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특별기획③>DJ의 업적 & 못다 이룬 꿈

DJ 손길 닿은 빈자리에도 ‘햇볕’ 비출까



민주·인권 위해 바친 삶, 한국 민주주의 주춧돌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으로 IMF 외환위기 극복
DJ 공과 모두 담은 ‘햇볕정책’·남북정상회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뒤로 그가 쌓은 업적과 미완의 과제가 주목받고 있다. 수많은 정치 역경 속에서 일궈낸 민주화와 평화적인 정권교체, IMF 외환위기 극복,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으로 빛나는 남북관계에 대한 기여도가 그것이다. 이 중 김 전 대통령이 서거 전까지 원하던 남북의 평화 통일과 지역갈등의 해결은 남은 이들의 과제가 됐다. DJ 서거를 계기로 그가 남긴 것과 남은 이들이 이어가야 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정치인이었고 연설가였으며 민주주의 인권 지도자였다. 방대한 분량의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정치 경제 사회 인권 통일 분야에 걸쳐 자신의 철학을 담은 수많은 이론서를 집필한 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리고 그 이름만큼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DJ만큼 전 세계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이도 없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 세계 유수의 지도자와 언론으로부터 ‘한국의 넬슨 만델라’ ‘행동하는 양심’ ‘민주주의 지성’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가 국민의 가슴에 이름을 남기고 세계의 존경을 받은 데는 민주화를 향한 지대한 헌신이 있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한국의 넬슨 만델라’

DJ가 대통령직에 오르기까지 그의 정치인생 대부분은 민주화의 위한 투쟁으로 점철됐다. 연금, 납치 등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고 외로운 망명길에 오르면서도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안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밖에서는 DJ의 투쟁은 한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 가운데 가장 짧은 기간에 민주주의를 꽃 피울 수 있게 했다. 이들은 1987년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대통령직선제라는 민주화 체제의 출범으로 이끌어냈다.

특히 DJ는 네 번째 대권도전에서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이는 절차적 민주화의 일대 분수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DJ와 오랜 친분을 나눈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 대사는 “김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횃불과 같은 존재였다”고 전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우리가 누려온 민주주의의 상당 부분을 그에게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DJ는 재임시절 국제회의에서 언제나 첫 번째 발언권을 부여받을 정도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이는 DJ가 IMF 외환위기를 극복해내는데도 큰 힘을 발휘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과 미셀 캉드시 IMF 총재는 “김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고 말했다.

DJ는 6·25 이래 최대 위기였던 환란이었던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이 과정에서 외국 자본에 의한 국내 기업 인수 문제에 보다 신중했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이 빛을 발했다는 평이다. 또한 그는 재임 중 많은 부실기업들을 퇴출시켰고 재무개선약정, 워크아웃 등을 통한 기업 회생을 추진,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데도 일조했다.

미국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자신의 저서 <부의 미래>에서 “김대중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외환위기를 아시아의 어떤 지도자보다 잘 극복하고 한국 경제 체제를 건강하게 바꾼 지도자”라며 “여러 면에서 한국민들은 뛰어난 지도자로 인해 위기를 극복한 행복한 국민들”이라고 적었다.

‘햇볕정책’을 빼고는 DJ를 설명할 수 없다. 남북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그가 병상에 누워서도 잊지 못했던 일이다.

DJ는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 유화정책을 폈다. 그리고 이는 한반도의 냉전적 남북 대결구도를 해체하는 데 기여했다. 국민들의 대북 인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2000년 6월15일 DJ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관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광복 후 최초로 열린 정상회담에서 DJ와 김 위원장은 6·15 공동선언문을 채택, 남북화해협력에 새 지평을 열었다. DJ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 또한 누렸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재임시절 DJ에게 조언을 구해 대북정책을 수립할 정도를 그를 신뢰했다.

트레이드마크 ‘햇볕정책’
공과 모두 담은 DJ의 꿈

그러나 이러한 ‘공’ 뒤에는 ‘과’가 따랐다. 햇볕정책에 의한 대북지원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 남북정상회담도 생채기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DJ는 병상에 누워서도 남북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잊지 않았다. DJ의 최측근인 박지원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병상에서도 남북관계 진전을 바랐다”며 “위독한 중에도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소식을 듣고 기사를 계속 읽어달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박 의원은 “마지막 서거하실 때까지 내가 가서 현정은 현대회장의 방북과 5가지 합의사항, 그리고 ‘정부에서 방향전환이 있을 것 같다’는 보고를 드렸다. 마지막 임종하시는 날도 ‘대통령님께서 생전에 바라셨던 대로 남북의 교류협력을 통해서 한반도의 평화, 동북아 평화, 세계평화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북측도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의 주역인 DJ의 서거에 조전을 보내 애도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의 화환을 가지고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포함된 6명의 특사 조문단을 파견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양건 부장이 포함되는 등 실세들의 방문을 통해 남북 당국간 고위접촉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냉랭했던 이전과는 달리 최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김 위원장과 금강산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 등 5개항 합의를 이뤄낸 상태라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과제로 남은 지역주의
서거 계기로 해소될까

DJ 서거를 계기로 정치권은 지역감정 해소라는 과업을 떠안게 됐다. DJ는 평소 지역주의에 대해 1972년 공화당이 만든 신화라고 주장했지만 1987년 대선을 앞두고 YS와의 후보단일화 실패는 영호남간 지역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했기 때문이다.

DJ도 지역주의 해소를 위해 뛰었다. 1997년 대선에서는 “나도 김해 김씨로 경상도 사람이고, 나의 두 며느리도 부산에서 태어났다”며 영남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또한 취임하면서 “앞으로 호남이니 영남이니 따지지 않고, 지역적으로 차별받는 인사가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1998년에는 “지역주의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 대통령을 못하면 못했지 절대로 동서분단을 방치할 수 없다”고 지역주의 극복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호남의 맹주’라는 절대적 지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데다 집권 기간 내내 호남편애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수혜자’이기도 했음을 계속해서 지적받았다.

DJ가 서거 전 반세기 가까이 애증으로 얽혀있던 YS와 극적으로 화해를 한 것을 계기로 정치권 내에서 ‘동서화합론’이 부상하고 있다. 특히 DJ의 국장을 통해 이념과 당파, 지역갈등과 반목을 뛰어넘는 국민 통합이 이뤄질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여야도 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각각 당 차원의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DJ와 YS가 주도해 만든 민추협도 동서 화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민추협 회장인 김무성 의원은 “DJ 서거를 계기로 YS와 DJ 사이의 갈등의 골이 해소되면서 한국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지역감정의 벽이 허물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영호남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논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 노정객도 “이제 이념을 논할 단계는 지났다. 열린 보수와 건전한 진보는 맥을 함께한다”며 “정책 판단의 기준을 이념이 아닌 국가와 국민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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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