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비화 조짐 '정치권 데스노트' 소문과 진실

여의도 살벌한 피바람 몰아친다

[일요시사=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치권이 떨고 있다. 최근 검찰이 관피아 수사와 관련 다각도로 첩보를 수집하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 칼날은 결국 정계를 향할 것이 분명해서다. 앞서 박상은 새누리당 의원은 공천헌금으로 의심되는 뒷돈을 받은 정황이 드러나며 수사망에 올랐고, 김형식(전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의원은 수천억원대 자산가인 송모씨를 살인교사한 혐의와 함께 이른바 ‘철피아’ 사건에 연루되며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사정당국은 전·현직 국회의원이 포함된 이른바 ‘정치권 X파일’을 확보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터질지 모르는 권력형 게이트에 여의도 정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 여의도 정가의 최대 화두는 7·30 재보선이다. ‘미니 총선’으로 불리는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민심의 향배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코너에 몰린 박근혜정부는 ‘인사 참극’으로 구겨진 체면을 사정 드라이브로 돌파하고 있다. 핵심 타깃은 명확하다. 바로 관료사회 밖에 있는 의회 권력이다. 

사정 드라이브
정치권 겨눴다
 
세월호 참사 수습과정에서 정부는 ‘관피아 척결’이란 승부수를 던졌다. 이에 발맞춰 검찰은 전·현직 국회의원이 연루된 게이트 정황을 확보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러나 내사 없이 진행된 수사는 번번이 벽에 막혔고 관련자들은 몸을 사리면서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성과 없이 변죽만 울린다는 비판에 직면했던 정부다. 
 
하지만 관피아 수사 피로도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대형사건이 검·경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김형식 서울시의원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강서구 재력가 살인사건이 불거진 것이다. 사정당국 입장에서 이 사건은 가뭄 끝에 단비였다. 
 

지난 7일 검찰은 김 의원의 청부살해 사건과 관련해 “수사 인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더 인력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검찰이 운을 띄운 인력 보강은 김 의원의 살인교사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바로 정치권 로비 의혹 규명에 있었다. 
 
검찰은 현재 강력 전담 부장검사와 평검사 3명을 투입해 피해자 송모(67)씨가 생전에 작성한 이른바 ‘뇌물리스트’ 분석에 주력하고 있다. ‘매일기록부’라고 적힌 이 장부는 A4용지 크기의 공책 1권 분량으로 지난 1991년 말부터 송씨가 만난 사람의 이름과 지출 내역 등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YTN> 등의 보도에 따르면 수천억원대 재력가로 알려진 송씨는 생전 김 의원을 통해 유력 정치인에게 로비를 시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로비 금액은 최소 억대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검찰은 이 돈이 실제로 해당 정치인에게 건네졌는지를 확인 중이다. 
 
그리고 송씨의 로비 의혹은 앞서 밝힌 매일기록부에 비밀이 담겨 있다. 송씨는 금품을 전달하면서 돈을 준 시간과 장소, 최종 로비 대상까지 꼼꼼히 작성한 것으로 검찰은 전했다. 무엇보다 김 의원에게 건네진 5억2000만원 중 일부 금액에는 해당 정치인의 이름이 병행 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즉 송씨가 유력 정치인에게 로비를 시도했고, 평소 친분이 있던 김 의원이 전달책 역할을 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쏠리는 것이다. 
 
‘펑펑’ 터지는 로비장부에
떨고 있는 유력 정치인들
 
검찰에 앞서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은 자체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장부에 이름이 오른 정치인 및 공무원들의 자금흐름을 추적 중이다. 경찰 한 고위 관계자는 “철도 비리와 관련된 사안이 (장부에) 포함돼 있다”고 귀띔했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철도 관련 업체인 AVT사가 김 의원의 측근인 팽모씨에게 1300만원을 송금한 것으로 확인됐다. 팽씨는 김 의원으로부터 재력가 송씨를 살해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실행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AVT사는 과거 팽씨의 아내에게 1300만원을 송금했다. 경찰은 이 돈이 결국 김 의원에게 흘러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경찰은 AVT사의 회사돈 3000만원이 김 의원에게 직접 전달된 정황도 확보했다. 김 의원 측은 이 돈이 모두 빌린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유력 정치인
이름 나온다
 
이제 관심은 두 가지로 쏠린다. 유력 정치인이 실제로 대가성이 있는 금품을 수뢰했는지 여부와 김 의원이 금품을 전달했다면 어떤 정치인이 돈을 받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와 관련 일각에선 ‘김형식 리스트’가 존재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국회 보좌관 출신으로 여의도 사정에 정통한 김 의원이 한 사람에게만 로비를 하진 않았을 것이란 추론이다.
 
때문에 김 의원이 입을 연다면 현역 국회의원의 목줄이 위태로울 것이란 소문도 돌고 있다. 대형 게이트로 번질 여지가 있어 그의 출신 정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곤혹스러워 하는 눈치다. 
 
특히 정치인의 가장 취약한 연결고리로 지목되는 공천 문제와 관련해 일종의 상납구조가 드러날지도 관심이다. 공천을 받기 위해 위로는 중앙당에 로비를 하고, 아래로는 이권에 개입해 금품을 제공받는 상납구조가 실재할 개연성이 농후한 까닭이다. 이래저래 김 의원의 입에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한편에서는 이른바 ‘박상은 스캔들’의 파장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불법 정치자금 수뢰 의혹을 받고 있는 새누리당 박상은 의원은 최근 운전기사인 김모씨의 폭로로 궁지에 몰렸다. 김씨는 자신이 직접 돈가방째로 검찰에 들고 갔던 3000만원 외에도 수천만원이 더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인천지방검찰청 해운비리수사팀(팀장 송인택 1차장검사)은 박 의원의 운전기사인 김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난 5월말 모두 2차례에 걸쳐 각각 현금 3500만원과 2000만원을 박 의원의 차 안에서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김씨는 당시 휴대전화 카메라로 이 같은 정황을 포착했으며, 현금 다발이 찍힌 사진도 검찰에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초 해운·항만업계의 비리 근절을 목표로 했던 이번 수사는 어느덧 박 의원의 개인 비리 규명으로 수사의 중심이 넘어가는 모양새다. <시사저널> 등은 박 의원의 비리 의혹이 담긴 일명 ‘X파일’이 실재하며 이 파일이 검찰로 넘어갔다고 보도했다. 소위 ‘박상은 X파일’로 불리는 이 문서는 박 의원과 지역 기업 간의 유착 사례와 불법 정치자금 의혹 등 10여가지가 사례별로 정리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검찰은 신중한 입장이다. 지난 9일 한 검찰 관계자는 “해운비리와 관련된 정·관계 로비 의혹은 운항관리자들이 연루된 비리를 수사한 뒤 마지막에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의 개인 비리 의혹은 우선 수사대상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통상 정·관계 비리 수사는 지검급 수사력을 집중해야 하며, 공소 유지에 필요한 증거 발굴이 핵심이다. 그렇지만 관피아 수사로 벌린 일이 많은 상황에서 김 의원을 본격적으로 수사할 여력은 없다는 설명이다.
 
특별수사팀은 지난 두 달 동안 해양수산부 출신인 이인수 전 해운조합 이사장과 김상철 안전본부장을 재판에 넘겼고, 인천항 선주들과 유착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해경 경정과 해운조합 사업본부장 등을 구속했다. 사실상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와의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박 의원까지 구속한다면 자칫 공소유지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못 잡는 검찰?
안 잡는 검찰?
 
이 같은 상황에서 검찰은 먼저 ‘쪼개기 후원금’을 건넨 의혹을 받고 있는 인천지역 기업들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지난 4일 검찰은 대형 제강사 D사의 관계자를 소환해 조사했다. D사는 박 의원의 지역구인 인천 동구 소재로 박 의원에게 불법 후원금을 제공한 업체들 중 하나로 지목된 곳이다. 검찰은 현재 D사가 회사 자금을 소액으로 쪼갠 뒤 직원들 명의로 박 의원에게 후원금을 전달한 경위를 파악 중이다. 
 
[김형식 리스트] 야당 정치인 거론
[권영모 리스트] 여당 실세들 구설
[박상은 리스트] 정재계 유착 회자
 

정치권을 겨냥한 로비에서 ‘쪼개기 후원금’은 단골 소재다. 사법당국의 추적을 교묘히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철도비리의 중심에 있는 AVT사 대표 이모씨는 김 의원을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에게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씨는 지난 2007년과 2010년 국회의원 두 명에게 각각 정치후원금을 냈다. 2007년 2월에는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초선의원에게 200만원을 후원했고, 2010년 3월에는 당시 한나라당 주요 당직자였던 A의원(전직)에게 후원금 한도액인 500만원을 냈다. 그런데 같은 날 A의원은 권영모 전 새누리당 수석대변인으로부터도 500만원을 후원받았다. 권 전 대변인은 AVT사로부터 로비 명목으로 억대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철피아 비리로 구속된 첫 번째 정치인이다. 
 
그런데 권 전 대변인과 A의원은 대학 선후배 관계로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다. 즉 권 전 대변인이 AVT사를 대신해 A의원에게 정치 후원금을 전달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이는 AVT사가 전달책 권 전 대변인을 통해 국회에 전방위 로비를 시도했다는 정황으로도 해석된다. 
 
지난 5일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김후곤)는 철도부품 제조업체로부터 납품 관련 로비 명목으로 거액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권 전 대변인을 구속했다. 검찰에 따르면 권 전 대변인은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발주한 호남고속철도 레일체결장치 납품사업과 관련해 AVT사로부터 비자금 명목으로 수억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 권 전 대변인은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씨로부터 부탁을 받고, 김광재 전 철도시설공단 이사장에게 수천만원을 대신 건넸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권 전 대변인이 2년여 전부터 김광재 전 철도시설공단 이사장과 만나 설이나 추석, 연말마다 납품·수주 등에 관한 청탁성 뇌물을 건넨 것으로 보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한 가지 뼈아픈 대목은 중요 인물인 김 전 이사장이 한강에 투신했다는 것에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 전 이사장이 남긴 유서를 보면 “정치로의 달콤한 악마의 유혹에 끌려 잘못된 길로 갔다. (정계 진출 유혹에 끌린) 길의 끝에는 업체의 로비가 기다리고 있더라”는 내용이 있다. 업체로부터 금품 로비를 받은 당사자가 정치권으로부터 청탁을 받았다는 의혹을 남긴 셈이다. 
 
일각에선 권 전 대변인이 김 전 이사장에게 공천을 미끼로 정치권 로비를 부탁하지 않았겠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권 전 대변인은 김 전 이사장에게 수상한 3000만원을 전달한 바 있다. 또 권 전 대변인은 AVT사의 고문을 지낸 전력이 있다. 사실상 로비가 주 업무였던 것으로 보이며 검찰은 권 전 대변인이 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고의로 ‘배달 사고’를 냈을 가능성도 검토 중이다. 

달콤한 유혹
결국은 파국
 
검찰은 AVT사 관계자로부터 “권 전 대변인이 여당 실세 의원과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이씨와 김 전 이사장에게 소개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이 말이 사실이라면 ‘김형식·박상은 리스트’처럼 이른바 ‘권영모 리스트’가 실재하는 셈이다. 더구나 ‘권영모 리스트’는 그 정황이 앞선 ‘김형식 리스트’보다 더욱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눈길이 쏠린다. 전·현역 국회의원이 망라된 각종 ‘로비 리스트’에 여의도는 폭풍전야다.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사이버사령부 ‘정치글 작성’ 파문
사실로 드러난 ‘국풍’ 의혹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국군사이버사령부의 정치관련 댓글 작업에 관여한 의혹을 받은 연제욱(소장)·옥도경(준장) 전 사이버사령관이 정치관여 혐의로 형사 입건됐다. 
 
국방부 관계자는 지난 6일 “지난 달 중순께 국방부 조사본부가 연제욱·옥도경 전 사이버사령관을 군 형법상 정치관여 혐의로 형사 입건했다”며 “피의자 신분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군 관계자는 “조사본부가 이들 전직 사이버사령관을 형사 입건한 것은 요원들에 대한 지휘 감독을 소홀히 하고 정치글 작성과정에 역할을 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연제욱·옥도경 입건
대선 댓글 관여 혐의
 
연제욱 소장은 2011년 11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사이버사령관을 지냈다. 박근혜정부 출범 후 청와대 국방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사이버사령부 정치댓글 관여 의혹을 받아 지난 4월 육군 교육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됐다. 옥도경 준장은 연 소장에 이어 2012년 10월부터 지난 4월까지 사이버사령관을 지냈다. 이후 연 소장과 같은 시기에 자리에서 물러나 현재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정책연수를 받고 있다.
 
앞서 조사본부는 지난해 12월 중간 수사결과 발표 때 심리전단 요원들이 작성한 ‘정치관련 글’이 1만5000여건, 특정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비판한 ‘정치글’이 2100여건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추가 수사 과정에서 정치관련 글이 3만여건, 정치글도 6000여건임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중간수사 당시보다 2∼3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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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