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공사 추천> 가끔은 혼자이고 싶어라, 훌쩍 떠나는 힐링여행 ③ 강원 동해

소박한 삶들 어깨 맞댄 ‘멋과 낭만의 도시’

논골담길은 1960~1970년대의 풍경이 오롯이 남아 있고, 담장에는 마을사람들의 질펀한 삶이 그림으로 고스란히 녹아 있다. 논골1길과 3길, 등대오름길 등 논골담길에는 드라마 같은 논골사람들의 이야기가 새겨졌다. 묵호등대에서 바라보는 망망대해와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촬영한 출렁다리를 지나 해안도로까지 논골담길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1980년대 풍경 오롯한 묵호 ‘논골마을’
해돋이가 아름다운 등대명소 ‘장관이네’

동해는 망상, 추암 등 맑고 깨끗한 해변뿐 아니라 청옥산과 두타산 등 백두대간이 이어지며 깊고 수려한 계곡을 간직한 고장이다. 애국가의 일출 장면이 담긴 추암해변의 촛대바위, 쌍폭포와 용추폭포의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무릉계곡도 꼭 들러야 할 동해의 명소다. 

고독도 향기로운 9월 여행길

묵호항은 한때 잘나가던 항구다. “거리의 개들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고, 밤새 불빛이 꺼지지 않는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이후 사람들이 떠나고, 불빛도 하나둘 꺼지며 옛 시절 이야기와 희망 없는 미래만 남았던 이곳에 요즘 사람들이 모여든다. 묵호항이 내려다보이는 묵호등대마을에 지난 2010년 논골담길이 만들어지면서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논골담길 여기저기 벽화가 있지만, 이곳이 벽화마을은 아니다. 벽화는 묵호항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공공미술공동체 ‘마주보기’ 회원들과 마을사람들은 2010년 잊혀가는 묵호를 재발견하자는 취지로 마음속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전을 부쳐 먹으며 즐기고, 한쪽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논골담길 프로젝트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을사람들이 직접 그렸다는 데 의의가 있다.


논골1길과 3길, 등대오름길로 구성된 논골담길은 어느 곳으로 올라가도 묵호등대에 닿는다. 거미줄처럼 얽힌 마을길을 빠짐없이 둘러봐야 묵호등대마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림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묵호등대마을의 역사는 묵호항이 열린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험한 뱃일이나 모진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묵호항이 가까운 언덕배기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하면서다. 삼척과 태백의 석탄, 동해에서 생산된 시멘트를 실어 나르면서 묵호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사람들이 몰렸고, 언덕에는 벽돌과 슬레이트로 지은 집이 들어찼다. 아랫마을에는 뱃사람들이, 윗마을에는 덕장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살았다고 한다. 


묵호등대마을의 벽화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오징어와 명태, 장화는 마을사람들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는 오징어와 명태를 말리는 덕장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묵호항으로 들어온 오징어와 명태를 지게나 빨간 고무대야에 담아 덕장으로 날랐다. 언덕 꼭대기 덕장으로 오르는 길은 늘 질퍽해서 묵호등대마을 사람들은 “마누라,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했을 정도다. 지금은 시멘트길이지만 당시에는 흙길이어서 논처럼 질퍽거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논골이란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했다. 
논골담길에는 텃밭이 많다. 잡초가 무성한 곳도 있지만, 고추와 가지, 호박 등 묵호등대마을의 소박한 삶을 키우는 텃밭도 제법 보인다. 묵호등대마을은 올해 ‘묵호등대마을 논골담길 텃밭 재생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4년 연속 국가공모사업에 선정되었다. 에코, 힐링, 여행, 유산 등의 테마로 채소와 꽃을 소재로 다양한 텃밭을 재생할 계획이어서 논골담길의 풍경이 더욱 화사하고 밝아질 것 같다. 


논골담길 정상에는 널찍한 공간과 함께 등대가 하나 있다. 묵호등대가 있는 묵호등대해양문화공간이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시비 너머로 1963년 처음 불을 밝힌 높이 21.9m의 묵호등대의 모습이 나선다. 묵호등대의 나선형 계단을 숨 가쁘게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일망무제의 바다, 청옥산과 두타산의 백두대간 능선이 거침없이 이어진다.
묵호등대는 영화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1968년 신영균·문희가 주연한 <미워도 다시 한번>의 촬영지로, 묵호등대 앞마당에는 ‘영화의 고향’ 기념비가 세워졌다. <미워도 다시 한번> 이후 40년이 지나 묵호등대를 알린 드라마가 있으니, 이승기·한효주가 주연한 <찬란한 유산>이다. 묵호등대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드라마에 나온 출렁다리를 만난다. 출렁다리에서 해안도로로 내려가거나 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서울 남대문의 정동쪽으로 알려진 까막바위에 이른다.


추암은 동해시의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해변으로, 삼척시의 증산해변과 이웃해 있다. 장엄한 일출 광경이 애국가의 첫 장면을 장식하면서 일출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추암 촛대바위는 옛부터 유명했다. 1788년 단원 김홍도가 정조의 명을 받아 그린 화첩 ‘금강사군첩’에도 등장한다. ‘금강사군첩’은 조희룡의 <호산외사>에 나오는 ‘명사금강사군산수(命寫金剛四郡山水)’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김홍도는 이곳 전망대에 올라 촛대바위와 주변 기암절벽을 상세히 묘사했다. 


촛대바위는 전망대에서 보는 것도 좋지만, 추암해변 끝자락에서 보는 것이 더 운치 있다. 한적한 해변 남쪽에는 해안 절벽을 따라 삼척 증산해변까지 데크가 조성되어 산책코스로 그만이다.
동해는 백두대간의 두타산(1353m)과 청옥산(1404m)을 품고 있는 고장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던가. 기골이 장대한 두타산과 청옥산의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을 이루는데,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을 본떠 무릉계곡이라 부른다.

일출 명소 보는 재미 쏠쏠


1000명이 앉아도 넉넉하다는 무릉반석을 지나 무릉계곡의 대표적인 명소 쌍폭포와 용추폭포까지 다녀오는 트레킹을 빼놓을 수 없다. 삼화사와 학소대를 지나 용추폭포까지 약 3km 거리다. 울창한 숲이 에워싸고 가파르지 않아 쉬엄쉬엄 다녀오기 좋다. 용추폭포에서 하늘문, 관음사를 거쳐 내려오는 코스도 권할 만하다. 가파른 철 계단에 서면 두타산과 청옥산의 굵직한 산줄기와 기암절벽이 쉼 없이 이어진다. 

자료제공 = 한국관광공사
www.visitkorea.or.kr

<여행정보>

당일 여행 코스
논골담길→묵호항→무릉계곡

1박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 천곡동굴→논골담길→망상해변→약천문화마을(숙박)
둘째 날 : 북평장→추암해변→무릉계곡→귀가

관련 웹사이트 주소
· 동해관광 www.dhtour.go.kr
· 논골담길 http://mukho.org

문의 전화
· 동해시청 관광진흥과 033)539-8172
· 논골담길(동해문화원) 033)531-3298
· 묵호등대 033)531-3258
· 천곡동굴 033)539-3630
· 추암관광안내소 033)530-2801
· 무릉계곡관광안내소 033)530-2802

대중교통 정보 
<버스> 서울고속버스터미널-동해 : 하루 20회(06:30~23:30) 운행, 3시간 소요.
동서울종합터미널-동해 : 하루 33회(06:30~21:35), 2시간 50분 소요.
* 문의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1688-4700, www.exterminal.co.kr 
동서울종합터미널 1688-5979, www.ti21.co.kr 

자가운전 정보 
동해고속도로 망상 IC→묵호항 방면 우회전→창호초등학교 입구에서 묵호등대 방면 해맞이길 좌회전→묵호등대

숙박 정보
· DQ모텔 : 동해시 부곡복개로, 033)535-2903 (굿스테이)
· 리사호텔 : 동해시 천곡로, http://lisahotel.com, 033)532-1667  
· 샘모텔 : 동해시 평릉길, 033)532-1212 (굿스테이)
· 망상오토캠핑리조트 : 동해시 동해대로, 
   www.campingkorea.or.kr, 033)539-3600
· 꿈의궁전호텔 : 동해시 일출로, 033)531-7400

식당 정보
· 오부자횟집 : 냄비물회, 동해시 일출로, 033)533-2676
· 대우칼국수 : 손칼국수, 동해시 일출로, 033)531-3417
· 부흥횟집 : 물회·회덮밥, 동해시 일출로, 033)531-5209

주변 볼거리
북평장, 감추사, 추암해변, 무릉계곡, 약천문화마을, 동해고래화석박물관, 망상해변, 천곡동굴, 가원습지 생태자연공원, 묵호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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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