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⑤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해외로 튀어 8년째 감감무소식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항상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무려 40조원에 달했다. <일요시사>는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을 토대로 체납액 5억원 이상(법인은 10억원 이상)의 체납자를 추적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5화는 28억5100만원을 체납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하 정태수)은 1997년 1월부터 주민세 등 78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서울시가 징수할 체납액은 28억5100만원이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정태수는 1992년부터 증여세 등 73건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누적된 체납액은 무려 2225억2700만원이다.

합쳐서 3000억

정태수는 국세청이 매년 공개하는 고액 체납자 명단 맨 꼭대기에 10년째(2004∼2013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주요 일간지들은 매년 12월만 되면 "정태수가 2000억원을 체납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정태수가 실제로 체납한 세금은 3000억원이 넘는다.

정태수의 차남 정원근(46)씨는 1997년부터 종합소득세 등 모두 40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국세청이 징세할 체납액은 35억6800만원이다. 3남 정보근(44)씨는 1997년부터 증여세 등 모두 13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체납액은 644억6700만원이다. 4남 정한근(42)씨도 1997년부터 증여세 등 15건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한근씨가 체납한 세금은 293억8800만원이다.

정태수 일가가 떼먹은 세금은 국세청 기준으로만 3199억5000만원에 이르렀다. 여기에 배다른 자식인 장남 정종근(60)씨가 체납한 세금,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가 거둬갈 세금까지 더하면 실제 체납액은 3300억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를 징세할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정태수는 해외로 도피한 뒤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보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는 "정태수가 해외자원개발로 재기를 노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정태수의 나이는 올해로 91살이다. 정태수를 실제로 만났다는 사람은 키르기스스탄에 있었다. 그와 접촉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정태수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다.

정태수는 2006년 그가 설립한 강릉영동대학교의 교비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정태수는 항소심 재판 중 치료를 핑계로 해외로 출국했다. 우리 사법당국은 정태수의 도피를 눈뜨고 지켜봤다. 정태수는 2007년 일본을 경유해 카자흐스탄으로 날아갔다.

정태수의 카자흐스탄행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는 2005년부터 "해외유전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언론에 떠벌렸다.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HB관리'라는 곳이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유전개발 제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HB관리는 경비인력 10명을 관리했던 회사로 자원개발과는 아무 상관없는 용역업체였다. 월급 총액은 800만원가량이 지급됐는데 이런 회사에 강릉영동대는 용역비로 매달 3000만원을 몰아줬다. 남은 2200만원은 정태수의 용돈과 다름없었다.

이 무렵 정태수는 수행 비서를 두고 벤츠를 몰았다. 도피 전까지 서울 가회동 저택(2층 건물)에 살며 월세로만 4억8000만원을 지불했다. 출국금지가 돼 있었지만 미국·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도 오갔다고 한다. 그런데도 과세당국은 손 놓고 있었다. 정태수 앞에 법은 무기력했다.

일가 체납액 3300억…소재 파악 안돼
영동대 잇단 불법에도 국고 환수 못해

정태수는 2003∼2005년까지 강릉영동대에서 모두 72억원을 횡령했다. 빼다 쓴 20억원은 회사 운영비로 탕진했다. 10억원은 소송비와 생활비로 남용했다. 강릉영동대 운영법인인 정수학원은 정태수 일가의 사유재산이다. 하지만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 일가가 소유한 만강학원처럼 이를 강제환수할 법적 근거는 없다. 오히려 장남 종근씨는 2012년 현모 당시 이사장을 상대로 "학교 운영권을 내놓으라"며 강릉영동대에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다.

정태수는 해외로 도피하면서 자신의 간호업무를 위해 간호사를 4명이나 고용했다. 강릉영동대는 이들을 교직원으로 허위 채용해 급여를 지급했다. 이를 주도한 셋째 며느리 김정윤씨는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을 확정판결 받았다. 당시 김씨는 남편 보근씨의 수행비서에게 2180만원의 급여를 교비로 지급했다. 카자흐스탄으로 간 시아버지(정태수)에게도 2920만원을 불법 송금했다. 또 김씨는 교비 6630만원을 사적으로 유용했고, 보근씨에게도 4400만원을 건넸다.


2013년 3월 보근씨는 대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최근 보근씨는 부동산 개발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밀린 세금을 냈다는 얘기는 지금껏 들리지 않는다. 서울시를 상대로 "땅을 갖게 해달라"며 소송을 벌였다는 소식만 확인된다.

서울 송파구 장지동 일대 3만2000여㎡(약 9700평) 개발 부지를 놓고 정태수 일가는 2012년 환매권을 행사하려 했다. 환매권이 행사되면 시가 1000억원으로 평가받는 땅을 '단돈' 200억원에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법원은 "환매대금을 정해진 납부기한 내에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국세청과 서울시는 장지동 땅을 동시에 압류했다.

정태수 일가의 숨겨진 재산은 장지동 땅만이 아니었다. 서울시가 강제등기한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 땅 2000여㎡는 감정가 394억원으로 올 6월 공매에 나왔다가 유찰됐다. 1978년 31평형 매입가가 2000만원이었던 은마아파트는 현재 시세가 8억∼10억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강남 개발로 정태수가 챙긴 이득은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정확히 가늠되지 않고 있다.

인천, 경기도 용인, 안산, 충남 당진 등 그동안 언론이 확인한 땅만 10만평이 넘었다. 정태수가 부동산 개발을 염두에 두고 매입했던 땅들이다. 2005년 법원경매 기록에 등장한 용인 땅 가운데는 용도가 학교부지였던 곳도 있었다. 학교 운영을 핑계로 땅장사를 하려했던 정태수 일가의 민낯이 드러난 셈이다.

그들은 해외로도 돈을 숨겼다. 러시아 천연가스전 개발사업권을 매각한 뒤 남은 돈을 차명으로 스위스 은행에 예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를 도와 자원개발에 참여했던 4남 한근씨는 전체 매각 대금(5790만 달러) 가운데 3270만달러(한화 323억여원)를 페이퍼컴퍼니를 경유해 빼돌렸다. 한근씨는 미국 등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소재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막대한 부동산

정태수는 지난 2008년께 한국에서 범죄인 인도요청이 이뤄지자 옆 나라인 키르기스스탄으로 도주했다. 현지 고려인의 도움을 받아 '정수'라는 유한회사를 설립한 것이 서류상 확인되는 마지막 행보다. 도피 중에도 정태수는 한국으로 팩스를 보내 강릉영동대 소유권을 주장하는 등 변함없는 '노욕'을 부렸다. 차남 종근씨가 키르기스스탄 광산 사업을 돕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이 또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태수 일가의 해외도피를 방관한 당국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angeli@ilyosisa.co.kr>

 

[한보그룹은?]

▲1974년 한보상사 설립
▲1979년 은마아파트 분양, 한보종합건설(초석건설) 인수
▲1984년 금호철강(한보철강) 인수
▲1991년 수서비리 사태
▲1995년 당진 제철소 건립 추진
▲1997년 그룹부도 및 한보사태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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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