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 반격’ 노리는 재벌가 공주들 막전막후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4.01.07 14: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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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한명” 무서운 딸들의 전쟁

[일요시사=경제1팀] 재벌가에선 아들이 곧 기업을 잇는다는 가부장적 공식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 조금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딸들은 늘 아들보다 못한 자리에 만족해야했다. 그러나 재계는 지금 ‘딸들 전성시대’다. 누구의 남매, 누구의 아내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 경영 전면에서 활약하는 딸들이 속속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男부럽지 않은 파워를 자랑하는 재계 실세 딸들. 그들의 활약상과 특징을 짚어봤다.




매년 연말·연초 인사 시즌이 되면 ‘재벌가 황태자’들의 승진이 관심거리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독 재계 딸들의 약진이 거세다. 삼성그룹의 이서현 사장은 제일모직에서 에버랜드로 적을 옮기며 언니와의 경쟁을 예고했고, 대상그룹의 임상민 부본부장(부장급)은 기획관리본부를 총괄하는 임원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이밖에 한진과 오리온, 농심의 오너 딸들도 ‘공주경영’에 돌입, 딸들을 중심으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가고 있다.

딸들 전진배치
우먼파워 과시

시작은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이 끊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녀인 이 부사장은 지난 2002년 7월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 2010년 말 부사장으로 승진한데 이어 2013 연말 인사에 에버랜드 사장으로 올라섰다. 지난 9월 제일모직 패션부문이 삼성에버랜드로 이관된데 따른 것이다.

이 사장은 서울예고와 미국 파슨스 디자인학교를 나온 패션 전문가로 2002년 제일모직에 부장으로 입사해 쭉 패션·광고 계통에서 일해 왔다.

제일모직 패션연구소에 몸담으며 여성복라인 개편과 유명 디자이너 영입 등을 추진했고, 단순한 패션 비즈니스를 넘어서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의 복합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예술과의 통합 작업을 시도했다.


지난 2012년에는 글로벌 SPA(제조일괄화의류)에 맞서 새 SPA 브랜드인 ‘에잇세컨즈’를 출시하고 럭셔리 편집숍인 10꼬르소꼬모 개점과 ‘띠어리’와 ‘토리버치’, ‘이세이미야케’에 더불어 이탈리아 콜롬보백까지 인수해 뛰어난 추진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측은 이 사장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글로벌 패션 전문가로서 패션 브랜드 가치를 제고하고 아웃도어 사업진출 등 신성장 동력 확보를 통한 회사의 성장기반을 마련해왔다고 평가했다.

패션사업의 에버랜드 통합 이관 이후 제일모직은 소재 전문기업으로 탈바꿈했다. 더불어 이 사장은 패션부문의 제 2의 도약을 견인해야 하는 짐을 떠맡았다. 또 제일기획의 경영전략도 겸임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보폭을 넓혀야 하는 역할도 맡게 됐다.

이 사장이 에버랜드로 자리를 옮기면서 눈길을 끄는 장면도 연출됐다. 에버랜드에 두 자매가 모인 상황이 생긴 것이다. 이 사장의 언니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에버랜드 경영전략 사장을 맡고 있다. 한 회사 안에서 이들 자매의 ‘경영 경쟁’도 지켜볼만 하다.

딸딸이 집
3세경영 본격

청정원으로 유명한 대상그룹은 임창욱 명예회장의 차녀인 임상민 부장이 최근 상무로 승진하며 경영진에 합류했다. 임 상무는 지난해 10월 대상 전략기획본부 부본부장(부장급)으로 복귀한 후 경영전반에 관한 업무들을 하나씩 익혀왔다.

지난해에는 장녀인 임세령씨가 식품사업총괄 부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상무)로 임명됐었다. 1년간 식품사업총괄 부문에서 식품 부문 브랜드 매니지먼트, 기획, 마케팅, 디자인 등을 총괄해 왔다.

임 상무도 이번 승진을 통해 그룹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신사업 발굴과 글로벌 프로젝트를 총괄할 것으로 보인다. 전략기획본부장은 지난해 기존의 기획관리본부 산하 전략기획팀을 강화해 본부로 승격한 신설 조직이다.


안살림 역할 넘어 경영인 자리매김
연말 승진으로 후계구도 속속 편입

임 상무는 2003년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 미국 뉴욕에 위치한 파슨 디자인스쿨을 졸업했다. 2009년 8월 대상 프로세서 이노베이션(PI)본부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2010년에는 전략기획팀에서 기획실무를 담당하고, 2010년 8월부터 런던 비즈니스스쿨에서 MBA과정을 밟았다.

업계는 앞으로 대상의 3세 경영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임 상무는 ‘딸딸이 아빠인’ 임 회장이 지분 대부분을 몰아줘 실질적으로 차기 후계자가 된 상태에서 경영에 나서고 있다.

지난 11월 7일 기준 임 상무는 대상의 지주회사인 대상홀딩스 지분을 37.42% 보유해 최대주주로 있다. 언니인 임세령 상무가 19.9%로, 임 상무보다 먼저 임원이 됐지만, 지주사 지분은 동생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다만 임 상무의 나이가 33세에 불과한 만큼 차기 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기에는 이른감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톡톡 튀는 마케팅
실적 가시화

한진그룹의 조현민 대한항공 통합커뮤니케이션실 상무도 연말 인사에서 전무로 승진했다. 상무에 임명된 지 꼭 1년 만이다. 조 전무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로, 언니인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과 함께 그룹 내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그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USC)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후 2005년 9월 LG애드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3월 대한항공 통합커뮤니케이션실 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입사 2년 만에 부장급으로 초고속 승진해 주목받았다.

조 전무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는 평이다. 지난 2010년 소비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TV광고-뉴질랜드편’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팀장이었던 조 전무는 뉴질랜드에서 진행한 TV광고 촬영에 동행했다가 현장에서 즉석 캐스팅돼 광고에 출연했다. 당초 현지인 모델을 쓸 예정이었으나 “한국인이 좋겠다”는 촬영스태프의 의견을 받아들여 직접 번지점프에 몸을 던진 것. 이 밖에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중국, 중원에서 답을 얻다’, ‘지금 나는 호주에 있다’, ‘유럽 귀를 기울이면’ 등 히트한 대한항공 TV CF의 대부분이 모두 조 전무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또 2008년 출범 때부터 진에어에 몸담았던 조 전무는 진에어의 광고와 마케팅 분야에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세계 항공사 최초로 청바지차림 승무원이 기내 서비스를 제공한 게 대표적. 일부 국내선을 10번 이용하면 1번은 무료로 탈 수 있는 ‘나비포인트’ 제도와 e스포츠 마케팅도 조 전무의 아이디어다.

이런 노력 덕분에 지난 8월에는 해외 여행 전문 매체 ‘스마트 트래블’이 집계한 아시아 LCC 부문에서 국내 최초로 10위권에 들기도 했다. 여기에 지난 4월 조 전무가 진에어 등기이사로도 선임되면서 한진그룹 3세 경영의 막이 올랐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공주경영 YES!
경영 참여? NO!


이 밖에도 잘나가는 재계 딸들은 많다. ‘리틀 이명희’라 불리는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딸 정유경씨는 지난 2009년 신세계 부사장으로 승진, 오빠인 정용진 부회장과 함께 경영 전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외동딸인 채은정씨도 애경산업내에서 화장품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2009년부터 부사장 직함을 달고 오너 경영인으로써 보폭을 넓히면서 2006년부터 생활·항공부문장을 맡고 있는 남편 안용찬 부회장과 ‘부부경영’ 체제를 다졌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딸들도 각각 직함을 갖고 있다. 정성이 이노션 고문과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 정윤이 해비치호텔&리조트 전무다. 다만 이들은 주요 경영 현황을 보고받는 수준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현대가에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보필하며 ‘모녀파워’를 일궈가고 있는 정지이 현대U&I 전무도 있다. 1977년생인 정 전무는 지난 2004년 현대상선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뒤 2006년에 상무로, 2007년에는 전무로 승진했다.

식품업계에도 ‘공주경영’은 만연하다. CJ그룹도 이재현 회장의 장녀 경후씨가 계열사를 옮겨 가며 일을 배우고 있다. 그는 현재 CJ오쇼핑에서 언더웨어팀 상품기획 담당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과장은 지난 2011년 7월 대리로 CJ 기획팀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시작했으며, 그해 12월 CJ에듀케이션즈로 자리를 옮겨 지난해 3월 과장으로 승진했다. 업계에서는 이 과장이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일을 배워 조만간 주력사인 CJ제일제당에 입성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대상…언니와 동생 경쟁
LG·GS·LS 딸들은 경영 참여 ‘NO!’

분유업체인 매일유업 김정완 회장의 장녀인 윤지씨도 지난해 하반기부터 자회사 유아용품 업체인 제로투세븐에 대리로 입사해 마케팅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오리온 담철곤 회장의 장녀인 경선씨는 아직 정식 입사하지는 않았지만 회사의 주요 회의나 행사에 참석하며 경영현장 분위기를 익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장녀인 신현주 농심기획 부회장의 두딸인 박혜성·혜정씨도 계열사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반면 경영과는 전혀 무관하게 지내는 재벌가 딸들도 있다. LG와 GS, LS가 딸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엄격한 유교적 가풍 때문에 경영수업을 받는 딸이 단 1명도 없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4남 2녀를 두고 있으며, 손녀는 무려 12명이나 된다. 하지만 두 딸은 물론이고 12명의 손녀 중 LG그룹에 입사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딸과 손녀들은 전부 전업주부이거나 학생들로 알려졌다. 구본무 회장의 장녀 연경씨는 연세대 사회복지학과를 나와 결혼했으며 차녀 연수양은 서양화가를 꿈꾸는 여고생이다.

LG그룹에서 갈라져 나간 GS, LS그룹에서도 딸들의 경영참여는 전무하다. 구인회 LG 창업주의 세 동생인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과 구평회 E1 명예회장,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이 독립해서 만든 LS그룹의 3세들 중에는 딸이 12명이나 되지만 그룹에 입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GS 허창수 회장의 딸인 윤영 씨와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의 딸인 지영 씨도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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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