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많은 회장님 '성완종 살생부' 실체

이명박 털려다 박근혜 털린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해외 자원개발 비리 수사로 이명박정부를 겨냥했던 청와대가 심각한 역풍을 맞았다. '죽은 성완종'이 '산 박근혜'를 쫓고 있는 꼴이다. "나는 MB맨이 아닌 MB정부의 피해자"라고 울먹였던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죽음과 맞바꾼 메카톤급 폭로로 정부·여당의 폐부를 찔렀다. 이제 관심은 '성완종 리스트'에 모아진다. 메모 내용이 사실이라면 청와대의 남은 운명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10일 새벽 6시 초대형 폭로가 나왔다. 두 전직 청와대 비서실장의 억대 금품 수수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이들에게 돈을 건넸다고 밝힌 사람은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다. 성 회장은 판도라 상자를 열고, 몇 시간 뒤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자원외교 역풍
정부에 부메랑

'십상시 파문'조차 비교 불가한 사상 초유의 비자금 스캔들이 터졌다. 성 회장은 생전 마지막 유언을 가족이 아닌 언론 기자에게 남겼다. <경향신문>과 가진 단독 인터뷰가 만든 소용돌이는 메가톤급 파괴력을 가진 허리케인으로 확대돼 청와대를 덮쳤다.

성 회장은 자살을 결심한 지난 9일 새벽 5시 유서를 남기고 자택을 나섰다. 자택 인근의 리베라호텔 앞에서 택시를 타고 5시30분께 북한산에 도착했다. <경향신문>은 약 30분 뒤 성 회장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결과적으로 유언이 된 그의 인터뷰는 거대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10일 공개된 인터뷰에 따르면 성 회장은 지난 2007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을 전후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각각 10만달러와 7억원을 건넸다. 돈의 성격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단 당시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성 회장은 두 실장에게 돈을 전달한 시기와 장소를 정확히 묘사했다. 김 전 실장에 대해선 "2006년 9월 VIP(박근혜 대통령) 모시고 독일 갈 때 10만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돈을) 전달했다. 당시 수행비서도 함께 왔었다. 결과적으로 신뢰관계에서 한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또 허 전 실장에 대해선 "2007년 당시 허 본부장(당시 박근혜캠프 직능총괄본부장)을 강남 리베라호텔에서 만나 7억원을 서너 차례 나눠서 현금으로 줬다. 돈은 심부름한 사람이 갖고 가고 내가 직접 주었다"라고 말했다. 성 회장은 "그렇게 (돈을 전달해) 경선을 치른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권 핵심 인사들 도마 '일파만파'
성회장 메모 사실이면 현정부 '끝'

성 회장의 인터뷰는 이날 오전 거의 모든 매체가 빠짐없이 인용했다. 사안이 가진 폭발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일각에선 '녹취록이 정말 있는 것이냐'라며 의문을 표했다. <경향신문>은 같은 날 오후 12시 성 회장의 육성 녹취록을 직접 공개하며 논란을 정리했다. 녹취록의 내용과 보도된 내용은 정확히 일치했다.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이로부터 약 2시간 뒤엔 성 회장이 죽기 직전 남긴 메모가 세상에 알려졌다. 성 회장의 시신을 검시하는 과정에서 검찰이 메모를 확보한 것이다. 메모에는 두 실장을 포함한 여권 거물급 정치인 8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메모에 쓰인 내용은 성 회장이 생전 육성으로 밝힌 주장과 같았다. '김기춘 10만달러' '허태열 7억원' 등의 내용이 담겨 있던 것이다.

남은 6명의 신원도 속속 드러났다. 메모 속 인물이 '홍준표(1억), 부산시장(2억), 홍문종(2억), 유정복(3억), 이병기, 이완구'라는 방송보도가 잇따랐다. 검찰은 "대체적으로 (언론에서 밝힌) 내용이 같다"라며 사실을 인정했다. 여기서 '부산시장'은 친박계인 서병수 부산시장으로 확인됐다.

메모의 필적은 평소 성 회장의 필적과 비슷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성 회장의 메모가 맞는지 필적감정을 의뢰했고, 본인 것이 맞다는 확인을 받았다. 메모에 적힌 총 글자 수는 55자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이병기 현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완구 국무총리는 구체적인 금액이 적혀있지 않아 의문을 자아냈다. 남은 4명은 각각 성 회장으로부터 적힌 액수만큼의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메가톤급 파괴력
판도라상자 열려

비록 성 회장은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성완종 리스트'는 박근혜정부 전·현직 핵심참모, 새누리당 유력 정치인을 궁지로 내몰았다. 아울러 이들 대부분은 소위 친박계 정치인이자 각종 선거 과정에서 박 대통령을 도왔기 때문에 청와대가 직격타를 맞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박근혜정부 입장에선 성 회장이 토끼인 줄 알고 몰았다가 사냥개에 물린 형국이다.

지난 2월26일 <세계일보> 보도를 시작으로 박근혜정부는 '부패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 무렵 수사의 무게 중심은 포스코에 쏠렸다. 이 총리가 먼저 3월12일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하겠다"라고 말했고, 같은 달 17일에는 박 대통령이 "비리의 뿌리를 찾아내 뿌리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당시 경남기업에 대한 수사는 일종의 보험 성격으로 풀이됐다. 자원개발 비리 수사는 영포라인뿐 아니라 일부 친이계 전·현직 의원을 옭아 멜 수 있고, 현 정권에 직접 타격을 입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선택지로 꼽혔다.

그렇지만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포스코 수사는 기대만큼 풀리지 않았다. 지금껏 포스코 수사의 핵심 인물인 정동화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에 대한 소환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반대로 경남기업 수사는 빠른 속도로 핵심에 다가갔다. 압수수색부터 구속영장 청구까지 일사천리였다.

타깃이 된 성 회장은 기업 경영권을 포기했으며, 회사는 법정관리·상장폐지로 내몰렸다. 비빌 곳이 없어서였는지 수사의 강도도 셌다. 검찰은 압수수색 18일(4월3일) 만에 성 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다음날엔 언론을 통해 성 회장의 구속수사를 기정사실화했다. 성 회장에게는 'MB맨'이라는 별명이 덧씌워졌다. 이명박정부 당시 정권 차원의 특혜를 받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사망 전 육성파일
"나눠서 7억 줬다"

그러나 성 회장은 지난 8일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나는 MB맨이 아니다"라며 요목조목 억울함을 호소했다. 또 성 회장은 "(지난) 2012년 총선에서 선진통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는데 새누리당과 합당 이후 대선과정에서 박근혜 후보를 위해 혼신을 다했다"라며 눈물을 훔쳤다.

수사기관도 이 같은 사실을 인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 회장을 'MB맨'으로 분류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는 지난 정권의 핵심축이었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에 속하지 않았다. 당내 계파 구도상 친이계로 뚜렷한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검찰은 한국광물자원공사와 경남기업이 해외 자원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투명한 자금 거래가 있었다는 혐의를 잡고, 둘 사이의 연관성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성 회장은 여러 친박계 중견 정치인에게 구명을 요청했지만 "죄가 없으면 수사를 받으라"며 번번이 거부당했다고 전해진다. 메모에 등장하는 이 실장 역시 성 회장의 구명 요구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때문에 기자회견은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카드였다. 그러나 성 회장의 바람과 달리 기자회견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성 회장은 바로 다음날 비극적인 선택을 했다. 성 회장을 통해 지난 정권 인사를 엮으려던 검찰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검찰 수사 리턴?…정관계 긴장
'뇌물리스트' 존재 여부에 촉각


'MB를 직접 겨냥하진 못할 것'이란 세간의 예측은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들은 '메릴린치 자문 사기' 의혹 등을 받고 있음에도 참고인 조사조차 받지 않고 있다. 오히려 MB 쪽을 어설프게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이들은 '친박'이다. 생전 성 회장은 이 전 대통령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지만 성 회장의 죽음으로 가장 득을 본 인물은 바로 이 전 대통령이다.

<경향신문> 인터뷰에 따르면 성 회장은 "자원 쪽을 뒤지다 없으면 그만둬야지. 마누라와 아들, 오만 것까지 다 뒤져서 가지치기 해봐도 또 없으니까 1조원 분식 얘기를 했다"라며 "(검찰이) 저거(이명박정권의 자원외교)와 제 것(배임·횡령 혐의)을 '딜'하라고 그러는데, 내가 딜할 게 있어야지요"라고 말했다.

이는 성 회장에 대한 수사가 궁극적으로는 MB 쪽을 겨누기 위한 발판이었다는 증거다. 정부는 진짜 'MB맨'을 잡기 위해 가짜 'MB맨'을 벼랑으로 몬 것이다. 성 회장의 죽음을 계기로 관련 수사는 사실상 중단될 개연성이 높다. 검찰 입장에선 수사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4·29재보선을 앞두고 '성완종 리스트'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변수로 떠올랐다. 대중의 관심은 사건 관련자의 금품 수수 여부에 쏠리고 있다.

김 실장과 허 실장, 그 밖에 언급된 모든 정치인은 "돈을 받은 적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김 실장은 청와대를 통해 해명자료를 보내는 등 이례적으로 해명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진실을 가리려면 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한 검찰 관계자는 "공소시효도 따져봐야 하지만 금품거래 의혹의 당사자인 성 회장이 사망했기 때문에 수사가 어렵다"라는 입장을 전했다.

4·29재보선
변수로 떠올라


검찰의 수사 착수와는 별개로 성 회장이 쓴 메모와 육성 녹취록 등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관련한 의혹 제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시비를 가리는 유일한 끈은 '제3의 목격자'다.

<경향신문>이 공개한 육성파일을 들으면 성 회장이 금품을 전달하는 과정에 '심부름을 시킨 사람'과 '수행비서'가 등장한다. 만약 이들이 성 회장의 인터뷰가 사실이라고 진술한다면 청와대의 남은 3년은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뇌물 메모' 8인의 반박

[김기춘] "악의적이고 황당무계한 내용"
[허태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홍준표] "돈 받을 정도로 친밀감 없다"
[서병수] "알지만 왜 거론됐나 모르겠다"
[홍문종]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 없다”
[유정복] "단 1원 한푼도 받은 적 없다"
[이병기] "인간적으로 섭섭했던 것 같다"
[이완구] "의정때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