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부정·비리인사 연이은 귀환 논란

과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일요시사=정치팀]과거 부적절한 사건에 휘말려 불미스럽게 새누리당을 떠났던 인사들의 당 복귀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과거는 과거일 뿐 문제될 것 없다는 '도덕 불감증'이 저변에 깔린 것으로 보인다. 부정·비리인사의 재영입은 지방선거 등 당면한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인재영입 차원의 결정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무차별 영입은 언제든 역풍이 불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일각에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속설을 잊은 새누리당의 '오만'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
역사에서 이미 수차례 증명된 정치권의 오래된 속설이다. 실제로 분열된 진보는 보수에 번번이 깨졌고, 부패한 보수인사는 불명예스럽게 정계를 떠난 사례가 부지기수다. 물론 부패했으나 아직까지 잘 살고 있는 인사도 있다. 그러나 시간의 문제일 뿐 과오는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비리 전력자의 귀환

새누리당은 지난 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박희태 전 국회의장(76)을 당 상임고문에 임명했다. 지난 2008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 살포를 지시한 혐의(정당법 위반)가 뒤늦게 드러나 국회의장 임기를 3달여 앞두고 불명예스럽게 퇴장했던 ‘비리인사’를 다시 당이 불러들인 것이다.

2012년 12월 항소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 받은 그는 한달 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배려(?)로 특별사면을 받아 당 복귀에 법적인 하자는 없다. 새누리당 유일호 대변인도 "전직 당대표나 원내대표를 지내신 분들은 자동적으로 상임고문으로 위촉된다"며 "박 상임고문의 경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특별사면으로 복권돼 상임고문이 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정치권에 부는 정치쇄신 바람에 역행하는 것이며, 새누리당이 19대 총선을 앞두고 개정한 당헌·당규에도 위배된다. 새누리당 당원 규정에는 '과거의 행적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지 아니하는 자'로 당원자격의 기준을 명시하고 있다. 또 박근혜정부가 강조하는 국정과제인 '비정상의 정상화'에도 어울리지 않는 '비정상적' 행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임고문이라는 당의 '어른'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날부터 박근혜정부의 골키퍼를 자처하며 정권 홍보에 열을 올리고 나섰다. 박 상임고문은 각종 라디오, 방송, 신문 인터뷰 등을 통해 "여당은 대통령의 국정수행을 뒷받침하는 것이 임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까지 잘하고 있다" "국정원 선거개입은 수십 년 전부터 때때로 일어났던 일이다" "개헌은 불가능하다" 등의 발언을 쏟아내며 당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박근혜정부에 힘을 실었다.

박 상임고문이 지난해 3월 건국대 로스쿨 석좌교수로 임명될 당시 노동자연대학생그룹 건국대모임의 "부패했더라도 권력이 있으면 교수가 될 수 있는 사회라면 평범한 사람은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라는 성명은 '교수' 자리를 '정치인'으로 바꾸어도 무방해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연말·연초 문제인사 줄줄이 복당 
박희태·우근민·김태환·서청원 복귀
국민을 기억상실증 환자 취급?

지난해 11월에는 공직선거법 위반, 여성단체 회원 성희롱 혐의 등으로 확정 판결까지 받아 구설수에 올랐던 민자당(새누리당 전신) 출신의 우근민 제주지사(72)도 새누리당에 복당했다. 지난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공천을 노리다 성희롱 전력이 문제돼 공천에서 배제됐던 우 지사를 새누리당이 받아들인 것은 오는 6·4지방선거를 겨냥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당시 우 지사가 민주당에 복당했을 때 "야당이 선거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던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이 그를 받아들인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낮 음주 뺑소니 전력이 있는 김태환(72) 전 제주도지사는 지난해 10월 새누리당 재입당이 확정됐다. 김 전 지사는 지난 2004년 제주지사 재보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가 2006년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현명관 후보를 영입하자 불만을 품고 탈당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는 2002년 차떼기 사건, 2008년 돈으로 비례대표직을 사고 판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기소돼 두 차례나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가석방→특별사면'을 거쳐 지난해 4월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복당했다. 이어 지난해 10월에는 경기 화성갑 재보선에 출마해 당선, 7선 의원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현재는 유력한 차기 당권 후보 혹은 하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꼽힌다.


논문 표절 논란에 휘말려 내쫓기듯 새누리당을 떠났던 무소속 문대성 의원도 지난해 11월 복당 원서를 제출하고 중앙당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박사 학위를 받은 국민대 예비심사에서 '표절'로 결론을 내렸지만 학위 취소 등의 조치는 아직 최종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상황이 변한 것은 없지만 앞선 인물들의 영입 사례에 비춰보면 문 의원의 재입당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부적격자 집합소?

이처럼 과거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차별로 이뤄지고 있는 이탈자들의 새누리당 복귀 러시가 오는 지방선거에서 긍정적 효과로 연결될지는 의문이다.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지방선거에 대비해 당을 떠난 유력인사들의 복당이 줄을 잇고 있지만 비리·구설수에 올랐던 인사들의 복귀가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민주당 한 의원은 "새누리당이 집권의 달콤함에 빠져 국민을 기억상실증 환자로 취급하고 있다"며 "부적격자 집합소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허주렬 기자 <carpedie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친일옹호' 김종필 변호사 내정

청와대가 지난 11일 공석인 법무비서관에 김종필 변호사(52)를 내정했다. 김 법무비서관 내정자는 판사 재직 당시 친일파 후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이른바 '친일옹호' 판사로 알려져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김 내정자는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로 있던 지난 2010년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54명에게 유죄 판결을 하고 일본 정부의 훈장을 받았던 유영 판사의 후손이 낸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취소소송'에서 "판사는 법령과 공소사실을 기초로 유무죄 여부와 형량을 결정하는 역할만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이듬해 항소심은 김 내정자의 1심 판결을 뒤집어 친일 행적을 인정, 원심 판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또 이명박정부의 '국방부 불온서적 지정' 사건에서는 파면 등 징계를 받은 군법무관들이 낸 징계 취소 소송의 재판장을 맡아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려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이재화 변호사는 지난 13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정상적인 판사 출신도 많은데 비정상적인 판결로 논란을 빚어온 판사 출신 김종필 변호사를 법무비서관으로 임명…'비정상적인 유사정권'답다"고 비판했다.

한편 대구 출신의 김 내정자는 달성고와 경북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사법연수원 18기 출신으로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후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로 활동했다. <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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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