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개편’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노림수

대단한 결단…알고 보면 오너 배불리기

[일요시사=경제2팀] 박효선 기자 = 한라그룹 지주회사 체제 전환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주)한라(구 한라건설)리스크로부터 자동차 부품기업 만도를 분리해 대주주 지배체제 강화에 총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의 기업분할을 놓고 만도의 현금으로 또 다시 한라의 부실을 메우기 위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겉으로는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내겠다는 명분이지만 사실상 정 회장 일가의 그룹 내 장악력 강화를 위한 수단이 아니냐는 해석이 조심스레 회자된다. 

자동차 부품기업 만도가 분할된다. 오는 10월 만도는 새롭게 출범해 재상장된다. 만도는 지난달 28일 경기 평택 본사에서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지주회사 한라홀딩스와 사업회사 만도로 분할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한라홀딩스 중심
지배구조 개편

이 날 만도 전체 주주의 66%가 참석했다. 안건은 2대 주주인 국민연금(12.95%)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변 없이 통과됐다. 기업분할이 완료되면 한라그룹은 지주회사 체제로 남게 된다.

이날 신사현 만도 대표는 주총에서 사업 분할에 대해 “지주회사 체제 도입을 통해 부실 계열사에 대한 지원을 차단하는 등 경영 투명성을 높이고 순환출자 문제도 해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도의 분할기일은 9월1일이다. 자산분할 비율은 0.48대 0.52로 기업 분할 절차가 완료되면 기존 만도주주들은 한라홀딩스 주식 0.48주, 제조회사인 만도 주식 0.52주씩 각각 보유하게 된다. 새롭게 출범하는 만도는 오는 10월6일 거래소에 재상장된다. 따라서 만도 주식은 오는 28일부터 10월5일까지 거래 정지된다. 이에 따라 한라그룹은 지주사 한라홀딩스를 중심으로 지배구조가 개편될 전망이다.


만도 분리 등 한라홀딩스 중심 지배구조 정비
부실 메우기 꼼수? 줄줄이 ‘도미노 부실’우려

현재까지는 (주)한라가 만도 지분 17.29%를, 만도가 한라마이스터 지분 100%, 한라마이스터는 (주)한라를 15.86% 보유하고 있다. 즉 한라그룹은 ‘(주)한라→만도→한라마이스터→(주)한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다.

기업은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 계열사들끼리 돌려가며 자본을 늘릴 수 있다. 계열사끼리 출자해 자본금과 계열사 수를 늘리는 방식이다. 재벌들이 계열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동원하는 변칙적인 출자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중 한 계열사가 부실해지면 출자한 다른 계열사까지 부실해지는 부실의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현행상법과 공정거래법에서는 계열사 간의 출자, 즉 상호 출자를 금지하고 있는데 순환출자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순환출자 규모나 내용을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라그룹 역시 순환출자를 통해 흑자경영을 해온 만도의 돈으로 한라를 살려내고 있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리스크 때문에 기업 분할을 통해 만도와 (주)한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겠다는 게 한라그룹의 명분이다.

분할 재상장해
한라 간접지원?

우선 만도차이나홀딩스, 만도브로제, 만도신소재 등은 만도의 자회사로 남는다. 한라마이스터, 만도헬라, 한라스택폴 등은 한라홀딩스 자회사로 재편된다. 지주사 한라홀딩스는 핵심 사업에 집중 투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한라홀딩스가 건설사 (주)한라의 모회사격인 한라마이스터를 지배하는 지주사 체제로 전환되면 만도와 (주)한라의 연결고리는 끊어지게 된다. 이를 통해 만도 독자 경영의 안정성을 높이겠다는 것이 한라그룹의 주장이다.

하지만 만도의 분할은 (주)한라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주)한라는 여전히 실적부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주)한라는 4281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올해 상환해야 할 단기차입금만 약 3300억원이다.

만도의 주주인 국민연금이 만도 주총에서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만도의 지분 13.41%를 보유한 2대 주주다. 국민연금은 만도를 지주회사인 한라홀딩스와 사업회사인 만도로 분리하는 내용의 기업분할 계획에 대해 반대의결권을 행사했다.

국민연금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는“(한라그룹) 사업 분할 목적이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지주회사의 전환이라고 하지만 그간 유상증자로 현금소진이 높은 상황에서 회사채 발행으로 조성한 자금을 사업 분할에 활용하는 것은 주주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만도의 장기 기업 가치와 주주권익을 훼손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아직 공시된 게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할 전 157%인 만도의 부채비율은 분할 뒤 250% 이상으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금자산은 500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줄고, 1조235억원에 이르는 이익잉여금도 모두 사라질 전망이다. 빚만 늘어나고 통장잔고는 텅텅 비게 되는 셈이다.

반대로 한라홀딩스는 4500억원의 현금자산과 1조원이 넘는 이익잉여금을 넘겨받았다. 앞으로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재원을 확보한 것이다. 또 주요 자회사인 만도헬라가 한라홀딩스 소속으로 결정된 것도 만도에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만도 분할을 두고 전문가들의 평가도 부정적이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분할을 통해 만들어지는 순수 지주회사는 사업회사보다 기업가치가 작기 때문에 대주주의 지분확보가 쉽고 상속이나 증여 측면에서도 유리할 수 있다”며 “이 과정에서 기존 주주들이 변경된 지배구조로 인해 좋은 실적을 거둘 수 있는 사업 부문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제한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순환출자를 끊기 위해선 합병, 주식교환 등을 거쳐야 한다”며 “한라와 한라홀딩스가 합병을 한다 해도 건설부문의 부진을 만도가 계속 메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정몽원 회장
그룹 장악력

한라에 대한 지원책이 나올 때마다 재계가 시끄러운 것은 정몽원 회장의 지분 때문이다. 정 회장의 개인 지분이 한라에 몰려 있다. 정 회장의 한라 지분은 23.58%다. 분할 후 만도와 건설사 한라는 분리되지만 지분율은 변동되지 않는다. 만도의 최대주주인 정 회장의 지분비율 7.71%는 한라홀딩스와 만도에서 동일하게 7.71%를 유지하게 된다.

이에 따라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정 회장이 한라홀딩스를 통해 만도까지 지배하는 구조를 만들 것이라는 추측이 회자되고 있다. 정 회장이 지주사에 대한 지배력을 더 확보해 한라홀딩스의 보유현금으로 한라 자사주를 매입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렇게 되면 한라홀딩스의 영향력은 만도와 한라에 모두 미친다.즉, 분할 이후에도 '한라-한라홀딩스-마이스터-한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는 남게 되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사실상 신설법인 만도의 대주주 또한 여전히 한라다.

한라그룹은 한라홀딩스와 한라 합병 가능성에 대해 “우려에 불과하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이번 분할로 지주회사를 통해 과거처럼 만도의 돈이 한라에게 넘어가는 게 아니냐는 시각에 한라그룹 관계자는 “만도나 한라홀딩스를 통해 한라를 지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우려일 뿐, 실제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한라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으로 부실계열사인 (주)한라에 대한 추가 지원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관계자는 “이번 분할로 순환출자 구조는 끊어지게 된다”며 “만도 부채비율이나 현금자산의 경우 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하게 얼마나 어떻게 나올지는 공시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합병의 가장 큰 수혜자는 한라 대주주인 정몽원 회장이 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주주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분할 재상장이 만도 경쟁력 강화가 아닌 대주주의 경영권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쓰일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소액주주들은 지분율이 희석되고 분할 재상장 이후 분리된 두 기업의 주가가 동반상승하지 못하면 기존 주주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주주가치 훼손
투자자들 우려

소액주주들의 원성은 지난4월부터 이어졌다. 정몽원 회장이 만도의 지주회사 전환체제를 발표하면서부터다.

만도는 꾸준히 성장해 재작년부터 매출 3조원을 넘는 등 흑자경영을 해온 업체다. 반면 한라는 부동산 경기침체로 몇 년째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로 한라그룹은 지배구조 핵심인 (주)한라가 유동성 위기를 겪자 만도와 자회사 한라마이스터를 이용해 두 차례에 걸쳐 자금을 지원했다. 건설경기 불황으로 적자의 늪에 허덕이는 한라를 지원하기 위해 만도가 100% 지분을 보유한 자회사 한라마이스터를 통해 한라의 유상증자에 참여해 우회 지원한 것이다. 
 

한라는 2012년 1월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730억원 규모의 주식을 발행했다. 이 중 200억원어치를 만도의 자회사 한라마이스터에 팔았다. 이어 지난해 4월에도 3385억원 규모의 주식을 발행해 한라마이스터에 팔았다. 만도가 한라마이스터의 유상증자에 돈을 대고, 이 자금을 다시 한라건설의 증자에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동안 만도의 돈이 꾸준히 한라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만도 자회사를 통해 만도의 돈으로 한라를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상법 제549조의 9에 따르면 상장회사는 주요주주 및 그의 특수관계인, 이사 및 업무관여자, 감사를 상대방으로 하거나 그를 위해 신용을 공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만도의 최대주주는 17.29%의 지분을 보유한 한라다. 이에 경제분야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는 정 회장을 비롯해 경영진을 상법의 신용공여 금지위반으로 고발한 바 있다.

겉으론 순환출자 고리 정리 내세워
실제론 오너일가 장악력 강화 분석

주주총회 다음날 증시에서 만도 주가는 뚝 떨어졌다. 만도의 주가가 폭락한 것은 분할 후 만도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이투자증권 한 연구원은 "대주주 한라 리스크 등 잇단 악재로 만도 주주들은 매우 지쳐있는 상태"라며 "회사에 대한 신뢰도 부족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당일 투자자들의 불안감은 최고조로 치솟았다. 만도 투자자는 “정몽원 회장이 만도의 돈을 한라건설로 빼돌리기 위해 서둘러 지주회사로 전환한 모습”이라며 “정 회장은 만도를 챙기고 한라를 버려야지 덩치만 키우려고 내실과 주주이익을 외면했다”고 비판했다. 분할 후 만도가 한라의 건설 실적 부진을 커버하는 지원이 다른 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다.
 

현재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분할 전 보유한 만도주식을 팔겠다는 분위기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한라홀딩스 가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만도 소액주주는 “만도가 재상장하게 되면 만도 주식은 오를지 모르겠지만 한라홀딩스는 하락할 것”이라며 “만도만 보유하고 싶은데 분할 후 재상장으로 한라홀딩스까지 떠안게 됐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분할의 혜택이 소액주주가 아닌 대주주 한라에만 있을 수 있다는 부연이다.

하지만 한라그룹은 만도의 가치는 현재보다 더 올라갈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곳 관계자는 (한라홀딩스와 만도는) 주식 수로 보면 48대 52로 나뉘는데 분할되는 회사가 각각 다를 수 있지만 가치로 따지면 현재보다 올라가게 될 것”이라며 “하나는 오르고 하나는 적게 떨어지더라도 전체적 가치는 더 커질 전망”이라고 제시했다.

 

<dklo216@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현대백화점, 위니아만도 인수
삼촌기업 조카가 품는다

현대백화점이 김치냉장고 ‘딤채’로 유명한 위니아만도를 인수한다. 최근 동양매직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셨던 현대백화점은 위니아만도 인수로 그동안 추진해 왔던 가전제조업 진출의 꿈을 이뤘다. 

현대백화점은 지난7일 글로벌 사모펀드 시티벤처캐피털파트너스(이하 CVC파트너스)와 위니아만도 지분 100%를 매입하는 내용의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양사는 계약 금액 등 세부 조건에 대한 합의를 마무리하고 조만간 실사를 거쳐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할 예정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TV홈쇼핑 업체 현대홈쇼핑과 식품유통전문업체 현대그린푸드를 거느리고 있다. 위니아만도 인수를 통해 판매와 제조업에서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위니아 만도는 한라그룹의 자동차 부품회사인 만도(옛 만도기계) 가전부문에서 출발한 회사다. 1995년 선보인 김치냉장고 ‘딤채’로 유명해졌다. 한라그룹은 고(故) 정주영 회장 첫째 동생인 고 정인영 회장이 창업한 회사다. 현대백화점그룹은 고 정주영 회장의 3남인 정몽근 명예회장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현재는 정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지선 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삼촌이 매각했던 기업을 조카가 인수하게 된 것이다.

위니아만도는 김치냉장고 외에도 에어컨과 제습기 등 가정용 공조기기를 생산한다. 지난해 매출 4127억원, 영업이익 168억원을 기록했다. 현대백화점은 현대홈쇼핑, 현대그린푸드, 현대리바트 등 그동안 유통업을 위주로 사업을 펼쳤으나 이번 위니아만도 인수를 계기로 제조업에 뛰어들 수 있게 됐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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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