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부양책’ 서민은 안중에 없었다

9·1대책 대해부

정부가 또 추가 대책을 발표했다. 이번에 내놓은 9·1 부동산 대책의 핵심은 ‘재건축 규제 완화’다. 주택 재건축이 가능한 연한의 상한선(40년→30년)이 낮아졌고, 주거환경이 나빠도 재건축이 가능하도록 안전진단 기준을 완화했다. 하지만 이로 인한 혜택은 재건축 단지가 집중된 강남과 목동 등 일부 지역에 국한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구조적으로 문제가 없는 건물을 다시 짓는 것을 허용하면서 불필요한 자원낭비가 커질 것이란 지적이 많다.

 

주택 재건축 연한 40년→30년 완화
강남 목동 등 일부 지역 국한 전망

국토교통부는 지난 1일 ‘주택시장 활력회복 및 서민 주거안정 강화방안’을 발표했다. 이 대책에는 서민 주거안정을 강화하기 위해 임대주택 단기공급을 확대하고, 임대시장에 민간 참여를 유도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임대 8만 공급 

우선 국토부는 가을 이사철에 맞춰 이번달과 다음달 중 매입·전세 임대주택 1만2000가구를 공급한다. 9월 이후 입주예정인 공공건설주택 2만5000가구 중 6000가구 가량은 입주시기를 1∼2개월 앞당길 방침이다. 미분양 주택은 전세주택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대출보증 지원도 강화한다. 업체별 건설자금 대환대출 보증한도를 기존 1000억∼4000억원에서 2000억∼5000억원으로 늘린다. 미분양 리츠를 통해서도 임대주택을 계속 공급한다.
임대시장에 민간 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도 마련됐다. 공공임대 리츠와 함께 민간제안 리츠, 수급조절 리츠를 통해 2017년까지 8만가구를 공급하겠다는 방침이다. 우선 공공임대주택 리츠를 통해 올해부터 2017년까지 10년 장기임대 주택 착공 물량을 기존 2만6000가구에서 5만가구까지 확대한다. 민간이 제안한 임대주택 사업에도 기금이 심사를 통해 선별 투자한다. 2017년까지 2만가구를 공급하고 올해 최대 2000가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수급조절 리츠는 매각할 공공택지 중 공급과잉 우려가 있는 지역 택지를 리츠로 임대사업하는 방식이다. 수급조절위원회가 대상지역, 임대조건, 분양전환시기 등을 결정한다.
주택기금 출자하고, LH가 출자를 하거나 매입확약을 통해 신용보강에 나선다. 임대주택리츠에 일반 국민이 개인 투자할 수 있도록 공공임대리츠 3호에 500억원 규모 전담 자산유동화증권(Prime ABS) 공모를 추진한다. 이와 함께 공공기관이 50% 이상 출자하는 임대주택 리츠가 주택을 취득하는 취득세·재산세를 감면한다. 내년 말 감면 종료하려던 것을 유지한다. 리츠가 임대주택 용으로 집을 매입할 때 60㎡ 이하 주택은 취득세가 면제되고 60∼85㎡는 30% 감면된다. 재산세는 60㎡ 이하가 50% 감면, 60∼85㎡는 25% 감면된다.
준공공임대 기금 지원대상 범위를 넓혀 민간 임대사업자 육성에도 나선다. 기존에는 신규 분양주택을 매입해 준공공 임대주택으로 등록하면 최대 5가구까지만 기금대출(연이자 2.7%, 수도권 1억원·지방 7000만원 한도)을 허용했다. 앞으로는 10가구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무주택 서민이 다수 거주 중인 다가구주택도 준공공임대로 등록할 수 있도록 면적제한(85㎡ 이하)을 폐지한다. 다가구주택 대부분이 85㎡를 초과하는 점을 고려했다. 다가구주택을 준공공 임대주택으로 등록하면 세제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정부는 우선 85㎡ 이하 민영주택에 대한 가점제를 오는 2017년 1월부터 지자체장(시군구청장)이 현행 가점제 비율 40% 이내에서 자율 운영토록 할 계획이다. 현재 민영주택 중 85㎡ 초과는 100% 추첨제이나, 85㎡ 이하는 40% 가점제를 적용하고 있다. 지역별로 상이한 수급 상황을 반영할 수 있도록 지자체의 자율권을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청약가점제도 손본다. 무주택자에게 가점(최대 32점)을 부여하는 점을 감안해, 2주택 이상 보유자에 대한 중복 차별(1가구당 5∼10점 감점)을 폐지한다. 청약가점제는 민영주택 공급 시 동일 순위 내(1, 2순위) 경쟁이 있을 경우 무주택기간(32점), 부양가족수(35점), 입주자저축 가입기간(17점) 등을 점수화해 다득점자(85점 만점)에게 공급하는 제도다.

청약제도 개편


또 청약시 무주택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소형·저가주택 기준을 전용 60㎡ 이하·공시가격 7000만원 이하에서 전용 60㎡ 이하·공시가격 1억3000만원(지방은 8000만원) 이하로 완화했다. 무주택 세대주로 제한하고 있는 국민주택 청약자격을 완화해 세대주 여부와 관계없이 1가구 1주택인 경우 청약을 허용한다. 여기에 1, 2순위로 나누어져 있는 청약자격을 1순위로 통합하고, 국민주택에 적용하는 6개 순차를 2개 순차로 통합해 입주자 선정절차를 단순화된다. 청약예금 예치금 칸막이도 줄어든다.

택지개발 제한

예치금액 이하의 주택은 자유롭게 청약이 가능하고, 예치금 변경 시 청약규모 변경도 즉시 가능하도록 개선한다. 청약저축·청약부금·청약예금·청약종합저축 등 4종류로 나뉘어 있는 청약통장은 ‘주택청약종합저축’으로 통합된다. 지난 2009년 청약종합저축이 출시돼 민간과 공공 주택 중 청약 물량을 선택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청약 예금 등 다른 상품들이 존재해 혼란이 가중됐다. 공급주택 유형을 기존 국민주택, 민간건설중형국민주택, 민영주택 3개에서 민간건설중형국민주택을 폐지해 2개로 통합된다.
정부가 주택 공급량 조절에 나선다. 대규모 택지 개발 관련법을 폐지하고 대규모 공공택지도 3년간 지정하지 않는다. 이와 함께 건설사 착공 의무기간은 5년으로 연장하고 민간 택지 공급시기도 조절해 시장 전반에 중장기적으로 공급을 줄일 방침이다.

세입자 융자 완화

국토교통부는 택지개발촉진법을 폐지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3년간 대규모 공공택지를 지정하지 않는 내용의 주택 공급방식 개편안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으로 택지개발촉진법은 폐지된다. 도시 외곽지역 신규 대규모 택지개발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이 법안을 폐지하고 공공주택법과 도시개발법을 통해 중소형 택지개발을 유도한다는 목적이다.
이와 함께 LH는 2017년까지 3년간 대규모 공공택지 지정을 중단한다. 올 1월 기준 LH 보유택지는 124만가구 규모다. 주택법에서 규정하는 사업 계획 승인 이후 착공 의무기간은 3년에서 5년으로 연장된다. 기존에는 사업계획승인 이후 3년 내 착공하게 하고 소유권 분쟁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연장이 가능했다. 앞으로는 기존 사업승인 물량을 포함해 모두 3년에서 5년으로 연장된다.
LH 분양물량 중 일부는 후분양 시범사업을 시행한다. 후분양은 시공 후 분양하는 것이다. 올해 2개 지구 2000가구를 시범사업지로 선정해 공정률 40%에 이르면 후분양을 실시한다. 내년에는 3개 지구 3000세대를 선정해 공정률 60%에 이르면 후분양을 실시한다. 이 시범사업 결과를 평가해 LH 후분양 확대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LH 토지은행을 통해 민간 택지 공급시기도 조절한다는 방침이다. 수도권에서 2조원(2만가구 내외) 규모 택지를 비축하고 시장 상황에 따라 매각시기를 조정하게 된다.

재건축 기준 완화

 

서민 주거비를 줄이기 위해 집값이 대출금보다 낮아져도 집값 내에서만 대출금을 상환하도록 유한책임대출 제도를 도입하고 디딤돌 대출 금리도 낮춘다. 최근 전세가격이 올라 전세금 반환보증 한도도 증액하고, 공공임대주택 거주자가 보증금을 높여 월세를 줄일 수 있는 한도도 커진다. 9·1부동산대책엔 무주택 서민 주거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방법도 포함해 발표했다.
주택기금 유한책임 대출 도입과 디딤돌 대출 금리 인하, 디딤돌 대출 주택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무주택 서민이 주택기금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면 유한책임대출 제도를 시범적으로 적용한다. 집값이 하락해도 해당 담보 주택만으로 상환의무를 제한하는 것이다. 집값이 대출금보다 낮아져도 해당 집값까지만 상환하면 된다.
대출자의 다른 자산에는 압류 등 행위를 실행할 수 없게 된다. 주택기금 대출은 내집마련 디딤돌 대출, 수익공유형 모기지, 손익공유형 모기지 등이 있다. 디딤돌 대출 금리도 인하된다. 시중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계속해서 낮아져(6월 기준 3.58%) 일부 구간은 이미 디딤돌 대출 금리가 더 높아진 곳이 있다. 이에 따라 기존 디딤돌 대출금리 2.8∼3.6%를 0.2%P 낮추도록 했다.
청약저축에 2년 이상 가입했을 경우 0.1%P, 4년 이상은 0.2%P 금리를 낮춘다. 디딤돌 대출 LTV·DTI도 조정된다. 현재 디딤돌 대출은 DTI 40% 내에서 LTV 70%까지, DTI 40∼100%는 LTV 60%를 적용했다. 앞으로는 DTI 60% 이하일 경우 LTV는 70%까지 완화된다. 다만 DTI 60∼80%는 LTV 60%를 2년간 적용한다.
LH 임대주택 거주자는 전월세간 전환이 쉽도록 보증금 전환 상한선(50%)을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완화한다. 보증금 2000만원, 월세 20만원 임대주택은 보증금을 4000만원으로 늘리면 월세를 10만원까지 낮출 수 있었다. 공공임대 보증금은 LH 부채로 잡힌다. 보증금이 늘면 LH 부채 비율이 증가해 전환 상한선을 50%로 제한했다. 상한선을 정해두지 않으면 공공임대주택 월세 수익이 줄어 주택기금에 납부해야 할 원리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불필요한 자원낭비 커질 것”지적

 

재건축 연한이 최장 30년으로 완화된다. 현재 최장 40년으로 정해진 서울시 재건축 연한은 30년으로 10년 단축된다. 재건축 연한 완화로 재건축 대상 아파트도 대폭 늘어나게 된다. 서울에서 재건축 대상이 될 1987년부터 1991년에 준공된 아파트는 24만8000가구에 이른다. 강남3구의 재건축 대상아파트도 3만7000가구로 늘어나게 된다. 서울 이외 지역도 21만1000가구가 새로 재건축 대상 아파트에 포함된다.
당초 국토부는 재건축 연한 완하에 소극적이었다. 연한이 넘었어도 사업성이 없어 사업이 지지부진한 곳이 많아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가 점차 살아나고 있고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재건축이 속속 진행되면서 방향을 튼 것으로 보인다. 또 재건축 연한 도래 후 구조안전에 큰 문제가 없더라도 생활에 불편이 크면 주거환경 평가비중을 강화(15%→40%)해 재건축이 가능하도록 기준을 재정비했다.
연한 도래와 관계없이 구조적 결함이 있는 경우에는 구조 안전성 사유만으로 재건축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주차장, 배관 외에도 층간소음, 에너지효율, 노약자 생활개선 등도 반영된다. 안전진단 기준완화는 재건축 연한을 충족해도 안전진단을 통과해야 재건축이 가능한데, 실제로 안전진단 통과가 쉽지 않았던 중층단지에겐 호재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층아파트의 경우 재건축 연한은 충족하지만 구조가 튼튼해서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한 단지들이 다수 존재했다.
재건축 주택건설 규모 제한도 완화된다. 현재 수도권 과밀억제권역 내 재건축 시 85㎡ 이하 주택을 가구수 기준 60% 이상과 전체 연면적 대비 50% 이상 건설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 규제는 각 조합이 초소형 주택을 대거 분양해 분양 가구수를 늘리기 위한 편법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이번에 정부는 가구수 기준은 유지하되 면적 제한은 완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키로 했다.

기부채납 요구 제동 

재건축·재개발 등 주택 재정비사업의 공공관리제도는 사실상 폐지 수순을 밟는다. 공공관리제는 지자체가 재건축·재개발 사업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조합에 전문가를 보내 사업을 관리하고 사업 추진비를 대출하는 제도다. 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조합장 선거까지 관리한다. 시공사들이 조합장과 결탁해 조합원 분담금이나 일반분양가를 올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울시가 2010년 조례를 통해 의무화했다.
정부는 주택사업시 지자체의 과도한 부담 요구를 합리적으로 제한할 예정이다. 우선 기부채납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기부채납 관련 지침을 마련할 예정이다. 재정비 등 주택사업 추진시 지자체가 과도하게 기부채납을 요구하고 용적률 인센티브 기준은 없어 사업추진에 장애가 돼 왔다. 해당 지침에는 지자체장이 기부채납을 요구할 수 있는 적정한도(총사업비의 일정비율 이내로 제한) 등을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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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