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상자 'MB 불법대선자금' 의혹 추적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3.08.06 11:15:16
  • 댓글 0개

시한폭탄 초침소리 째깍째깍 "이재현(CJ그룹 회장) 털 때 알아봤다"

[일요시사=정치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관련한 불법대선자금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재현 CJ그룹회장의 개인비리를 수사하던 검찰이 지난 2007년 CJ그룹이 이 전 대통령의 측근에게 거액을 전달한 정황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 돈의 성격이 대선자금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법대선자금이란 정치권 핵폭탄의 심지에 다시 불이 붙은 셈이다. 그간 소문만 무성했던 이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의혹은 드디어 낱낱이 밝혀지게 될까? <일요시사>가 이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의혹을 추적해봤다.



역대 정권에서 불법대선자금과 관련해 자유로운 정권은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에서 당시 우리나라 한 해 예산의 10%에 해당되는 600억원을 대선자금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지금까지도 구설수에 오르고 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 때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3000억원의 대선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불법대선자금
자유로운 정권 없어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대선자금 수사에서 "노무현 캠프의 불법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이 넘으면 사퇴하겠다"고 초강수를 뒀지만 검찰은 한나라당에 823억원, 노무현 캠프에 114억원의 불법대선자금이 흘러들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대선자금의 10분의 1이 넘는 액수였다.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은 퇴임 후 한 강연에서 "검찰이 10분의 2, 3을 찾아냈더니 대통령 측근들이 '검찰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른다'고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검찰이 노무현 캠프의 불법대선자금의 규모를 그나마 축소시켜 발표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역대 대통령들은 대부분 불법대선자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가장 최근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명박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이 전 대통령과 측근들은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역대 어느 대선보다 돈을 적게 썼다. 깨끗한 대선을 치렀다"고 주장했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정치권 인사는 별로 없었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 17대 대선이 끝난 뒤 경선 때 21억8098만원, 대선 때 352억1322만원 등 총 373억9420만원을 선거비용으로 썼다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했다. 그러나 당시 박근혜 후보와 맞붙은 한나라당 경선은 본선보다 더 치열했다. 야권 대선주자들과의 지지율 격차가 워낙 커서 한나라당 경선에서의 승리가 곧 대선 승리로 여겨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2007 이명박 대선자금 얼마나 되기에?
다시 열린 판도라상자에 정치권 '벌벌'

경선과정에서 당에 엄청난 돈이 뿌려졌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이에 비춰볼 때 이 전 대통령 측이 신고한 경선비용 21억8098만원은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전 대통령은 임기 말 불법대선자금과 관련한 의혹들이 이곳저곳에서 불거져 나와 곤혹을 치렀다.

지난해 7월,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과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 등이 줄줄이 비리에 휘말려 검찰의 조사를 받는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이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대국민사과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특히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로 구속된 최 전 방통위원장은 재판 과정에서 "대선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며 수차례 불법대선자금을 받았음을 노골적으로 폭로했다.

저축은행 비리로 구속된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회장도 검찰조사 과정에서 이상득 전 의원에게 대선자금으로 쓰라고 돈을 줬다며 불법대선자금을 거론했다. 이명박정부의 실세로 군림했던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도 불법정치자금수수와 관련한 검찰조사에서 지난 대선자금에 대해 털어놓을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겨 불법대선자금과 관련한 의혹을 더욱 가중시켰다.

연이은 증언
검찰은 모르쇠


이외에도 이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과 관련한 증언은 줄을 이었지만 이명박정권 하에서 검찰은 불법대선자금 수사에 너무나도 소극적이었다. 심지어 검찰은 노골적인 모르쇠로 불법대선자금 의혹 덮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검찰이 불법대선자금 수사를 외면한 표면적인 이유는 공소시효였다. 지난 2007년 12월 정치자금법의 개정으로 대선자금에 대한 공소시효는 5년에서 7년으로 늘었지만 법 개정 전인 2007년 12월 이전에 받은 대선자금은 공소시효가 5년만 적용된다. 2007년 대선 경선 전 대선자금을 본격적으로 모았다면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됐거나, 수사에 착수하자마자 공소시효가 만료된다는 이유였다.

민주당에서는 이처럼 신빙성 있는 증언들이 줄을 잇는데 수사를 안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검찰을 질타했지만 검찰은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검찰은 MB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권재진 전 법무장관과 충직한 MB맨으로 불리는 한상대 전 검찰총장, 그리고 BBK 주임검사로 이명박정부 들어 승승장구했던 최재경 전 중수부장 등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정부가 새롭게 출범하면서 검찰의 분위기는 180도로 바뀌었다. 검찰 뿐만 아니라 감사원, 국세청 등 국내 사정기관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해 MB정부와 관계가 깊었던 대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새정부 들어 사정기관의 집중조사를 받고 있는 CJ그룹과 효성그룹, 롯데그룹은 모두 MB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기업들이다. 특히 CJ그룹 수사는 박근혜정부 들어 실시된 첫 대기업 수사였다. 수천억원대의 탈세 및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 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고려대 출신으로 이명박정부의 실세로 불렸던 천신일 세중나모회장, 곽승준 전 미래기획위원장,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과 돈독한 친분을 자랑했었다.

검찰은 최근 이 회장의 개인비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CJ그룹이 지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이 전 대통령의 한 측근에게 거액을 건넨 정황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일단 돈의 성격이 대선자금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돈이 대선자금으로 확인되더라도 공소시효가 5년인 당시의 정치자금법이 적용돼 처벌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판도라상자가 다시 한 번 열리면서 정치권은 긴장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검찰이 사실상 정관계 로비 수사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으로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또 정치권에서는 박근혜정부가 이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의혹을 정국반전의 카드로 적극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의혹은 박근혜 대통령에겐 무척 매력적인 정국반전 카드다.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으로 여론의 관심을 환기시켜야 하는 박 대통령으로서는 이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의혹을 들춰내 전 정권과의 선긋기 및 차별화를 확실하게 하는 동시에 당내 친이계를 견제하고 국정원 이슈까지 희석시킬 수 있는 다목적 카드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친이계 현역의원 몇 명만 불법대선자금과 연루되었다는 정황만 나와도 국정원 이슈는 당분간 묻히게 될 것"이라며 "공소시효가 지나 실제로 처벌받지는 않겠지만 친이계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달라진 검찰
털리는 친MB

게다가 새정부가 들어서면 전 정권과 관련한 비리 수사는 그동안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박 대통령은 평소 전 정권의 잘못을 인위적으로 들춰내진 않겠지만 자연스럽게 나오는 전 정권의 문제에 대해선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때문에 지난 2007년 모금한 불법대선자금의 공소시효는 이미 지났지만 앞으로도 사정기관을 통해 이 전 대통령과 관련된 기업들을 조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거져 나오는 불법대선자금 의혹이 상당 부분 밝혀질 가능성이 크다.

현재 국내 사정기관에는 과거와 달리 이 전 대통령을 보호해줄 인사도 없다. 비록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이 전 대통령과 관련한 불법대선자금 의혹을 자연스럽게 언론에 흘리는 것만으로도 박 대통령은 원하는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

CJ 털다 발견한 불법대선자금 정황
박근혜, 친MB기업 터는 이유 있다?


이미 검찰을 비롯한 감사원·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 등 사정기관들은 CJ그룹의 다음 타깃으로 롯데를 지목하고 롯데그룹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롯데그룹은 MB정권에서 급성장했다. 안보상의 이유로 수 십년 간이나 허가를 받지 못했던 제2롯데월드의 건설을 허가 받는가 하면, 롯데는 MB정부 시절인 2007년 말부터 2012년 말 사이 49조2000억원이던 자산 총액이 95조80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처럼 앞으로도 상당기간 각종 사정기관의 칼날은 MB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대기업들을 향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지난 2007년 불법대선자금의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다는 점은 오히려 박 대통령에겐 유리한 조건이다. 자칫 수사도중 새누리당의 현역의원들이 불법대선자금과 연루돼 처벌을 받게 된다면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국회 내 과반이 깨지고 정당지지도와 오는 10월 재보선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이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처럼 동정론이 일어 역풍을 불러올 소지도 다분하다.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것은 박 대통령이 이 같은 후폭풍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다목적 카드
MB의 위기

상황에 따라 아직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카드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동안 정치권에서는 이 전 대통령이 대선 승리 후 당선축하금 명목으로 대기업의 후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었는데, 대선 승리 후인 2008년 받은 불법정치자금이라면 정치자금법이 개정된 이후 이므로 아직 공소시효가 남아 있다.

이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과 관련, 정치권에서는 문제는 검찰의 의지라는 이야기가 자주 거론됐다. 일례로 지난 1993년 김영삼정부가 출범한 직후 검찰 특수부에는 한 명단이 배포됐다고 한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사는 "아무런 혐의나 단서도 없이 단지 이름만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검찰은 당시 명단에 있었던 사람들의 대다수를 구속하는데 성공한다. 검찰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지금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역대 불법대선자금과 관련해 자유로운 정권은 없었다. 그것은 심지어 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박 대통령과 검찰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이 전 대통령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간 소문만 무성했던 이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판도라상자는 실제로 열리게 될까? 이 전 대통령은 새정부 초반부터 궁지에 몰리게 됐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다시 찾아온 '검찰 전성시대' 

초대형 이슈 쥐락펴락 '슈퍼 갑'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과 전 국정원장의 개인비리, 재벌 총수의 횡령·배임·탈세와 비자금 조성, 전 국세청장의 세무조사 무마 금품수수 의혹,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史草) 실종사건까지. 검찰이 잇따르는 대형사건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 등 전 분야의 굵직한 사건이 모두 검찰 손으로 들어오면서 검찰의 존재감이 한껏 높아진 것이다. 특히 관련사건 수사과정에서 국정원과 국세청, 경찰청 등 검찰이 타 권력기관에 대한 압수수색까지 실시하면서 우리나라에선 검찰이 '슈퍼 갑'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법조계 관계자는 "검찰이 기본과 원칙, 공정성을 제대로 지키지 않을 경우 '기회'는 곧바로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며 공정한 수사를 주문했다. <일>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