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1000호 특별기획 ②> 본지 달군 최고의 뉴스메이커 100인

말 많고 탈 많았던 그때 그 사람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1996년 5월 창간한 <일요시사>는 김대중정부의 탄생을 지켜봤고, 6·15남북공동선언과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등 역사적인 사건을 두루 경험했다. 한나라당의 정권 탈환과 미국발 금융위기,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입성은 <일요시사>에게도 큰 사건이었다. <일요시사>는 지령 1000호를 맞아 본지 지면을 달궜던 뉴스메이커 100인을 선정했다. 100인의 면면을 통해 <일요시사>가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봤다.

<일요시사>는 지난 4일 편집국 회의를 통해 1996∼2015년까지 신문에서 중점적으로 다뤘던 뉴스메이커 100인을 선정했다. 정치인, 기업인, 유명인, 연예인, 스포츠스타를 비롯해 범죄자를 항목에 집어넣었다. 각 포털사이트에서 매년 발표하는 '올해의 검색어'도 일부 참고했다. 표기의 혼란을 막기 위해 경어를 생략하고 본명 그대로 싣는다.

[편치 않았던]
[정치 20인]

1997년 12월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다. 김영삼정부는 IMF를 상대로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이른바 'IMF 사태'라고 불리는 사건의 요체다. 물론 대한민국이 어느 날 갑자기 부도를 맞게 된 것은 아니다. 김영삼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은 너무 미숙했다.

더구나 김영삼정부는 부패했다. '소통령'으로 불렸던 YS의 차남 김현철(1)은 국회 한보특위 청문회장에 불려나왔다. TV로 생중계된 청문회는 많은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다. 김현철은 권력형 비리에 연루돼 구속됐다.

김대중(2)은 우리 역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김현철과 마찬가지로 권력형 비리를 저질렀다. 한국 현대사의 증인 김대중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을 남기고 2009년 숨을 거뒀다.


6·15 선언의 또 다른 주역은 김정일(3)이었다. 김정일은 남북협력을 약속하고 일부 영토를 개방했다. 하지만 세계의 이목을 피해 핵개발을 추진하는 등 한반도 평화를 위협했다. 우리 언론은 김정일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악마'라는 평가와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교차했다. 독재자로 살았던 김정일은 2011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김정은(4)은 아버지의 권력을 승계했다. 왕좌에 오르자 대규모 숙청작업을 단행했다. 2014년 초 '김정은 사망설'이 유포됐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충청권의 맹주였던 김종필(5)은 DJP연합을 통해 국무총리에 내정됐다.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그는 국회의원에 아홉 번이나 당선(또는 내정)된 실력자였다. 김대중정부와 결별한 뒤로는 독자 노선을 걸었다.

이회창(6)은 김영삼정부가 낳은 스타였다. 대법관으로 재직했을 당시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민주화 이후에는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한나라당 소속 대선 후보로 대권을 노렸지만 두 번 다 낙선했다. 독자 출마한 17대 대선에서도 큰 표 차로 낙선했다.

노무현(7)은 대통령 당선 전후의 파격 행보로 기대를 모았다. 의회는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상정해 의결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했으나 노무현에 대한 기성언론의 공세는 계속됐다.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후임인 이명박(8)은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등에 업고 청와대에 입성했다. 국밥을 먹는 홍보영상이 크게 히트했다. 임기 중에는 '촛불 수사' '4대강 사업' 등 크고 작은 논란에 휩싸였다. 이명박으로부터 서울시장 자리를 물려받은 오세훈(9)은 한때 잠재적인 대권 후보로 부상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박원순(10)은 시민단체 출신으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2014년에는 재선에까지 성공했다. 그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했던 안철수(11)는 18대 대선에 출마했다가 자진 사퇴했다. 현재는 새정치민주연합에 입당해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노무현정부의 국무총리였던 고건(12)은 탄핵 정국 당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이명박정부의 국무총리였던 정운찬(13)은 '세종시 수정안'을 설계했으나 계획대로 입안하지 못했다. 충청권 출신인 이인제(14)는 민선 1기 경기도지사를 지내고 대선에 두 차례 나왔으나 모두 낙선했다. 당을 옮겨 다니면서도 국회의원 6선에 성공해 '피닉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소통령 대쪽판사 피닉제 등 별명 다양
경영싸움 폭행사건 등 재계 명암 뚜렷

박근혜(15)는 18대 대선에서 51.6%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근혜에게는 늘 아버지의 그림자가 따라 붙었다. 원세훈(16)은 국정원장 자리에서 댓글을 통한 대선 개입을 지시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전두환(17)은 거액의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다가 2013년에야 완납 의사를 밝혔다.

'친박'의 상징이었던 전여옥(18)은 대변인 당시 내뱉은 말들이 화제가 됐다. 비슷한 예로 유시민(19)은 논리정연한 말과 글솜씨로 주목받았다. 허경영(20)은 '화성인'스러운 돌출 행동으로 웃음을 안겼다. "내 눈을 바라봐"와 같은 희대의 유행어도 남겼다.

[신화와 몰락]
[기업 20인]

1998년 6월 남북관계의 물꼬가 터졌다. 정주영(21)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에 당도했다. 이를 기점으로 현대그룹은 금강산 관광까지 유치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편히 눈감지 못했다. 그룹 후계구도를 놓고 이른바 '왕자의 난'이 발발했다.

차남 정몽구(22)와 5남 정몽헌(23)이 대립각을 세웠다. 정몽헌은 2003년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 정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지는 아내인 현정은(24)이 물려받았다. 정몽구는 현대자동차그룹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켰지만 2007년 횡령·배임 사건 피의자로 법정에 섰다.

이건희(25)는 '삼성 신화'를 대한민국에 아로새겼다. 2009년에는 헌정 이래 최초로 단독 사면을 받았다. 2014년에는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장남인 이재용(26)은 사실상 그룹 후계자로 지목됐다.

허창수(27)는 지난 2011년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됐다. GS그룹 총수 외에도 프로축구 구단 FC서울 구단주를 겸임 중이다. 박용만(28)은 두산그룹 회장이 된 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수락했다. 현대가처럼 '왕자의 난'을 겪고 법정에도 섰지만 트위터를 통한 소통 행보로 그룹 이미지를 제고했다.

김승연(29)은 지난 2007년 보복폭행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렇지만 프로야구 구단 한화에 쏟은 투자가 많은 팬의 칭송으로 돌아왔다. 천안함 승조원 유가족을 그룹 채용에 배려하는 등 사회적인 활동에도 열심이다. 최철원(30)은 이른바 '멧값 폭행'으로 국민적인 지탄을 받았다. SK그룹 재벌 2세인 그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풀려났다.

이외에도 많은 기업인이 손가락질을 받았다. 정태수(31)는 한보그룹 사태가 터지자 휠체어에 앉았다. 고액체납자가 된 그는 행방불명 상태다. 김우중(32)은 1999년 대우그룹 해체와 함께 해외로 도피했다. 국내로 귀국해 실형을 선고 받았으나 2007년 사면됐다.

강덕수(33)는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었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몰락했다. 현재현(34) 역시 동양그룹 사태로 수많은 서민을 울렸다. 유병언(35)은 세월호 참사로 파생된 수사 과정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요란했던 '삼성X파일' 수사의 주인공은 이학수(36)였다. 통일교의 창시자 문선명(37)은 2012년 숨질 때까지 여러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문국현(38)은 한때 창조한국당 당수로 대권에 도전했으나 정권에 밉보인 죄로 정계를 은퇴했다.

대상그룹 장녀인 임세령(39)은 2009년 이재용과 이혼했다. 최근에는 연예인과 열애설에 휩싸였다. 엔씨소프트 김택진(40)은 '리니지'라는 게임으로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파문의 주인공]
[사회 20인]

밀레니엄 열풍이 불었던 1999년 도올 김용옥(41)은 국내 철학 강의의 새 지평을 열었다. 뒤이어 등장한 구성애(42)는 '아우성'이란 프로그램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강금실(43)은 노무현정부 당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이 됐으며, 호주제를 폐지했다.

이라크에서 피랍된 김선일(44)은 2004년 유명을 달리했다. 다음해에는 이른바 '줄기세포 스캔들'이 대한민국을 흔들었다. 황우석(45)은 그해 가장 많이 검색된 인물이었다. 2007년에는 신정아(46)라는 이름이 연일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같은 해 심형래(47)는 문제작 <디워>를 내놨다. 문화평론가 진중권(48)은 이 논쟁에 참여해 이름을 알렸다. 장자연(49)의 유서는 연예계의 판도라를 열었다. 불행히도 사건은 흐지부지 됐다. 신영철(50)은 이명박정부의 뇌관인 '촛불재판'에서 외압 논란을 자초했다. 사법부의 독립성이 땅에 떨어졌다. 조현오(51)는 잇따른 막말로 구설에 올랐다. 경찰청장으로 이명박정부를 적극 호위했다.


한국 가톨릭계의 큰 어른인 김수환(52)은 2009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였다.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던 앙드레김(53)도 2010년 작고했다. 그를 기리는 각계의 추모 메시지가 쏟아졌다.

성접대 스폰서 혼외아들 발칵
연쇄·토막살인 아동폭행 경악

언론인 손석희(54)는 MBC를 떠나 JTBC로 옮기면서 화제가 됐다. 아나운서 김주하(55)는 불우한 가정사가 노출됐다. 혼혈인이자 성공한 뮤지컬 음악 감독인 박칼린(56)은 일약 스타가 됐다. '트위터 대통령' 이외수(57)는 존경과 모멸을 한 몸에 받았다.

남성연대로 유명세를 치렀던 성재기(58)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검찰총장후보로 거론됐던 김학의(59)는 사상 초유의 성접대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를 밀어낸 채동욱(60)은 혼외아들 의혹으로 낙마했다.

[뜨거나 지거나]
[스타 20인]

1998년 개그맨 김국진(61)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유동근(62)은 사극 <용의 눈물>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홍석천(63)은 국내 연예인 가운데 최초로 커밍아웃했다. 그룹 GOD(64)의 콘서트장에는 수만명의 팬이 몰렸다.

배용준(65)은 드라마 <겨울연가>를 통해 한류스타로 등극했다. 유승준(66)은 병역기피 논란으로 국내에서 추방됐다. 개그맨 박준형(67)은 2003년 <개그콘서트>에 출연해 연말 시상식을 휩쓸었다. 같은 해 이효리(68)는 정규앨범을 발표하고 '섹시'의 대명사가 됐다.

이영애(69)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 드라마 <대장금>을 성공시키며 최고의 여배우가 됐으나 결혼과 동시에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2007년에는 걸그룹 원더걸스(70)가 '텔미'를 유행시켰다. 2008년 최진실(71)의 자살은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해가 가도 애도 분위기가 이어졌다.

<슈퍼스타K>란 오디션 프로그램은 허각(72)의 인생을 바꿨다. 이듬해 신정환(73)은 원정도박 사건에 연루되며 방송가에서 퇴출됐다. 가수 싸이(74)는 '강남스타일'로 미국 음원차트를 휩쓸었다. 배우 설경구(75)는 재혼을 둘러싼 여러 루머로 몸살을 앓았다.

전지현(76)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김구라(77)는 '막말 파문' '억대 보증' 등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방송가에서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다.

방송인 노홍철(78)은 케이블TV에서 시작해 공중파를 장악했다. 현재는 음주운전 논란으로 자숙 중이다. 유재석(79)은 '유느님'으로 불리며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소신 있는 가수였던 신해철(80)은 최근 의료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국민에 힘 준]
[스포츠 15인]

IMF 사태로 온 국민이 시름하고 있던 당시 메이저리거 박찬호(81)와 프로골퍼 박세리(82)의 활약은 큰 힘이 됐다. 박세리와 함께 깜짝 스타가 된 '땅콩' 김미현(83)은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는 히딩크(84)와 태극전사들의 땀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축구선수 박지성(85)은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해 해외축구 붐을 일으켰다.

농구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김승현(86)은 코트를 휘저었다. '홈런왕' 이승엽(87)은 아시아 홈런기록을 갈아치웠다. '피겨여왕' 김연아(88)는 벤쿠버올림픽에서 전설적인 연기로 금메달을 따냈다. '마린보이' 박태환(89)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다른 메이저리거 추신수(90)는 초대형 계약으로 잭팟을 터뜨렸다. 쇼트트랙 영웅 안현수(91)는 러시아에 귀화해 선수 생활을 잇고 있다. 역도 금메달리스트 장미란(92)은 세계를 들어 올렸다.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93)은 격투기 선수로 변신했다. 배구 여신 김연경(94)은 해외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고, e스포츠 선수였던 홍진호(95)는 방송인으로 변신에 성공했다.

[충격과 경악]
[범죄자 5인]

신창원(96)은 1997년 탈옥을 감행해 우리 사법당국을 농락했다. 조두순(97)은 아동 성폭행을 저질러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살인마 유영철(98)은 죄 없는 여성 수십명을 죽였고, 오원춘(99)은 경기 수원에서 끔찍한 토막살인을 저질렀다.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100)은 출소 이후에도 연예인 협박 사건에 연루되며 체면을 구겼다가 2013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angeli@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내부 총질 ‘친명 전쟁’ 서막

내부 총질 ‘친명 전쟁’ 서막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당내 울려 퍼지던 비명(비 이재명)계 소리가 사라졌다. ‘내부 저격수’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 중심으로 똘똘 뭉쳐 국회를 꽉 잡을 것이란 희망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다른 한쪽에서는 우려의 뜻을 내비친다. ‘이재명 독주’ 체제로 완성된 민주당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겠냐는 점에서다. 22대 총선서 압승을 거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큰 폭으로 물갈이에 나섰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주요 자리에 친명(친 이재명)계 인사들을 대거 투입했다. 친명 위주의 인선을 단행해 원팀 민주당을 꾸리겠다는 셈이다. 공천 파동을 딛고 살아남은 친명 의원들이 일제히 한 보 전진했다. 피바람 잦아드니… 지난 21일 이 대표는 사무총장에 김윤덕 의원을 임명했다. 김 의원은 이번 총선서 전략공천관리위원회 위원을 지낸 인물로 지난 20대 대선 경선 당시 이재명 후보의 열린캠프서 활동한 바 있다. 조직사무부총장은 황명선 당선인, 당 대표 정무조정실장에는 김우영 당선인, 전략기획위원장은 민형배 의원 등 친명계가 이름을 올렸다. 민주당의 정책을 이끌 민주연구원장에는 이 대표의 ‘정책 멘토’로 알려진 이한주 전 경기연구원장이 선임됐다. 이 원장은 이 대표의 ‘기본소득’을 설계한 인물로 민주당이 제시한 ‘25만원 지원금’에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법률위원장에는 이 대표의 대장동 변호를 맡은 박균택 당선인이 낙점됐다. 이 밖에도 당 대표 비서실장에는 천준호 의원, 당 대표 정무조정실장에는 김우영 당선인, 교육연수원장에는 김정호 의원, 수석대변인에는 박성준 의원, 대변인에는 한민수·황정아 당선인이 자리했다. 이날 한민수 대변인은 인사 소개를 마친 후 당직 개편에 대해 “4·10 총선의 민심을 반영한 개혁 과제 추진에 있어서 동력을 형성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신진 인사들에게 기회를 부여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인선은 이 대표가 국회에 입성한 후 진행된 두 번째 물갈이다. 2022년 8월 이 대표가 취임 직후 단행한 인선을 두고 ‘친명 일색’이라는 거친 비판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한병도·권칠승·고민정 등 대표적인 친문(친 문재인)계 인사를 등용하면서 논란을 잠재웠지만 이번 총선서 친명이 주류를 이루면서 이들을 당에 대거 투입한 것으로 풀이된다. 22대 국회 문턱을 넘은 친문 세력은 약 스무명 안팎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민주당 180석을 지탱하던 핵심축이었지만 총선을 거치면서 세력이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민주당 공천을 두고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말이 나오자 고민정 최고위원은 위원직을 사퇴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처럼 공천 피바람이 당내를 휩쓸었지만 총선 이후 이 대표를 비판하던 목소리가 단숨에 잦아들었다. 총선 결과 이후 이 대표 체제는 더욱 견고해졌다. 이 대표를 거칠게 비판하며 당을 떠나거나 새로운 둥지를 꾸린 이들이 줄줄이 낙선하면서다. ‘친명’ 타이틀 달고 꽃밭 안착 둥지 떠난 탈당파 줄줄이 낙선 새로운미래 이낙연 공동대표는 이 대표와 대립각을 세운 뒤 탈당해 새로운 당을 꾸렸다. 이번 총선서 광주 광산을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민주당 민형배 당선인에게 62.25%p로 크게 밀려 패배했다. 이 공동대표가 야심 차게 창당한 새로운미래는 지역구 한 석에 그치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개혁신당과 손을 잡은 이원욱 공동선대위원장 역시 지역구서 낙선했다. 탈당 후 국민의힘으로 이적한 ‘5선 중진’ 이상민 의원과 김영주 의원(국회 부의장)도 고배를 마셨다. 홍영표·설훈 등 다른 비명계 의원 역시 줄줄이 낙선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당을 떠나면 춥다는 걸 몸소 보여줬다”며 “소위 비명계로 분류됐던 이들이 모두 당을 떠났으니 당내 파열음이 나오지 않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부분 여의도를 떠나게 됐으니 당분간 ‘내부 저격수’로 불리는 이들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친명 체제에 화룡점정을 찍을 원내대표 선출 결과에도 눈길이 쏠린다. 내달 3일, 선출을 앞둔 차기 원내대표 선거가 사실상 친명인 박찬대 의원의 독무대인 만큼 ‘친명일색 민주당’이 완성될 것이란 해석이 우세하다. 박 의원은 지난 21일, 일찌감치 출마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명 대표와 강력한 투톱 체제로 개혁 국회, 민생 국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박 의원이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서 자천타천으로 물망에 오른 의원들은 속속 불출마를 선언했다. 서영교 최고위원은 지난 22일 원내대표 출마 선언을 위한 기자회견을 예고했지만 돌연 취소했다. 당 대표 ‘원픽’ 이와 관련해 서 최고위원은 “(박찬대 의원 포함)2명 다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면 제가 원내대표에 당선돼도 최고위원 두 자리가 비게 된다”며 “총선에 압도적으로 이긴 이 대표 체제에 문제가 된다는 게 처음부터 고민이었는데 사전에 조율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4선 김민석 의원도 “당원 주권의 화두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며 불출마를 시사했다. 인재위원회 간사였던 3선 김성환 의원과 원내수석부대표인 박주민 의원 역시 불출마 입장을 표했다. 민형배·진성준 의원도 하마평에 올랐지만 각각 전략기획위원장, 정책위의장에 임명되면서 자연스레 출마가 불발됐다. 이로써 원내대표 출마 후보군은 박 의원 한 명으로 압축됐다. 친명계 핵심인 만큼 이 대표의 의중인 ‘명심’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당초 10명 안팎의 후보군이 난립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물밑서 이 대표가 교통정리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당 대표의 노골적인 선거개입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당을 좌우하는 명심에 대항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친문 인사가 끼어들 틈도 없이 빠르게 상황이 흘러갔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의 설명이다. 민주당 원내대표 겸 의장단 선출 선거관리위원회 간사인 황희 의원은 지난 24일, 선거관리위원회 1차 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당규상 민주당서 원내대표 선거는 결선투표가 원칙으로 기본적으로 과반 득표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후보자가 1인일 경우 찬반 투표를 하기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원내대표 다음으로 주목받는 자리는 바로 차기 국회의장이다. 당내 우직한 이력을 가진 후보들이 기싸움이 이어가면서 명심이 누군의 손을 들어줄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민주당에서는 6선에 성공한 조정식·추미애 당선인과 5선인 정성호·우원식 의원이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출마를 밝혔다. 이들은 일제히 “기계적 중립은 없다”는 입장을 강조하며 강경 성향 의원의 표심을 얻기 위한 선명성 경쟁에 나섰다. 완벽한 시나리오 먼저 정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기계적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민주당 출신으로서 다음 선거의 승리를 위해 보이지 않게(그 토대를) 깔아줘야 된다”고 말했다. 여야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서 다수당의 주장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정 의원은 이 대표의 사법연수원 18기 동기로 알려졌다. 40년 가까이 알고 지낸 만큼 ‘원조 친명’이자 ‘친명계 좌장’으로 통한다. 이 대표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7인회’ 핵심 멤버기도 하다. 친명 후발주자인 추 당선인도 국회의장 도전에 대해 “주저하지 않겠다”며 “국회의장도 물론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그렇다고 중립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유보된 언론개혁, 검찰개혁을 해내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히면서 강성 지지자의 호응을 유도했다. 민주당 조 전 사무총장도 “여야 합의가 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릴 수 없다”며 “국회의장이 되면 긴급 현안에 대해서는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를 열어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과반석을 차지한 만큼 당내 경쟁도 치열해진 양상을 띠고 있다. 국회의장 경선에 당원투표를 반영하자는 주장까지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강성 지지층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만큼 후보들은 당심을 겨냥하기 위해 명심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당의 주요 인사들이 ‘이재명과의 호흡’을 강조하고 나선 만큼 이 대표의 의중인 ‘명심’은 당을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를 앞세운 메시지가 앞다퉈 나오면서 입법 독주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도 커질 전망이다. 국민의힘은 “너도나도 ‘명심팔이’를 하며 이 대표에 대한 충성심 경쟁을 하니 국회의장은커녕, 기본적인 공직자의 자질마저 의심스러울 정도”라며 “협치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버려야 한다는 망언을 빙자한 민주당의 속내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상임위를 독식하겠다는 위헌적 발상도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솔솔 올라오는 ‘대표 연임설’ 대세는 ‘명심’…친문계 주목 총선 승리 이후 일부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 “협치는 없다”는 기류가 흐르자 이를 꼬집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당내 주요직이 속속들이 친명으로 배치되는 가운데 친문에게 더 이상 핵심적인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여기에 이 대표의 연임설까지 불거지면서 ‘이재명호’ 민주당은 한층 견고해질 전망이다. 이 대표 임기는 오는 8월28일까지다. 이제까지 민주당서 당 대표가 연임한 역사는 없지만 당헌·당규상 이를 금지한 조항도 없다. 이 대표가 마음만 먹는다면 몇 번이고 당 대표를 연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대표는 20대 대선 패배 직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전당대회에 연이어 출마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총선 승리 직후부터 친명 의원 중심으로 “민주당에 압승을 가져다준 이 대표가 한번 더 당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면서 친·비명 간의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정성호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국회가 본연의 역할을 하고 민주당이 윤석열정권의 무능과 폭주하는 이 상황을 막아야 된다는 측면서 당 대표가 강한 리더십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며 “그런 면에서 연임할 필요성도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총선이 끝나고 이 대표를 만나 “강한 당 대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도 덧붙였다. 해남·진도·완도에 승기를 꽂은 박지원 당선인 역시 “만약 이 대표가 계속 대표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해야 한다. 연임해야 맞다”며 “이번 총선을 통해 국민이 이 대표를 신임했다”고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줬다. 반면 친문계 핵심으로 꼽히는 윤건영 의원은 이 대표 연임에 대해 “전당대회가 넉 달이나 남은 상황서 민주당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슈”라며 “지금은 총선서 나타난 민의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 “당의 리더십에 관한 것은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의도 정가에 밝은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친명 체제를 두고 외부서 걱정하는 모양이지만 정작 당내에서는 후폭풍이 불 수 없는 상황”이라며 “비명 의원끼리 바람을 일으키려고 해도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폭풍 전야 잔잔한 미풍 일제히 이 대표의 의중만 바라보는 민주당은 친명과 찐명 그리고 ‘신명(새로운 친명)’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상황서 “당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겠냐”는 비판이 물밑으로 조용히 들려온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애초에 이 대표의 목적은 자신만의 민주당을 만드는 거였고 이번 총선을 통해 결국 이뤄냈다”며 “친명 민주당이라는 날카로운 검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국 이 대표의 손에 달려 있다. 이 대표는 임기를 마치는 날까지 자신의 영향력 밑에 당을 두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속 타는 조국혁신당 교섭단체 구성에 난항을 겪는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앞서 조국당 조국 대표는 여러 차례 민주당 이재명 대표에게 ‘범야권 연석회의’를 제안했지만 이 대표는 만찬 회동으로 갈무리하는 데 그쳤다. 민주당 내에서는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 대표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조 대표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캐스팅보트 역할을 쥔 것 또한 조국당인 만큼 22대 국회 개원 이후 민주당과 협상 테이블에 앉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