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최근 장자연 사건의 사회분위기와 고질적인 노예계약 근절을 위해 제정된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를 두고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는 가운데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연예인들을 상대로 한 이른바 ‘노예계약’을 뿌리 뽑기 위해 가수와 연기자를 대상으로 한 표준계약서 두 가지를 도입했다.
이번에 마련된 표준계약서는 지난해 11월 공정위가 대형 연예기획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불공정조항이 대거 적발된 데 이어 장씨 자살사건이 터진 게 도입 계기가 됐다.
표준계약서를 보면 기획사는 연기자와 7년이 넘는 전속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 과도한 장기계약은 연예인이 다른 기획사로 옮길 기회를 박탈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획사와 연기자가 합의하면 계약을 갱신할 수 있다. 가수는 명시적인 계약기간 제한은 없지만 7년이 넘으면 계약 해지를 주장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기획사와 가수가 합의한 경우 해지권 행사를 제한할 수 있고 국외 활동 등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별도 합의에 따라 장기계약을 할 수도 있다. 가수의 경우 오랜 훈련과 준비기간이 필요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또 기획사가 연예인의 사생활을 과도하게 침해할 수 있는 독소조항도 삭제된다. 일례로 항상 자신의 위치를 기획사에 통보하게 하거나 사생활 일체를 미리 상의해 기획사의 지휘감독을 따르도록 한 조항을 꼽을 수 있다.
기획사가 연예인에게 인격권 침해로 느껴질 만한 행위 등을 요구하면 연예인은 이를 거절할 수 있고 계약 해지 및 손해배상 청구도 가능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연예인은 기획사의 매니지먼트 활동에 언제든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관련 자료의 열람·복사를 요청하면 기획사가 따르도록 했다. 기획사가 전속계약 권리를 다른 기획사 등에 넘기는 경우 사전에 연예인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한다.
장자연씨 사건 계기…채택 안 하면 집중감시
‘기획사에 위치 통보’ 삭제…배상 청구 가능
기획사들은 앞으로 표준계약서를 채택하지 않으면, 불공정 혐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돼 공정위의 집중 감시를 받게 된다. 또 기획사가 표준계약서를 채택하고도 이행하지 않으면 손해배상소송을 당할 수 있다. 공정위 한 관계자는 “계약 당사자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그동안 지적됐던 불공정조항들을 솎아내어 연예인이 실질적으로 대등한 계약 당사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공정위가 공시한 표준전속계약서 내용 중 기획사 측의 다양한 강요행위에 대한 연예인이 할 수 있는 대응책이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표준전속계약서 중 가수용 계약서 2조2항, 5조5항, 6조4항과 연기자용 계약서 2조2항, 4조5항, 5조4항은 연예인사생활 보장과 인격권 보호에 대한 부분이다.
가수용 계약서 2조2항은 ‘갑(기획사)의 매니지먼트 권한 범위 내에서의 연예활동과 관련하여 을(가수)의 사생활보장 등 을의 인격권이 대내외적으로 침해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5조5항은 ‘갑은 이 계약에 따른 을의 연예활동 또는 연예활동 준비 이외에 을의 사생활이나 인격권을 침해하거나 침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요구하여서는 아니 되고, 부당한 금품을 요구하여서도 아니 된다’, 6조4항에서는 ‘을은 갑이 제4조 제5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경우에는 이를 거부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연기자 계약서 또한 동일하다. 이번 계약서 제정이 연예계의 고질적인 성상납 문제와 관련된 장자연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것임을 볼 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 조항이 연예인들에 대한 부당하고 부적절한 강요행위를 막아주기에는 너무 헐겁고 사전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표준계약서 공시 하루 전 발표된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의 연예인 인권 실태 조사에서 부당한 강요행위를 거부한 연예인들이 더 큰 불이익에 직면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요구(술접대, 성접대 등 인권침해)를 거절했다 캐스팅에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들이 전체응답자 183명중 62.3%(114명)에 달했으며, ‘인격모독’(31%, 31명), ‘음해, 협박’(4.9%,9명), ‘폭언, 폭행’(3.8%,7명)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또한 역시 캐스팅 불이익, 가해자의 보복이나 동료들의 지탄, 악성댓글, 신상정보공개 등을 이유로 법정 대응조차 안 하는 것이 연예인들의 실상이었다.
연예인들은 또 대부분 ‘법적 대응을 해도 오히려 피해를 입는다’ ‘2차 피해가 두렵다’ ‘해봤자 달라질 게 없을 거다’라며 자포자기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표준계약서 20조1항 ‘중재법에 의하여 설치된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전문가들의 판정에 의해 해결하는 제도, 소송과 달리 단심으로 끝남)’가 미덥지 못한 부분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실력과 공정한 기회가 아닌 연줄과 운에 좌우되고 있는 캐스팅과 연예계 생리, 그리고 연줄과 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연예인이 아닌 연예기획사와 일부 힘있는 이들에게 있기 때문. 계약서상에 명시돼 있다 해도, 그나마 자기권리를 챙길 힘이 있는 일부 톱스타를 제외하고 ‘혹시 모를’ 기회를 포기해버리겠다는 힘없는 신인들이나 무명연예인들이 얼마나 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불행히도 이런 이들이 연예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검은 악습이 되풀이될 가능성은 여전히 충분한 반면, 계약서는 이들을 지키기에 너무 미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