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물러난 김기춘 ‘그동안 무슨 일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8개월 천하’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 대해 “사심 없는 분”이라며 변함없는 신뢰를 내비쳤다. 당시 보수 언론조차 김 전 실장을 사퇴를 촉구했지만, 박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왕실장. 청와대는 지난 2월17일 김 전 실장의 사의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정국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18개월을 되짚어봤다.

김 전 실장은 1939년 경상남도 거제에서 태어났다.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21세에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이후 196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광주와 부산,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근무했다. 박정희 정부 집권 말기 청와대비서관을 지냈다. 1991년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그는 현 정권의 전형적인 TK엘리트다. 
 
‘우리가 남이가’
전형적 TK엘리트
 
김 전 실장의 논란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 이름을 따서 만든 ‘정수장학회’출신이며, 장학생들이 만든 모임인 ‘상청회’의 회장을 지냈다.
 
김 전 실장은 1972년 법무부 과장 시절 유신헌법 제정 실무팀 일원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뒤 유신헌법 초안 작성에 핵심 역할을 했다. 초안에는 민주주의를 위협한 핵심 조항인 '긴급조치권'을 현실화시켰다.
 

같은 해 12월 김 전 실장은 대검찰청이 발행한 ‘검찰’ 48호에 ‘유신헌법 해설’ 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글에서 ‘유신헌법은 우리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로 이 땅 위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라고 주장하며, 독재정권을 옹호하기도 했다. 
 
그가 활약했던 중앙정보부 5국은 공안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이었다. 인혁당 사건과 같은 용공조작 사건도 대부분 김기춘의 5국에서 담당했다.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 당시 그는 중앙정보부 5국의 파견 검사로 해당 사건을 맡았다. 그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문세광을 하루 만에 설득해 범행 과정 일체를 자백 받아 기소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건의 조작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있다. 
 
김 전 실장의 출세 배경 자체가 공안과 정보 조작, 고문을 담당했던 중앙정보부 5국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경력 덕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말년에는 청와대 비서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를 두고 박근혜 대통령의 ‘대부’라고 불리기도 했다. 
 
유신독재 박정희 전 대통령을 섬겼던 김 전 실장은 현 정부의 제2인자로 올라설 수 있는 완벽한 존재였다. 
 
내정부터 퇴임까지 조용한 날 없어
각종 논란·파문에도 꿋꿋하게 버텨
 

검찰총장이던 1989년 8월12일 기자간담회에서는 “더 많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 등 피의자의 변호인 접견권에 일시적 제한·금지가 필요하며 이는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검찰에 의한 변호인 접견 금지에 대해 변호인들이 변호인 접견금지 취소청구준항고를 법원에 내자 법원은 접견금지가 위법이라는 결정을 잇달아 내린 바 있다.
 
92년 대선을 앞둔 12월 부산 ‘초원복집’에서 김 전 실장은 당시 전 법무부 장관과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등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 내용을 유포시키자는 대화를 나눴다. 이 비밀회동에서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돼”와 같은 지역감정을 건드리는 발언을 했다. 이 내용을 통일국민당 관계자들이 도청해 언론에 폭로했다. 
 
 
하지만 김영삼 후보 측은 이 사건을 음모라고 규정했다. 주류 보수 언론은 관권선거의 부도덕성보다 주거침입에 의한 도청의 비열함을 더 부각해 사건의 본질을 호도했다. 이 때문에 통일국민당은 여론의 역풍을 맞았고, 영남 지지층을 집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으로 김 전 실장은 기소됐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오히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다. 김 전 실장이 15대 신한국당 의원 후보로 나올 당시 ‘초원복집 사건’으로 낙선대상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5대부터 내리 한나라당 3선 의원직으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정치공작 전문가?
욕먹고 못들은척
 
2004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 있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었다. 박정희를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던 김 전 실장에게 헌법을 이용한 탄핵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참여정부 시절 김 전 실장은 법사위원장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고,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과정에서 소추위원 역할을 맡았다.
 
2006년 김 전 실장은 한나라당 긴급 의원 총회에서 “대통령은 이미 정치적으로 하야한 만큼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발언했다. 또한 “노무현은 사이코다. 자기 검정 조절하지 못하고 자제력이 없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그녀의 멘토단인 ‘7인회’의 좌장격인 김 전 실장을 정치 한복판으로 불러냈다. 2013년 김 전 실장 임명을 놓고 시민단체와 여론은 ‘잘못된 인사’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시민 단체와 여론은 ‘유신의 부활’ 혹은 ‘김기춘식 세계관의 정치가 복원될 것’이라는 예측을 쏟아냈다. 
 
특히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는 “초원복집 사건 김기춘의 청와대 비서실장 임명을 취소하라” 등 성명을 내고 청와대를 질타했다. 이어 “1974년부터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으며, 민주주의를 파괴한 유신헌법 초안 마련을 주도한 인물”이라며 “청산해야 할 과거의 주역을 되살리는 이번 인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논평도 빼놓을 수 없다. 경실련은 “이번 청와대 수석비서진 부분 교체는 취임 후 줄곧 지적됐던 인사실패를 자인한 것”이라며, “박 대통령이 현재 시스템으로 국정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불통으로 내린 인사”라고 주장했다. 지난 18개월 동안 이런 주장은 현실이 됐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날 당시 대통령은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해 7월7일 대통령비서실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 출석한 김 전 실장은 ‘사라진 7시간'에 대해 두루뭉술한 답변을 해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않았다는 논란이 일었다.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 전 실장은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것은 제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또 “대통령이 집무실에 있었느냐, 비서실장이 모르면 누가 아느냐”는 질문에도 “대통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한다. 비서실장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결국 이 논란은 8월 일본 산케이 신문의 <박근혜 세월호 7시간 미스테리>라는 스캔들 기사로 번지는 단초가 됐다. 이후 김 전 실장은 한참 뒤인 11월 국회에서 “(대통령의 위치를)모른다고 했지만, 그 이후에는 국가 원수 경호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고 한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문의 7시간과 관련해 김 전 실장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김 대표는 “그런 유언비어가 퍼진 건 국회에서 답변을 잘 못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국회에 출석한 김 실장이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행보를 분 단위로 밝혔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며, “김 실장이 국회에 열 번이라도 나와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한다”고 거듭 김 실장의 책임을 지적했다. 
 
“사심 없는 분”
대통령 절대신임
 

세월호 사고 당시 구원파 신도들은 금수원애 ‘김기춘 비서실장 갈데까지 가보자. 우리가 남이가’라는 현수막을 걸어, 김 전 실장과 유병언의 교감설이 주목 받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의 후보자 낙마율은 14.5%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김 전 실장이 재임 당시 안대희 총리 후보자에 이어 문창극 후보자가 낙마했다. 이 외에 사회부총리를 겸할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와 송광용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 등 교육 분야 최고위직 두 명은 논물 표절도 밝혀졌다.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 등 구린 구석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고위 공직자 인사 검증은 청와대 인사위원회가 맡고 있다. 당시 인사위원장은 비서실장이 겸하고 있었다. 김 전 실장은 인사위원장으로 두 차례나 총리 후보자를 부실하게 검증한 책임에 벗어나기 어려웠다. 여당인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김 실장이 인사와 공천에 개입한 것은 잘못”이라며 김 전 실장의 책임론을 공론화하고 나선 적도 있다.
 
하지만 인사 실패에 대한 책임도 김 전 실장의 자리를 위태롭게 할 수 없었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가 낙마했을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을 경질했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 자진 사퇴 때는 인사 수석실을 신설했다. 부실 검증 논란이 일 때마다 언제나 김 전 실장에게는 일종의 출구가 마련돼 있었다.  
 
당시 문창극 후보자의 낙마 시도에 친박 좌장인 서청원 의원이 가세하면서 청와대의 갈등설도 불거졌다. 하지만 김 전 실장의 조정력은 전혀 발휘되지 못했다.   
 
김 전 실장의 외아들 김성원씨가 2013년 12월31일 교통사고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중앙대 의대를 졸업한 인재로 재활의학 병원을 개원해 운영하던 시기에 발생한 사고였다.  
 
김 전 실장은 아들이 사고가 난 날 오후 5시에는 “대통령은 전혀 개각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긴급 브리핑을 하고 확산되는 개각 논란의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3일에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4 신년 인사회’에서 김한길 민주당 대표를 만나는 등 자리를 지켰다. 청와대 수석들도 그의 흔들림 없는 행보에 아들이 위중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박정희 시절부터 인연…지금도 무한신뢰
시민단체·여론은 여전히 “잘못된 인사”
 
김 실장은 모든 일과가 끝난 후 병원을 찾아 아들 옆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그의 잦은 병원 출입에 일각에서는 김 전 실장의 이상설 등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지난 1월9일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서 김 전 실장은 “개인적으로 자식이 병원에 누워 사경을 헤맨 지 1년이 넘었는데 자주 가지 못해 인간적으로 매우 아프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비선실세 의혹을 받았던 정윤회 논란이 일파만파 퍼졌다. 이 가운데 불길이 김 전 실장에게 옮겨붙었다. 사건의 핵심은 정씨와 청와대의 권력자들이 정기적으로 청와대와 정부의 동향을 논의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내용이 자신이 지휘하는 비서실에서 작성되 대량으로 유출됐다. <세계일보>에 따르면 박지만 EG그룹 회장은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명의의 문건이 대량 유출된 건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김 전 실장에게 제안했다. 더구나 지난해 1월6일 작성된 ‘정윤회씨 국정개입’ 보고서를 처음으로 보고 받은 뒤 당사자인 ‘문고리 3인방’ 등에게 사실이 아니라는 확인만 받고, 이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3∼4월과 6월에 내부 문서 유출 사실이 확인된 이후 최소한 4차례의 문서 회수 기회를 날려버리기도 했다. 다시 말해 알고도 이를 방치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정윤회와 박지만의 권력투쟁이 밖으로 드러날 경우 박근혜 대통령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에 무조건 덮어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당시 김 전 실장의 입장에서 치부가 드러나는 일은 막아야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정윤회와 박지만, 두 비선라인의 싸움을 통해 어부지리를 취하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검찰장악이라는 큰 명제를 해결한 김 전 실장은 두 비선라인한테 토사구팽을 당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런 견제를 막기 위해 김 전 실장은 오히려 내부 갈등을 키워 자신은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계획일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다. 무엇이 됐든 김 전 실장은 문고리 권력이라는 사실이 둘오넌 계기였다.
 
문건 공개 이후 벌어진 특별검찰 때 오모 행정관에 대한 강압조사 논란이 벌어지고, 한모 경위에 대한 청와대 회유 의혹이 불거진 것에 대한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김 전 실장에 대한 이런 비판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재신임’ 탓에 공허한 지적으로 막을 내리는 분위기였다. 
 
정윤회 후폭풍 
온몸으로 막어
 
실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월2일 김 실장의 시무식 발언을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하는 것으로 김 실장에 대한 자신의 재신임에 ‘쐐기’를 박은 바 있다. 
 
김 실장은 시무식에서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직원들에게 “국가원수를 모시면서 개인의 영달이나 이익을 위해 직위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충(忠)이 무엇인가? 중심(中心)이다. 중심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 이심(異心)을 품어서는 안 된다” 며 질책을 했다. 이더 “저도 분발하겠다”며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min1330@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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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