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골프장을 위한 필수조건 무엇

자연을 잘 살리거나 혹은 코스에 공들이거나…

최근 미국의 골프전문지 <골프다이제스트>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베스트코스로 부상하는 골프장엔 세 가지 특징이 두드러졌다. 장엄한 자연을 잘 살렸거나, 코스에 공들인 흔적이 뚜렷하거나, 골프계에 공헌도가 높은 코스들이다.

2013 톱50 중 제주도·강원도가 각 7곳
‘관광자원 개발’ 논리, 링크스 코스 등장

국내에서 바다에 가장 가까이 접한 코스는 1989년 개장한 제주도의 중문컨트리클럽이었다. 14번 홀(파4)과 이어진 15번 홀(파5)에서는 오른쪽 페어웨이 옆으로 중문 앞바다 절벽에서 바다를 조망했다. 15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뒤로 돌아 ‘바다를 향해 볼을 한 개씩은 치고 가야 제 맛’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절벽 밑에서 물질하는 해녀의 민원이 심해지자 골프장은 급기야 캐디로 하여금 바다로 샷하는 골퍼를 단속했다.

자연에 묻히는 이율배반적 코스

그 당시엔 국내 해안가에 코스가 들어선다는 건 꿈도 못 꿨다. 심지어 ‘북한군이 침투할 수 있으니 안 된다’는 안보논리까지 작용했다. 대부분의 국내 코스는 일본 정원처럼 숲속에 앉혀진 파크랜드이거나 산허리를 뭉텅 깎아낸 마운틴 스타일이었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들어가 자연에 묻히는, 이율배반적인 코스 조성이 당시엔 주류였다.
하지만 외국에서 골프를 경험한 골퍼가 늘면서 캘리포니아의 태평양에 면한 페블비치나 사이프러스포인트처럼 그린 옆으로 파도가 출렁이는 코스가 주는 장엄함이 코스의 이상향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물론 <골프다이제스트>가 외국의 수많은 링크스와 시사이드 코스를 골퍼에게 꾸준히 소개하면서, 코스를 보는 수준과 안목을 높여놓은 점도 부정할 수 없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해안선에 다가간 코스가 국내에도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에는 시뷰(Sea View)이거나 오션뷰(Ocean View)로, 멀찍이 바다가 보인다는 정도였다. 태안비치나 힐튼남해처럼 시사이드(Sea Side)라 해도 수직 콘크리트 제방을 따라 한두 개 홀이 바다와 접하는 게 전부였다.
천연의 해안선을 따라 코스를 조성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수많은 여론의 역풍과 현실성의 장벽에 부닥쳤다. 코스 조성 과정에서 환경 평가, 도시계획위원회 등 인허가를 관장하는 기관에서 ‘수산자원 보호구역에서는 해안선 200미터’ ‘동식물 보호구역에서는 해안선 50미터’라는 기준을 강제했다. 또한 환경단체가 ‘코스에 뿌릴 농약이 바다로 흘러가면 어찌할 것인가’라는 논리를 들이대면 해안선코스 구상은 언제 그랬냐 싶게 사그라졌다. 국내에 링크스, 혹은 시사이드는 이래저래 불가능했다. 실체가 불분명한 ‘해안선 근처엔 코스를 못 만든다’라는 논리는 거세져만 갔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에는 다도해는 물론 리아스식 해안에 뛰어난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 많다. 첨단의 코스 조성 노하우가 도입되면서 코스는 다시 바다 쪽으로 전진하고 있다. 동시에 ‘환경 보존’보다는 ‘관광자원 개발’ 논리가 우세하면서 해안가를 낀 코스가 최근 등장하기 시작했다. 해남 파인비치와 거제 드비치에서 보듯, 다도해와 어우러진 한국적 자연환경을 잘 살린 코스가 등장하는 것이다.
파인비치는 리아스식 해안선을 따라 홀이 들고난다. 바다 건너 샷을 해야 하는 홀이 나온다. 캘리포니아 해안가 바위섬을 향해 샷을 하고, 바다 절벽을 건너 치는 사이프러스포인트와 같은 스타일의 코스다. 제주도 중문에서 먼 바다를 향해 볼을 날리고 아쉬움을 달래던 골퍼의 열망이 여기서는 코스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좋은 코스는 ‘경험과 공들임’ 공통분모
거스르지 말고 잘 어우러지면 높은 평가

드비치에서는 코스 앞바다에 김 양식장이 펼쳐진다. 클럽하우스에서 조망하자면 통영, 마산, 창원이 뱃길로 내다보인다. 툭 튀어나온 반도를 따라 18홀이 오밀조밀 들어앉았다. 세 개의 파3홀이 모두 바다를 향해 내리꽂듯 샷 하는 구조다. 통통배를 타고 드나드는 어부를 보면서 샷을 하고, 임시 선착장까지 내려가 활어 횟감을 흥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드비치에서는 아쉬움도 있다. 바다 끝까지 홀이 뻗어나가지 못한 건 천연기념물인 수달이 발견되어 해안선과 50미터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환경영향평가 때문이었다.
국내에선 파인비치와 드비치가 대표적이지만,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코스의 핫 트렌드를 들여다보면 바다라는 웅장한 자연 환경에다 코스를 조성한 골프장이 주를 이룬다. 지난해 ‘미국 제외 세계 100대 코스’에서 높은 순위에 오른 뉴질랜드의 케이프 키드내퍼스(Cape Kidnappers), 카우리 클리프스(Kauri Cliffs), 호주 태즈매니아의 반부글 듄스(Barnbougle Dunes), UAE 아부다비의 야스링크스(Yas Links), 멕시코 디아만테(Diamante) 등이 모두 천연 해안선이라는 자연을 코스에 끌어들이고 필드와 녹여낸 데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들 모두 개장 10년 미만의 코스다. 역사성이나 전통으로 높은 순위에 오른 게 아니라 해안선을 잘 살렸기 때문이다.

다양한 설계 노하우 모두 담아낸 코스


그러한 자연을 코스에 활용한 것이 바다뿐일까. 산도 자연환경의 요소다. 올해 베스트 코스에 든 제주도의 클럽나인브릿지, 핀크스, 롯데스카이힐은 한라산과 산방산, 그리고 제주 앞바다의 자연을 가장 잘 아우르고 있는 코스들이다. 새롭게 베스트코스에 진입한 롯데스카이힐 스카이-오션 코스는 거의 대부분의 홀에서 백록담의 장관을 보거나, 제주 앞바다의 햇볕에 반사되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2013년 톱50 코스 중에 7곳이 제주도에서 나왔고, 7곳이 강원도에서 배출됐다. 코스 설계자는 ‘좋은 코스가 나오기 위한 최고의 조건이 입지’라고 입을 모은다. 산과 바다라는 자연 속에 코스가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앉혀졌을 때 골퍼는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올해 국내 베스트로 뽑힌 코스에서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어우러진 곳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천혜의 자연 환경을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주어진 부지 면적에서 최고의 레이아웃과 정성이 깃든 웰메이드 코스가 또 하나의 트렌드다.
올해 베스트코스에 새로 진입한 곳 중에는 유독 새로 문을 연 코스가 많다. 이중에는 여주와 이천의 트리오인 해슬리나인브릿지, 블랙스톤이천, 휘닉스스프링스와 송도의 잭니클라우스골프클럽코리아를 꼽을 수 있다.
전 세계에 250여 곳의 코스를 설계한 잭 니클라우스는 송도에 본인의 다양한 설계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은 코스를 만들어냈다. 직사각형의 네모나고 평평한 매립지라는 극도로 제한된 조건 아래, 그는 좁으면서 난이도 높은 그린 에리어, 마운드와 수림, 인조 암반을 최대로 이용해 홀 간 독립성과 난이도를 높인 토너먼트 코스를 창조해냈다.
자연 속에 휴식터를 조성하는 기존의 코스 조성 방식과는 달리, 마천루를 배경으로, 옆 도로와의 차폐(遮蔽)와 안전까지 고려하면서 홀이 이어지는 점 등 ‘도심 속 골프장’의 모델을 제시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제주 클럽나인브릿지의 후광을 입은 골프플랜의 데이비드 데일은 해슬리나인브릿지에서도 다양하고 전략성 높은 홀을 창조했다. 다소 좁은 듯한 코스 부지지만 인공 암반을 활용하면서 시각적인 장대함을 주려했다. 자연스러움을 높은 가치로 여기는 골프 코스에 인공 암반을 활용해 논란의 여지를 남겼지만, 이제는 세월이라는 옷이 도드라짐을 충분히 감싸면서 자연스럽게 안착되어가고 있다.
거기에다 골프장의 섬세한 공들임이 더해졌다. 카트 길에도 인조 잔디를 심어 불규칙 바운스를 없애고 시각적인 자연 환경을 만들려 한 점과, 18개 홀의 그린 밑으로 서브에어와 하이드로닉 시스템을 설치해 한 겨울이나 장마에도 최상의 플레이 조건을 제공한다는 점 등 코스에 대한 아끼지 않는 투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높은 안목과 정교한 공들임

블랙스톤이천은 블랙스톤제주의 설계가인 브라이언 코스텔로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할 만하다. 계단식 그린은 핀 포지션에 따라 티 샷과 어프로치를 달리해야 하는 다양성을 제공하고, 커다란 벙커가 확실한 상과 벌의 요소로 작용한다. 또 억지스러운 홀 흐름이나 뭉텅 깎아낸 법면이라곤 찾을 수 없다. 제주가 천혜의 자연 환경의 덕을 보았다면, 이천은 오로지 코스 조형만으로 자연 속에 편안하게 묻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설계부터 공사, 조형(셰이핑·Shaping), 마 무 리 작 업 (매니큐어링·Manicuring), 그리고 조경까지 이어지는 눈썰미 높은 안목과 정교한 공들임의 산물이다.
평창의 휘닉스파크에 이어 보광이 선보인 휘닉스스프링스는 짐 파지오가 한국에서 작업한 첫 번째 코스다. 다양한 오르막 내리막에 다이내믹한 벙커 조성이 뛰어나다. 마운드와 나무와 홀 레이아웃이 차폐 기능을 훌륭하게 하고 있어 독립적이다. 이곳 역시 조형과 마무리 손질이 뛰어난 점은 ‘파지오’ 가문의 특징이자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회장을 지낸 오너 홍석규 회장의 안목이 만난 합작품이라 할 만하다.
베스트 코스에 새로 진입한 여주와 이천의 트리오 모두 제주도와 강원도에서 베스트 코스를 조성해본 모기업이 자신들의 축적된 노하우를 끌어올린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이전의 코스가 모두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탄생했다면, 이후의 코스는 경험과 공들임이라는 공통분모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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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