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물 만난 유승민 새누리당 새 원내대표

‘할 말 하는’ 화통한 대구 사나이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짤박’(짤린 친박) 유승민(57·대구 동을) 의원이 새누리당의 새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유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4선인 이주영 의원과 원내대표 자리를 놓고 경선을 펼친 결과, 투표 참여의원 149명 중 84표를 얻어 새 원내대표로 확정됐다. 

 
유 원내대표에게는 수많은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첫 번째는 ‘원박(원조박근혜)’이고, 두 번째는 ‘탈박(탈박근혜)’, 세 번째는 ‘경제정책통’이다. 거침없는 화법으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직언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그가 지난 2일 집권여당 원내사령탑에 올랐다. 15년간 수많은 정치적 부침을 겪다가 이룬 쾌거란 평가다.  유 원내대표는 당선 소감에서 “앞으로 고쳐나갈 것이 많을 것”이라며 “변화와 혁신을 얘기했는데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와 긴밀하게 진정한 소통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취임하자마자…
미스터 쓴소리
 
이어 “민심이 무엇인지, 무엇이 더 나은 대안인지 같이 고민하는 찹쌀떡 같은 공조를 이루겠다”며 “대신 대통령과 청와대 식구들, 장관들도 더 민심에 귀 기울여주고 당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함께 총선 승리를 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유 원내대표는 굴곡진 정치 역정을 걸어왔다. 그는 소신 있는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여당 인사다. 정치 무대 한가운데서 화려하게 활동을 하다가도 한순간 무대에서 사라져 버릴 정도로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있어서다. 
 
그는 1958년 대구 출생으로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등을 졸업하며,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만기 제대를 했다. 이후 1987년 위스콘신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까지. 전형적인 ‘TK(대구경북)’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특히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위스콘신대학교는 현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안종범 경제수석이 거친 것으로 유명하다.
 
1983년부터 4년간 위스콘신대 경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도 시장의 자율을 중시하는 신고전학파 학풍과 달리 정부 개입의 필요성 등 소신을 피력하고는 했다는 후문이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위스콘신대에서 유학(박사과정)한 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안 경제수석과는 상반된 경제철학을 가진 것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당·정·청의 경제정책 수뇌부가 위스콘신 출신이지만 결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실제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부동산 부양 등 거시정책을 과감하게 확장 운영해야 한다는 최 경제부총리, 안 경제수석과 달리 유 원내대표는 “국가와 시장만으로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며 소규모 공동체 중심의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적 경제론’을 펴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19대 국회로 3선 반열에는 올랐지만, 그의 정치 경륜은 생각만큼 길지 않다. 유 원내대표는 박사학위 취득 이후 1987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그의 젊음을 바쳤다. 이 당시 그는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해소 연구에 주력했으며, 우리나라 공정거래정책 연구에 초석을 놓은 사람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당선 직후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중장기적 ‘중부담 중복지’ 원칙을 제시하고 스스로 “외교·안보는 보수지만 복지·고용·노동 분야는 리버럴(진보)”이라고 밝힌 그의 철학이 이때 형성된 것이다.
 
전형적인 엘리트코스 TK 출신 

거침없는 화법으로 직언 날려 
 
그는 지난 2000년 초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1982년 초부터 KDI에서 15년여를 근무(미국 위스콘신대 박사와 UC샌디에이고 대학원 초빙교수 기간 제외)했다. 그는 IMF 구제금융 사태인 1997년 말 전에 ‘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연구를 내놓았다. 당시 그의 연구주제를 보면 대기업의 성장과 생산성, 민영화 정책, 무역과 산업 정책, 규제개선, 제조업의 기술적 효율성 등 다양하다. 
 
KDI에서 같이 근무했던 관계자는 “유 원내대표는 재벌이나 경제력 집중 연구도 많이 했으며 인간성이 따뜻하고 박사 중심 엘리트주의인 KDI에서 석사 연구원을 배려하는 등 젊은 연구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술회했다.
 
그와 함께 근무했던 이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시장경제와 어려운 사람에 대한 배려 등 공동체적 가치에 충실했던 학자”라며 “논리정연하고 글발 좋은 스타 박사였고 동료들과 후배들과 잘 어울렸다”고 기억했다. 다른 KDI 출신 관계자는 명문가(부친이 대구에서 13대(민정당), 14대(민자당) 의원을 역임한 유수호 전 의원) 출신이지만 잘난 척하지 않고 강남좌파 느낌이 좀 났다”고 전했다.
 
경제연구에 몰두
최경환과 각세워
 
이처럼 그는 주로 학계에 몸담고 있었다. 정치권에 발을 들인 것은 지난 2000년이다. 그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에게 당 부설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영민함과 정책 능력을 주류 정치권이 인정한 것이다. 이 전 총재의 경제 과외교사 역할을 하며, 2002년 대선에서 최측근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2002년 대선에서 패하면서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1년여 공백기를 거쳐 2004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뒤 사퇴 후 대구 동을에 출마해 지역구에 당선됐다.  
 
지금은 다소 소원해진 관계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역정에서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을 빼놓고는 설명이 어렵다. 무엇보다 초선 시절이던 2005년 흔들리던 한나라당에 박 대통령이 대표가 돼 원군을 자청했다. 유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이 당을 맡아 재건에 나설 당시 비서실장으로 2005년 1월부터 약 10개월간을 보필한 사람이다. 그해 유 원내대표는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선 정책메시지 단장을 맡아 박 대통령 캠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원조 친박’으로 분류됐다. 이 인연이 이어져 그는 2007년 이명박 당시 후보 측과 벌인 전대미문의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의 정책메시지 책사(정책메시지총괄단장)를 맡는 등 정치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
 
 
그는 당시 대선 후보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BBK 주가조작 사건’과 재산 은닉 의혹 등 이명박 당시 경선후보와 관련된 온갖 의혹들을 파헤치는 ‘이명박 저격수’ 역할을 했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이 내세운 대운하의 비현실성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국민이 가진 식수원 오염 가능성이나 환경파괴 우려에 대한 답이 안 됐다” 대운하를 비판했다. 이어 MB가 골재로 8조원을 충당하겠다는 것도 물량이 동시에 시장에 나오면 가격 폭락이 벌어지는 등 현실 가능성이 낮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굴곡진 정치 인생사…여권의 숨은 잠룡

청와대 공개 비판 “당청관계 변화 예고” 
 
사실상 ‘유승민’이라는 이름 석자가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다. 이때 유 원내대표는 활동 범위를 넓혀 이 후보 측의 강력한 네거티브 공세를 전면에서 방어하는 등 비로소 '정치인 유승민'으로 재탄생했다. 정가에서 그의 계파 성향을 원조 친박으로 분류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1차 칩거'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사안별로만 자기 목소리를 냈다. 특히 4대강 사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친박계의 수장이었던 박 대통령이 침묵으로 4대강 사업에 동조하는 상황에서 유 원내대표만 비판적 목소리를 계속 냈다.
 
2010년 8월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이 남한강 이포보에서 고공농성 당시 시민단체는 야당과 함께 한나라당도 참여하는 국회 차원의 4대강 검증을 요구했다. 이때 한나라당에서는 유일하게 유승민 원내대표만이 찬성 입장을 보내왔다. 이런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은 “한나라당 내에서는 드물게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그러던 중 2011년 개최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용감한 개혁’을 슬로건으로 친박계 주자로 나서 홍준표 대표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전면에 복귀, 화려하게 지도부에 입성했다.
 
이후 ‘유승민표’ 정책을 차근차근 내놨고, 이듬해 대선에서 박 대통령은 그의 복지·분배 정책을 차용했다. 그러나 유 원내대표는 만족하지 않았다. 2012년 총선 직전 박 대통령이 주도한 당명 개정에 가장 강력히 반대했고, ‘충성심과 약속’으로만 똘똘 뭉친 친박의 테두리 안에 자신을 가둬두지 않았다. 
 

한때 친박계 선봉
지금은 짤박 신세
 
그는 비록 원조 친박이지만 소신이 뚜렷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스타일로 박 대통령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다. 복지와 분재 강화라는 여권 내에서는 파격적인 개혁 정책들을 피력하면서 점차 친박 주류와 거리가 멀어졌다. 
 
박 대통령도 최근에는 그를 중용하지 않는다. 이후 비판적인 발언이 주목을 받으면서 현재 ‘탈박’으로 분류될 정도로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평가다.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박 대통령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박 전 위원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도울 기회는 없을 것”이라는 등의 비판적 목소리를 낸 것도 비슷한 시기다. 또한 그는 사석에서 가끔 이때를 회상하며 “최측근이었지만, 직언을 마다치 않았다”고 말하곤 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광도 잠시, 2012년 최구식 의원 측 비서가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해 디도스 공격을 벌였던 것이 알려졌고, 급기야 5개월 만에 지도부 책임론에 밀려 총사퇴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더욱, 그는 ‘원조 친박’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이어 들어선 박 대통령의 비대위 체제에서 배제되면서 결국 세력권과 멀어졌다. 
 
 
이후 '2차 칩거'에 들어갔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였다. 그는 독특한 색깔의 ‘탈박’이고자 했다. 비박(비박근혜) 성향이 강한 수도권 초·재선 의원들을 규합해 지지그룹을 형성했다는 말도 나왔다. 지난해 7월 전대에선 김무성 대표가 아닌 친박 좌장 서청원 최고위원을 지원하는 파격도 선보였다. 
 
유 원내대표는 이제 새로운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누군가의 참모’ 이미지를 벗고 ‘자기 정치’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정치권은 벌써부터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당·청 관계는 물론 여당 전반의 폭넓은 개혁을 선도할 것이란 기대다. 
 
지난해 10월에는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청와대 얼라들’이라며 청와대 비서실 인사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 뒤 청와대 문건 유출사건으로 ‘문고리 3인방’, ‘십상시’등이 회자되면서 그날의 발언이 다시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른바 ‘K·Y설’로 정윤회씨 문건 유출 배후로 김무성 대표와 함께 거론돼 주목받기도 했다.
 
지난해 9월 ‘거리의 인문학자’로 알려진 최준영 작가가 여·야 대권주자에 대해 짧은 평이 회자가 됐다. 그는 유 원내대표를 “아직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여권의 히든카드”라고 평가했다. 유 원내대표에 대한 이런 우호적인 평가는 입때껏 그가 보여준 상식에 맞는 행보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이후 원내대표로서 어떤 행보를 할지,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이다. 한편 유 원내대표의 등장은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여전히 전략 등의 부재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야당의 심각한 위기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정기국회 때까지 ‘증세’냐 ‘복지 축소’냐의 결론을 내겠다는 유 원내대표는 그동안 부동산 부양 등 ‘초이노믹스’에 대해 “돈만 날릴 뿐”이라고 비판했다. 김세연·이종훈·민현주 의원 등 당내 경제민주화실천모임 회원들이 이번에 그를 집중 지원한 것도 그의 이 같은 철학 때문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유 원내대표가 국책 싱크탱크에서 정책제언을 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야당에서도 서민 이슈를 선점당할까 봐 경계하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19대 총선 때 KDI 연구원 시절 작성한 논문의 중복게재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 후보의 과도한 흠집내기란 평가가 우세했다. 
 
유 원내대표는 17대 국회부터 지금까지 총 26건의 법안 발의를 했다. 경제정책통 정치인에겐 다소 적은 개수다. 전문분야인 경제와 동떨어진 국방위원회에서 간사와 위원장을 역임했다. 최근 인권교육지원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부수단체의 반발에 못 이겨 철회해 아쉬움을 남겼다. 
 
새누리당 텃밭 대구에 지역구를 두고있을 뿐 아니라 대구 지역을 넘어 TK 맹주로 떠올랐다. 이 지역 의원들의 공천과 당선에 영향력을 미칠 전망이다. 친이, 친박 이후 뚜렷한 계파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 가운데 이른바 ‘유승민계’를 형성해 독자 세력 가능성을 보여준다. 청와대의 관계에 의문부호가 따라붙은 후 김무성 당 대표와 갈등 관계를 해소해 당내 기반을 강화했다.  향후 김 대표와 관계를 어떻게 풀어낼지 관건이다.
 
파격적인 정책들
독자세력 가능성
 
화통한 대구 사나임은 틀림없다. 이번 원내대표 선거에서 가장 약점으로 지적된 것이 동료 의원들과 친화력이다. 대중적인 이미지 또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감 요소가 부족하다는 평가다.
 
재산규모는 2013년 말 기준으로 30억6400만원, 지역구인 대구뿐 아니라 서울 강남과 경기도 분당 일대에 약 14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min1330@ilyosisa.co.kr>
 
  
[유승민은?]
 
▲1958년 대구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 위스콘신대 경제학박사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공정거래위원장 자문관 ▲한나라당 여의도 연구소장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 ▲한나라당 박근혜 선거대책위 정책메시지 총괄단장 ▲국회 국방위원회 간사, 2012년 국회 국방위원장 ▲17·18·19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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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