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 '접대 외교' 실상 대해부

"화려한 이면에 '득'보다 '실' 많았다"

[일요시사=정치팀]박근혜정부 출범 1년 최대 성과로 손꼽히던 '외교'가 시험대에 올랐다. 잦은 해외순방에서 현지언어 연설, 한복패션 등으로 ‘화려한 외교’를 선보였지만 정작 '실리는 챙기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 최근 미국의 일본 집단자위권 지지, 중국의 이어도 자국 방공식별구역 포함 등은 실리를 챙기지 못했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화려한 외교에 가려진 '접대 외교' 실상을 <일요시사>가 파헤쳐봤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1일 청와대에서 한국을 방문한 리센룽 싱가포르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 것을 끝으로 취임 첫해 정상외교를 마무리했다. 정부를 포함해 다수의 전문가들은 "박 대통령이 취임 첫해 외교·안보 분야에서 훌륭한 성과를 남겼다"는 평가를 내놨다. 과연 그럴까.

외견상 화려한
'박근혜식 외교'
 
청와대가 이날 내놓은 '2013년도 대통령 정상외교 결과 및 평가'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지난 2월25일 취임 후 5차례 해외순방과 국내에서 가진 10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총 26개국 정상들과 31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상대국은 일본을 제외한 한반도 주변 4강을 비롯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미, 중남미까지 거의 전 세계를 망라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5월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아 동맹을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끌어올렸다. 6월에는 국빈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을 갖고,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의 내실화' 및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또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한 지지도 이끌어냈다.
세계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는 양강(미국·중국)과의 만남에 이어 9월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G20(주요20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하며 다자외교무대에 데뷔했다. G20정상회의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는 베트남을 국빈 방문해 쯔엉 떤 상 국가주석을 만났다.
10월 초에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ASEAN+3(한중일) 정상회의에 잇따라 참석하고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하기 위해 4번째 순방길에 올랐다. 
올해 마지막 해외순방이던 11월 서유럽 방문 때는 프랑스, 영국, 벨기에, EU 정상과 만났다.
이처럼 활발하게 이뤄진 박 대통령의 집권 첫해 정상외교는 대북공조와 세일즈외교에 초점을 맞춰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청와대의 자평이다.

5차례 해외순방, 26개국 정상들과 31차례 정상회담
'외국어실력-한복패션' 뽐낸 화려함 속 '실리' 의문 

청와대 관계자는 "북핵문제 등 핵심 외교 사안에 대한 UN 5대 안보리 상임이사국(미국·중국·러시아·프랑스·영국)과의 정상외교로 양국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한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에 대한 국제적 이해와 지지를 확보했다"며 "특히 북한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인 중국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미국에 치우친 외교가 아닌 미·중 '등거리 외교'를 이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 및 영국 의원들과의 대화, 중국 칭화대학 연설, 프랑스 경제인 간담회에서 방문국의 언어로 연설하는 등 방문국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품격 있는 정상외교를 펼쳤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경제·통상·문화·국민 간 교류 등 실질분야 교류협력 사안 협의 등 적극적인 세일즈외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다.  
대표적으로 인도네시아와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CEPA)'을 타결하기로 합의했으며, 베트남과는 2014년 중 자유무역협정(FTA)을 타결하기로 약속했다. 또 러시아와는 나진~하산 철도 연결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이 참여하도록 합의했다.  

아낌없이 퍼주고
받은 것은 없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과는 그 내용에 비해 부풀려져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외교력을 정상회담 횟수와 외국어 실력 등으로만 평가한다면 분명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지만 '접대 외교'에 기반해 실속은 의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박 대통령의 첫 해외순방인 미국 방문에서는 제너럴 모터스(GM) 대니얼 애커슨 회장의 통상임금 문제 해결 요구에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답해 논란이 일었다. 
방미 이후에는 8조3000억원의 예산이 책정된 차세기전투기 사업의 단독 후보로 남은 보잉사의 F-15SE를 가격이 더 비싼 록히드마틴사의 F-35A로 변경해 퍼주기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프랑스 방문에서는 현지교민들의 촛불시위를 막으려다 프랑스 당국의 거부로 망신을 당했다. 또 프랑스 경제인들에게 불어 연설로 기립박수를 받은 것도 실상은 박 대통령이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을 한국 정부가 비준해 프랑스 자본의 한국 철도시장 진출, 비관세 장벽 폐지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유력 일간지인 <르몽드>는 지난 11월4일 '한국은 공공부문 시장을 외국기업들에 개방할 예정이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박 대통령이 메데프(프랑스 기업들 모임)의 본부에 모인 300여명의 기업 대표들 앞에서 완벽한 불어로 연설했다"며 "프랑스 측 청중은 특히 외국기업들에 대해 한국의 공공부문 시장을 조만간 개방하겠다는 발표에 만족해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또 "비관세 장벽을 폐지함으로써 양국 간의 교류에 장애가 되는 일련의 장벽들을 제거하기 위한 대통령 시행령이 오는 며칠 이내에 내려질 것이라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명확히 밝혔다"고 전했다.
그리고 연설 다음날(11월5일) 대통령 공석 중 열린 국무회의에서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은 통과됐다. 당장 '철도 민영화를 위한 사전작업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으나 박 대통령은 이를 무시하고 열흘 후 개정안 재가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지난 26일 "박 대통령의 정부조달협정 개정안 재가는 국회의 동의 없이 진행한 것이어서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조약안 심의, 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헌법재판소에 권항쟁의 심판을 청구한 상태다. 
그러나 국내 비판 여론을 감수한 퍼주기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순방 이후 EU는 우리나라를 예비 불법조업(IUU)국가로 지정했다. 최종 IUU국가로 지정되면 유럽과의 수산물 수출입은 물론 EU 국가와의 어선 거래가 모두 금지된다.

동북아 외교
긴장 고조

한반도와 인접한 동북아 외교에서도 사실상 실패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우선 대북외교를 보면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바탕으로 한 신뢰와 원칙의 외교는 북한의 '로켓 발사→3차 핵실험→개성공단 가동 중단' 등 벼랑 끝 외교 전술에 휘둘리지 않고 "북측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없이는 공단을 정상화할 수 없다"는 원칙을 지켜 결국 북한의 태도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개성공단 가동 재개라는 성과 이외에 더 이상 남북관계는 진전되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는 북한 대남선전매체들이 연일 박근혜정부 비난에 열을 올리는 등 갈수록 남북관계는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대중외교는 지난 6월 박 대통령 방중에서 '높은 수준의 한중FTA 약속' 등으로 퍼주기 논란이 일었지만, 최근 중국은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인 이어도를 자국 방공식별구역에 포함시킨다는 일방적 발표로 은혜(?)를 갚았다.
대일외교는 아베정권의 우경화 가속에 정상회담 한번 갖지 못하고 사실상 '개점휴업'에 들어간 상태다.
결국 활발한 외교활동에도 불구하고 인근 국가와 외교관계가 좋지도 않으면서 한국의 국제적 입지는 날로 위축되어가는 모양새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최근 박 대통령과 만나 한국의 대중 근거리외교를 겨냥해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 미국은 한국에 베팅하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발언한 것은 국제적 입지가 위축된 대표적 예다.  

철도시장 개방, 통상임금 해결 약속 등 퍼주기 논란
동북아 긴장 고조…내용 없는 원칙외교에 입지 축소
야권 "참담한 외교 실패, '외국어' 아닌 '외교'해야" 

이에 대해 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지난 20일 국회에서 열린 '남북관계의 진단과 해법' 세미나에서 "(박근혜정부 외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있는 '외화내빈 외교'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며 "박근혜정부의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당 천정배 전 의원은 성명을 통해 "을사늑약을 가장 먼저 승인하고 대사관을 제일 먼저 철수한 바 있는 미국은 최근 가장 앞장서 일본의 집단 자위권을 환영했고, 중국은 우리나라 EEZ인 이어도를 자국 방공식별구역에 포함시켰다. 또 일본과는 '먹통 관계'에 있다"며 "박근혜정부가 얻은 외교적 실리는 무엇인가?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얻은 게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천 전 의원은 이어 "우리 외교의 참담한 실패요, 철저한 무능"이라며 "박 대통령은 '외국어'를 할 게 아니라 '외교'를 해야 한다. 외교 부재시대를 끝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지외교
민낯 드러나

정치권 한 관계자도 "박 대통령의 패션 외교, 이미지 외교는 그 민낯이 생각보다 빨리 드러나고 있다"며 "외교는 주고받는 것을 대화와 협상을 통해 만들어가야 한다. 지금의 군사적·보수적 관점에서의 접근을 유지할 경우 외교 역량 부족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허주렬 기자 <carpediem@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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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