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사연> 송대관 쪽박 풀스토리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07.01 11:3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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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황제’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일요시사=사회1팀]'해뜰 날' '유행가' '네박자'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가수왕에 등극해 대중들의 사랑을 듬뽁 받아온 송대관. 잘나가던 트로트 가수 송대관이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가수 송대관이 최근 수백억 원대 연대보증 채무를 갚지 못해 서울중앙지법에 개인회생 신청을 냈다. 송대관은 개인회생 신청에 앞서 토지개발 분양사업에 뛰어든 부인 이모씨의 대출금 채무를 연대보증했다가 결국 200억 원대 채무를 떠안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저축은행에서 대출받은 10억원을 갚지 못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주택을 경매에 내놓았다. 해당 집은 토지면적 284㎡에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다.

부인 때문에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한 송대관. 여기까지는 다른 어떤 가수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돌봐 주는 이 하나 없는 그로서는 어떤 길을 찾아야 가수가 될는지 막연할 뿐이었다. 그래서 용기 내어 찾아 간 곳이 ‘오아시스 레코드사’였고 이곳에서 손진석 사장을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송대관은 레코드사의 일을 거들어 주며 가수 공부를 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작사를 해서 ‘해뜰 날’이라는 노래를 취입한다. 1976년이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본인 자신도 놀랄 정도로 큰 반응이 일었고, 그 해에 방송국 가요대상 3개를 휩쓸었다. 그야말로 해가 뜬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름은 알려졌지만 가요시장이 크지 못해서 경제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1980년에 그는 미국행을 결심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하지만 낯 선 곳에서의 고생은 또 다른 가슴앓이를 안겨줬고, 결국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어릴 때 정읍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의 각오로 열심히 가수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노력만 한다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운도 많이 따라 주었고, 상복도 많았다. 특히 그는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렇듯 가수 송대관은 20세가 되던 1967년에 ‘인정많은 아저씨’라는 곡으로 처음 데뷔하여 ‘해뜰날’로 가수로서 처음 전성기를 맞이하고, 일약 스타덤에 올라 한창 잘 나가며 꾸준히 음반 활동을 해왔다. 1998년에는 ‘네 박자’라는 곡으로 전 세대층을 포섭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따라 부르는 국민애창곡이 된 적도 있다. 또한 송대관은 어려운 시절 동고동락했던 태진아와 함께 콤비로 불리며 현재까지 매년마다 라이벌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2003년에는 부인 이씨가 작사한 ‘유행가’라는 곡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 곡은 젊은 층이 즐겨부르는 곡으로 자리매김했다. 2008년에는 제2대 대한가수협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잘나가던 송대관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몰아닥쳤다. 과거 송대관 부부가 미국행을 결심한 이유는 생활고 때문이었다. 당시 송대관 부부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갚아야 할 외상값이 가득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겨우내 작은 분식집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분식집에 나와 일을 했고, 배달을 하던 중 출산을 하러가야 하는 등 두 부부는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생활고에 송대관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겉보기와 달리 자신과 아내가 측은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견딜 수 없어 미국행을 결심했다. 남들의 눈을 피해 달아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송대관은 미국생활을 회상하며 “솔직히 미국 생활 중 고향병을 앓았다”며 “미국에 있는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 가자마자 가족의 옷만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옷만 가지고 왔다면 오히려 다행이었을까, 엄청난 양의 빚더미를 함께 갖고 온 것이 지금의 비극을 낳았다.

지난 6월18일 서울 용산경찰서는 수억 원대 부동산 사기 혐의로 고소를 당한 가수 송대관씨 부부를 기소, 서울서부지검에 해당 사건을 송치했다. 송대관 부부를 고소한 캐나다 교포 A씨에 말에 의하면 “송대관 부부를 믿고 토지개발 사업에 3억7000만 원을 투자했지만, 2∼3개월이 지나고 나서도 소유권 이전등기가 되지 않았고 개발사업 인허가도 받지 못했다” “또한 해당 토지에 160억 원이 넘는 근저당이 설정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과거 송대관 부인 이씨는 토지개발 사업을 위해 저축은행에서 10억을 대출받았다. 송대관은 아내를 위해 연대보증을 섰지만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빚을 갚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토지에 근저당이 설정돼 있었다. 결국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근저당 166억을 빚으로 껴안게 된 것이다.

현재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소재한 송대관 소유의 주택은 지난 6월26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첫 경매에 올랐지만, 송대관이 회생신청을 하면서 서울 이태원 집과 경기 화성시 땅에 대한 경매가 일시 중단됐다. 회생신청을 하게 되면 신청자의 채권, 채무 등 재산상태를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조사기간 채무자의 부동산이 경매 중이더라도 경매진행절차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주택은 송대관 부인 이씨가 저축은행에서 대출 받은 10억 원을 갚지 못해 올해 1월 경매 신청 된 것으로, 등기부등본상 채권을 다 합치면 166억원에 달한다.

한 관계자는 “송대관의 회생신청이 받아들여지게 되면 월 소득액과 총 채무액을 기준으로 정해진 변제금을 갚아 나가게 되고 회생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개인 파산을 할 수 있다”며 “회생 결정 여부와 관계 없이 조사가 끝나게 되면 경매는 다시 진행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 언론 매체는 인터뷰를 통해 이씨의 심경을 물었다. 이씨는 “억울하고 착잡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공인의 아내로서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심경”이라고 말했다. 송대관은 “법원의 회생절차 신청을 통해 연예 활동을 계속하면서 채무를 변제할 때까지 성실하게 갚아나가겠다”며 “내 모든 재산과 앞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채무를 반드시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대로 끝?

부인 이씨는 2009년 마카오의 샌즈 호텔과 베네시안 호텔에서 각각 5000여만 원과 10억원대의 판돈이 걸린 도박을 한 혐의로 2011년 기소돼 10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누리꾼들은 송대관이 자신과 상관없는 부인의 일이라는 발표에 많은 비난을 퍼부은 바 있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송대관 개인 회생 가능?

개인회생은 원칙적으로 과다한 채무(담보 10억, 무담보 5억 원 이하)를 진 개인이 5년간 생계비를 제외한 수입으로 빚을 갚아나가는 것이 주요골자다. 따라서 이번 송대관 개인회생 사건은 채무액이 워낙 크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미지수다.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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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