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 VS 홍준표 박 터지게 싸우는 진짜 이유

'정치 앙숙'의 퇴로 없는 끝장 승부 "너 죽고 나 살자"

[일요시사=정치팀]6·4지방선거가 다가오며 새누리당 경남도지사 후보 자리를 놓고 홍준표 현 지사와 안상수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의 신경전이 가열되고 있다. 정치권의 대표적 앙숙으로 손꼽히는 두 인사가 서로에 대한 원색적 비난까지 쏟아내며 날선 공격을 주고받고 있는 것. 4선 의원에 한나라당 원내대표, 당대표를 나란히 지낸 두 거물급 인사가 경남에서 치열한 공천 경쟁을 벌이게 된 속사정을 <일요시사>가 들여다봤다. 




안상수(68) 전 한나라당 대표와 홍준표(60) 경남도지사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많다. 이들은 같은 경남에서 출생(안상수-마산, 홍준표-창녕)해 검사·변호사로 재직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15대 총선에서 나란히 당선된 이후에는 18대까지 내리 4선에 함께 성공했다. 그 사이 한나라당 원내대표, 당대표를 모두 지냈다는 공통점도 있다. 19대 총선에서는 공천 탈락(안상수), 낙선(홍준표)의 시련을 함께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사한 삶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대표적 앙숙으로 손꼽힌다.

대표적 앙숙

본격적으로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지난 2010년 7월 당대표 경선 때부터다. 당시 홍준표 의원은 안상수 의원이 "개 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며 이웃을 상대로 소송을 냈던 사실을 폭로했고, "병역 기피를 10년 하다가 고령자로 병역 면제된 사람이 당 지도부에 입성하면 한나라당은 '병역 기피당'이 된다"며 맹비난했다. 

홍 의원의 원색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시 친이(친이명박)계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안 의원이 1위로 당대표가 됐다. 아쉽게 2위를 차지해 최고위원이 된 홍 의원은 최고위원회의 때마다 사사건건 안 대표의 당 운영 방식에 불만을 표시하며 더욱 관계가 악화됐다. 

이와 관련,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사법시험 기수가 7기수가 차이나는데도 불구하고 홍준표 지사가 안 전 대표를 검사, 정치적 선배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며 "2010년 당대표 경선 이후 둘 사이는 완전히 멀어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번에는 6·4지방선거 새누리당 경남지사 후보직을 놓고 또 한번 제대로 붙는 모양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 민주당 민병두 후보에 밀려 낙선한 이후 공직생활 은퇴까지 선언했다가 2012년 12월 경남지사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기사회생한 홍 지사의 재선 가도에 안 전 대표가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공천조차 받지 못했던 안 전 대표는 재기를 위해 "마지막 정치인생을 경남에 걸겠다"며 지난해 11월부터 경남 민생투어에 나섰다. 이는 새누리당 지지성향이 뚜렷한 경남에서 공천권만 따낼 경우 당선이 무난하리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상대방을 향한 공격의 포문은 안 전 대표가 먼저 열었다. 그는 지난 14일 <한수진의 SBS 전망대>에 출연해 "지난 2012년 12월 보궐선거 당시 경남지사 출마를 생각하면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홍 지사가 출마하겠다고 나섰다"며 "(당)대표를 했던 두 사람이 대선을 앞두고 다투는 모양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제가 양보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보궐선거에서 (경남지사 후보직을) 한번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홍 지사가 한번 양보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그러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1차 경남지역 민생투어 결과 현 지사에 대한 (지역주민의) 평가는 극과 극"이라며 "경남의 경제가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고 그동안 별로 호전된 것 같지도 않은 것 같아 안타깝게 느껴졌다"고 홍 지사를 비판했다.

재선 노리는 홍준표 "보온병 들고 흔들던 시대 갔다"
재기 노리는 안상수 "지난 재보선서 내가 양보한 것"

이에 홍 지사도 즉각 반격에 나섰다. 그는 다음날 KBS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에 출연해 "지난 재보선에서 안 전 대표가 양보한 일이 없다"며 "이게 무슨 서로 나눠먹기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런 말씀 하는 것 아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어 "(안 전 대표가) 느닷없이 경남에 내려와서 돌아다니는데 이유를 모르겠다"며 "나온다 해도 전혀 긴장되지 않는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지난 16일 <YTN>과의 인터뷰에서는 안 전 대표를 향해 "보온병 가지고 흔드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나"라며 "이제 시대가 좀 바뀌었다. 전 계파 없이 정치를 해 왔고 이미 (안 전 대표는) 친이계 대리인으로 당대표를 하신 분인데 (지금) 친이계가 있나? 이제는 지지해 줄 세력들도 없다"고 비난했다.

안 전 대표가 당대표로 있던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이후 연평도를 방문해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던 사건과 과거 당대표 경선에서의 앙금을 다시 끄집어내 망신을 준 것이다. 이는 홍 지사가 현직 프리미엄을 바탕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안 전 대표를 포함한 타 후보를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지난 22일 경남지사 출마를 선언하며 도전장을 내민 또 다른 새누리당 후보 박완수(58) 창원시장은 "안 전 대표와 홍 지사의 설전이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두 분의 설전은 새누리당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싸잡아 비판했다.

박 시장은 특히 "지난 2012년 경남지사 재보선 때 한 사람이 후보를 양보했다 아니다 라며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는데, 두 사람이 그 배경을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 경선 주목

한편 아직 교통정리가 끝나지 않은 야권 경남지사 후보로는 김경수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 공민배 전 창원시장, 민주당 허성무 경남도당 위원장, 통합진보당 강병기 전 경남도 정무부지사, 정의당 박선희 경남도당 위원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경남에서는 민주당 소속 김두관 전 지사의 18대 대권도전을 위한 자진사퇴 이후 가뜩이나 약한 야권의 세가 더욱 위축돼 어느 후보가 나와도 새누리당에 밀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새누리당이 유리한 경남지사직을 놓고 정치적 앙숙인 홍 지사와 안 전 대표의 물러설 수 없는 대결에 박완수 시장이라는 만만찮은 상대가 가세한 새누리당 내 경선이 본선보다 흥미진진하게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허주렬 기자 <carpedie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안상수·홍준표, 앙숙의 '닮은꼴 인생'

차기 경남지사 직을 놓고 치열한 내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와 홍준표 경남지사의 삶은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두 인사는 같은 경남 출신의 선후배 검사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정치에 입문했다.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란히 당선된 이들은 이후 18대 국회까지 내리 4선 의원을 지냈고, 그 사이 한나라당 '원내대표→당대표' 등 주요직을 차례로 지냈다. 병역의 의무는 안 전 대표가 병역기피, 행방불명 등으로 인한 면제, 홍 지사는 체중미달로 단기사병(방위병)으로 14개월간 복무해 모두 정상적으로 마치지 않았다.

또한 상황과 시기만 다를 뿐 '막말 논란'도 함께 겪었다. 안 전 대표는 지난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연평도를 방문해 불에 탄 보온병을 들고 "이게 포탄입니다. 포탄"이라는 발언을 했다가 중국에도 보도되는 등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그해 12월에는 서울 용산의 한 장애인 시설에 방문, 여기자 3명과의 오찬에서 "요즘 룸살롱에 가면 오히려 '자연산'을 더 찾는다고 하더라"라며 성형 안한 여성을 자연산에 비유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홍 지사는 17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BBK주가조작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식사했어요?"란 엉뚱한 답변만 늘어놓아 '식사준표'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으며, 2011년 10월에는 홍익대 인근카페에서 열린 대학생들과의 소통을 위한 타운미팅에서 자신의 과거 사연을 소개하며 "이대(이화여대) 계집애들 싫어한다" "꼴같잖은 게 대들어 패버리고 싶다" 등의 막말을 쏟아내 '막말준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도 얻었다. <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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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