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18)이동보 전 코오롱TNS 회장

세금 안 내고 고급빌라서 '떵떵'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항상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 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40조원에 이른다. <일요시사>는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을 토대로 체납액 5억원 이상(법인은 10억원 이상)의 체납자를 추적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18화는 365억원을 체납한 이동보 전 코오롱TNS 회장이다.

고급 빌라가 즐비한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A빌라는 한강변의 올림픽대로와 청담동 오솔길을 마주본 곳에 있다. 중세 영주의 성처럼 우뚝 솟아있는 A빌라는 지난 2월 기준 한 세대 전세가가 13억원을 호가했다.

지난 24일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10대 여성 수십명이 SM엔터테인먼트 오피스 앞을 서성였다. 바로 옆 블록으로 걷자 A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수 연예인이 입주한 것으로 알려진 A빌라에는 의외의 인물이 거주하고 있다. 13년째 365억원의 세금을 내지 않고 버텨온 이동보 전 코오롱TNS 회장(이하 이동보)이다.

고급빌라 거주

이동보는 2002년 11월부터 주민세 등 26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서울시가 징세할 체납액은 42억6200만원이다. 국세청의 자료에 따르면 이동보는 2000년부터 종합소득세 등 14건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국세청이 거둘 체납액은 322억3800만원이다.

이동보는 2010년까지 서울 서초구 방배동 한 빌라를 자신의 주소지로 등록했다. 그러나 당국에 통보 없이 2011년 무렵 A빌라로 거주지를 옮겼다. 세금을 받으러 간 서울시38세금징수과 직원은 허탕을 쳐야했다. A빌라의 실소유주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둘째 부인으로 알려졌지만 이동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동보는 지난 1974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장녀 예리씨를 첫 아내로 맞아들였다. 결혼 중매자로 전해진 사람은 고 육영수 여사다. 이동보와 예리씨는 2005년 전후 이혼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명확치 않다. 2005년 11월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예리씨는 남편(이동보)에 대해 "아예 (얘기를) 꺼내지 말라"라고 했다.

당시 예리씨와 이동보의 장녀 이모씨는 사업가로 변신해 대외활동에 주력했다. 같은 해 서울고법은 분식회계를 통해 대출금을 횡령하고 납품대금을 가로챈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이동보에게 징역 3년6월을 선고했다. 공공교롭게도 이 시기 둘 사이의 이혼이 결정됐거나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6년 이후 기사를 보면 이동보와 예리씨가 이혼한 것으로 돼 있다. 이들의 이혼 사유는 외부로 공개되지 않았다.

이동보에게 징역 3년6월을 확정 선고한 대법원은 한쪽에서 면죄부를 내렸다. 분식회계 과정에서 과다 납부된 법인세에 대해 환급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판결에 따라 코오롱TNS는 60억원을 절세할 수 있었다.

서울시 42억원 국세청 322억3800만원
월드컵 비리로 실형 벤처업체 고문 위촉

앞서 이동보는 900억원에 달하는 단기차입금을 회계에서 누락하고, 당기 순이익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분식회계를 저질렀다. 단기차입금을 부채로 보지 않고 기업 재무를 적정하다고 평가한 C회계법인은 부실감사를 이유로 법원에서 투자자(코오롱TNS CP를 매입한 상호저축은행·종합금융사 등)에게 배상 명령을 받았다.

관련 재판에서 이동보는 회사 직원을 통해 감사보고서에 부당 개입한 책임이 인정됐다. 당시 C회계법인은 '코오롱TNS가 6000억원 규모의 중국 관광사업 컨소시엄에 참여해 높은 매출 신장이 기대된다'라고 감사보고서에 적었다. 법원은 이 같은 문구가 투자자를 속이기 위한 근거 없는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코오롱TNS는 1988년 코오롱그룹에서 분리돼 나온 회사다. 자본금은 150억원으로 부도 직전 이동보의 지분율은 100%였다. 이동보는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인 고 이동찬과 이복형제 사이다.


하지만 코오롱그룹 측은 일관되게 "코오롱TNS는 코오롱과 아무 관계없는 회사며,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실제 두 회사는 '일감 몰아주기'와 같은 내부 거래를 일절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코오롱TNS는 1969년 설립 이래 고속버스 운송사업 및 해외 여행사업을 주력 삼아 성장했다. 1988년부터는 사업 다각화를 꾀해 ▲자동차부품 업체인 일진금속공업 ▲인조피혁 생산업체인 대성합성화학 ▲에폭시 주조업체인 삼성특수화학 ▲석제품 제조업체인 세진대리석 등을 차례로 인수했다.

그러나 2001년부터 차입금 규모가 1200억원에 달해 자본 잠식에 빠졌고, 금융 이자비용이 영업이익을 초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코오롱TNS는 '2002 한·일월드컵 기념품(휘장)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처절한 실패를 맛봤다. 2002년 7월 코오롱TNS는 금융권에서 돌아온 37억원의 어음을 막지 못했다.

월드컵의 열기가 식자 여의도 안팎에서 기념품 사업과 관련한 온갖 비리 의혹이 터져 나왔다. 검찰은 즉각 이동보를 향한 수사에 착수해 기념품 비리는 물론 그의 수십억원대 횡령 혐의를 밝혀냈다. 당시 이동보는 자사 주식을 매입할 목적으로 1990년대부터 회삿돈을 빼돌려 자신의 계좌로 입금하는 등의 범행을 저질렀다.

이동보가 법정 구속된 후 2000억원대 분식회계, 200억원대 배임·횡령 사건은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실형을 살고 나온 '회장님' 앞에 남은 것은 300억원 규모의 체납 세금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동보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납세를 회피했다. 코오롱과 관련한 주식을 갖고 있다는 소문부터 부유한 생활을 즐긴다는 첩보까지 과세당국에 흘러들었다.

문제는 보험을 압류하는 등의 노력에도 이동보 명의의 재산이 더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동보는 출소 후 10년 가까이 체납자로 살고 있다.

이동보를 돕는 조력자가 여럿 있지만 그들의 책임을 묻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A빌라는 건물 관리인이 입구를 막아 접근이 어려웠다. 기자는 최근 이동보를 회사 고문으로 영입한 D사 실무자와 접촉해 해명을 들으려 했지만 "연락할 수 없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돈이 없다"

벤처업체인 D사는 "우리 대표님(이모씨)이 사적인 자리에서 이동보를 만나 고문직을 제의했다"라며 "고문료는 지급되지 않았고, 조직이 젊기 때문에 지식 공유 차원에서 부탁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보가 고액체납자인 것을 알고 있느냐'는 물음에 D사는 "그렇다"라고 답했다. 덧붙여 D사는 "순수한 의도로 모신 것"이라며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강조했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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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