당은 이 전 총리에게 녹취록의 일부인 “‘언론인들 내가 대학총장도 만들어주고 교수도 만들어줬다’라고 말한 기억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이 전 총리는 “전혀 그런 말한 적 없다”고 부인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확인을 위해 틀어주면 좋겠다”고 까지 말했다. 
 

결국 여당 의원들은 그날 오후 녹음파일을 일부 공개했다. 이 녹음파일에는 이 전 총리가 언론사 간부에게 외압을 가해 보도를 막았다는 내용를 포함해 “(기자를) 교수도 만들어 주고, 총장도 만들어 주고…” 라는 문제성 발언 등이 들어 있었다. 
 
이 전 총리는 “다급한 마음에 말한 것이므로 용서해 달라”며 “편안한 마음으로 반어법으로 얘기한 것이다. 이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고 뒤늦게 말한 사실을 시인했다. 이어 “녹음파일 보도 이후 수일째 수면을 취하지 못한 상태여서 정신이 혼미하고 기억이 정확하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 전 총리는 인사청문회 파행 이후 회의장에 입장하다가 비틀거렸고, 자리에 앉아 컵에 물을 따를 때 손을 떨기도 했다. 
 
의혹 종합세트 
거짓말로 자멸 
 
이 전 총리는 “편한 자리에서 한 발언이나 공직 후보자로서 경솔했을 뿐 아니라, 국민 여러분께 불편함을 드린데 대해 죄송하다”며 “대오각성하는 마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보다 더 진중한 몸가짐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겠다.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정중히 구하고자 한다”고 사과했다.
 
지난 1월23일 그는 청문회 과정에서 도덕적 치명상을 입었지만 제43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취임장을 손에 쥐자마자 ‘책임총리’를 공언했다. 이 전 총리가 국무총리 지명 직후 국회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대통령께 쓴소리와 직언을 하는 총리가 되겠다”며 무너진 공직기강을 바로잡고 국민·야당과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무너진 공직기강을 철저하게 점검해 대비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라고 덧붙였다. 
 

이어 지난 3월12일 이 전 총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부정부패를 발본색원 하겠다”며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박고 있는 고질적인 적폐와 비리를 조사하겠다”며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반전을 시도했다.
 
“믿고 밀어준 국민들이 바보”
역대 가장 단명한 총리 굴욕
 
그는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공직사회 개혁의 선봉장으로 나서며 한달만에 ‘개혁 총리’라는 이미지로 순항했다. 특히 ‘MB 자원외교’도 예외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여론의 긍정적인 반응도 이끌었다. 공직 사회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여야 할 것 없이 그의 국정운영에 거는 기대가 컸다. 남다른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부처 간 업무 조정 능력을 발휘해 박근혜정부 집권 3년 차의 성과를 도출해 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부패척결 대상 가운데 하나로 지목돼 해외자원개발사업 관련 비리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아오던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죽기 전 남긴 메모에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며 부정부패의 당사자로 낙인찍히기 시작했다.
 
성 회장이 남긴 메모에는 허태열·김기춘 등 친박 핵심 인물들에게 건네진 돈의 액수와 이 전 총리의 이름 등이 적혀 있었다. 금품수수 의혹이 일자 이 전 총리는 “성 회장을 알기는 하지만 친한 사이가 아니다”며 “돈을 받았다는 증거가 나오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성 회장이 이 전 총리에게 “2013년 4월4일 오후 4시30분 이완구 선거사무소를 방문해 3000만원을 비타500 박스에 담아 현금으로 주고 왔다”는 구체적인 폭로와 추가 증언이 곧이어 터져 나오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그는 이어 곧바로 ‘목숨을 내놓겠다’고 한 본인의 발언에 대해 “인간의 양심과 신앙에 따라 격정적으로 말을 하다가 나온 말로 송구하다”고 밝혔다.  
 
이 전 총리는 처음에는 성 회장과 친한 사이도 아니며 일면식도 없다고 밝혔지만 1년간 200회가 넘는 통화를 한 사실까지 확인되는 등 이 전 총리의 기존 발언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지난 1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김영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이 전 총리에게 ‘거짓말 답변’ 논란에 대해 추궁했다. 이 전 총리는 “거짓말한 적 없다. 표현상의 차이나 기억의 착오는 있을지 모르지만 큰 틀 속에서 줄기가 변한 것이 없다”고 답했다. 일관된 거짓해명으로 논란은 더해져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특히, 그가 현직 총리 신분으로 검찰수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야당에선 총리 신분으로 수사를 받는 것은 무리라며 총리 해임건의안을 추진했다, 여당 내부에서도 여론을 인식한 듯 사퇴 불가피론이 확산되는 등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하지만 이 전 총리는 "의혹만으론 물러날 수 없다"며 버텼다. 그러나 지난 16일 박 대통령이 중남미 4개국 순방에 앞서 가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회동에서 사실상 자진사퇴를 권고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면서 이 전 총리가 큰 압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전 총리를 둘러싼 의혹이 갈수록 증폭되며 여론이 악화되자, 여권 핵심 지도부는 20일 비공개회의에서 이 전 총리 거취 문제를 박 대통령 귀국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데 공감하기에 이르렀다. 
 
대대적 사정
부메랑으로
 
이 전 총리는 지난 20일 늦은 밤 박 대통령에게 총리직 사임의 뜻을 밝혔다. 그는 전날까지 중남미 순방을 떠난 박 대통령을 대행해 국정을 챙기겠다는 의지를 거듭 피력했지만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꿨다.
 
역대 재임기간이 가장 짧았던 총리는 윤보선 대통령 시절 65일간 역임했던 제6대 허 정 총리다. 20일로 취임 63일째를 맞는 이 전 총리는 박 대통령의 사의수용 시점에 따라 헌정 사상 최단기 총리로 기록될 수 있지만, 박 대통령은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27일 이후 사의 수용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min1330@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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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