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쇄 풀리는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전말

  • 조아라 archo@ilyosisa.co.kr
  • 등록 2013.05.30 14: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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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어 모아 담더니 한번에 모두 총살

[일요시사=정치팀] 한국전쟁 당시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에 전국이 피로 물들었다. 산처럼 쌓인 시체는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그렇게 목숨을 잃은 이들만 30만명에서 100만명으로 추산된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학살’이었다. 단지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낙인이 그들을 끔찍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진실은 오랜 세월 빛을 보지 못했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고통에도 ‘빨갱이’라는 족쇄 때문에 쉬쉬하며 오랜 세월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그들에게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된 지 6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야….



‘보도연맹’은 몇몇 공안 담당검사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자의 다수를 차지했던 사상범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관계부처와 기타 사회지도자들의 검토와 동의를 거쳐 만든 사실상 관변단체다. 다시 말해 ‘빨갱이 관리조직’이었다. 보도연맹은 좌익인사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보도연맹원(이하 연맹원)으로 가입시켜 한국전쟁 직후 이들을 총살하거나 무자비하게 때려죽였다.

회원 가입 강제 할당
‘데스노트’도 실적주의

보도연맹 중앙본부에는 내무부 주관에 법무부, 검찰청, 국방부 등 행정부의 각 부서가 합동으로 참여했다. 여기에 입법부와 사법부가 공조하는 형태로 구성됐다. 정부가 직접 민간인 학살에 개입할 수 있었던 구조다.

좌익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전향하거나 남조선노동당을 탈당한 이들이 당초 보도연맹 가입 대상자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연맹원의 규모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강제 할당에 의한 회원 가입방식에 의한 탓이다. 전문가들은 좌익뿐만 아니라 이승만정권의 테두리 안에 명확하게 포함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가입대상, 즉 학살대상이었다고 말했다.

연맹원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1950년 6월15까지 계속됐다. 보도연맹 중앙본부는 각 지역 경찰들에게 연맹원을 모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에 따라 마을 구장(이장) 또는 자수한 마을 책임자들이 사람들을 연맹원으로 가입시켰다.

비료나 고무신 받으려
자진해서 도장 찍어


좌익전향자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도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받았다. 거부할 경우 품앗이나 배급 등 마을 공동생활에 불이익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협박을 받았다.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부는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보도연맹 현장 생존자 임모씨는 “이승만정권부터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가입했다. 당시 마을의 젊은 남자들은 좌익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권유에 따라 가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라고 진술했다.

참고인 우모씨의 이야기는 더욱 충격적이다. “마을 곳곳에 ‘자수하면 살고, 아니하면 죽는다’라는 글귀를 엄청나게 써놓았다. 그게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글이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아도 죽고, 해도 죽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단체의 성격도 구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입 도장(주로 지장)을 찍은 가입자도 있었다. 무학의 농민들이 그 대상으로, 그것이 자신을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실상 이승만정권 테두리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가입대상
현장 생존자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가입했다”

진상조사 신청인(이하 신청인) 박모씨는 “학살이 있기 한 달 전쯤 품앗이도 하고 비료나 고무신을 타려면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해서 내용도 모르고 남편이 도장을 찍었다”라고 말했다.

현장 생존자 유모씨는 “사건(학살)이 일어나기 20~30일 전쯤에 지서(파출소)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마을사람 12명과 함께 갔다. 거기에 순경이 저희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 종이(보도연맹 가입신청서)를 한 장씩 나눠주면서 아무 설명도 없이 무조건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라고 하여 시키는 대로 이름에 지장을 찍었다. 당시 함께 지서로 간 사람들은 모두 좌익 또는 우익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저는 옆 마을에 거주하며 좌익활동을 했던 전영문이 우리 이름을 일러주어 이를 근거로 경찰에서 가입시킨 것으로 짐작했다”라고 진술했다.


이들은 모두 경찰에 의해 불시에 소집됐다. 경찰서에 모여 반공교육을 받거나 노역을 했다. 심한 경우 우익단체 단원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신청인 김모씨는 “진천면 문봉리의 강주완은 좌익활동을 했다고 우익단원들이 집의 세간을 부수고 구타하여 앓다가 죽었다”라며 구타로 말미암아 살해당한 비극적인 사연을 전했다.

그리고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긴급명령1호를 내렸다. 이에 따라 정부 판단 하에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약식재판과 사형선고가 가능하게 됐다. 당시 경찰서 순경으로 근무했던 김모씨는 전쟁이 일어난 날 상부로부터 연맹원 명단을 올려보내라는 전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 후 2~3일에 걸쳐 연맹원들을 소집시키라는 지시가 각 지역 경찰서에 내려왔다. 대학살의 전조가 울린 것이다.

이승만·박정희정권
사건 거론 철저 금지

각 지역 관계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연맹원들을 소집했다. 종을 치거나 경찰이 논밭으로 찾아다니기도 하고 교육이 있다거나 비료를 나눠 준다거나 피난을 시켜주겠다고 속여서 모으기도 했다.

“7월8일 오전에 들에서 논을 매고 있던 중 징소리를 듣고 가보니 마을 마당에 (마을 청년) 40여 명이 모여 있었고 총을 맨 지서 직원 1명과 소방대원 10여 명이 있었다. 그들을 따라갔는데, 그때까지 전쟁이 난 것을 몰랐다.”

“이웃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 마당에 가면 비료 한 짝을 준다 하니 아버지에게 연락하라’라고 하여 들에서 일하던 아버지께 연락을 드렸다.”

“지서에서 나온 경찰관들이 ‘인민군이 쳐들어와 난리가 났다. 우선 연맹원들로부터 피난을 시켜주겠다’라고 했다.”

당시 소집된 마을 사람들의 진술이다. 이들 대다수는 소집 및 감금에 저항하거나 불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고 자신에게 큰 처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연맹원들은 감금된 상태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 구타로 살해당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군인들은 저희를 공산패라고 하며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리고 나중에는 쇠로 창을 만들어 옆구리를 쑤셔 몸에서 피가 났다. 때리다가 총 개머리판이 부리지는 경우도 있었다.”

현장 생존자 임모 씨의 진술이다.

6·25 발발하자 보도연맹원 소집 지시 떨어져, 학살의 대전조
소송 50건 진행, 오는 6월 소멸시효 끝나 구제 방법 전무


연맹원 딱지가 붙은 수많은 민간인은 1950년 7월 초에 창고, 갱도, 산골, 우물 등에서 총살당하거나 수류탄 등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사상자만 하루에 1500명에 달했다.

이승만정권에서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을 거론하는 것은 철저히 금지됐다. 박정희정권은 학살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의 유골을 수습한 유가족들을 빨갱이로 몰아 혁명재판에 부쳐 그들을 압박했다.

또한 이후에도 피해유가족들을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해 감시했다. 이들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여 정상적인 사회생활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후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정부 기록들은 모두 소각됐으며 진상은 완전히 은폐됐다.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한 지 60년이 지난 후, 대법원은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배상책임이 없다는 정부의 주장을 배척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에 의해 피해자로 판명된 유가족들은 정부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조사위의 활동이 2010년 6월 이명박정권에 의해 정지돼, 조사위로부터 피해자 결정을 받지 못한 유가족들은 더 이상 국가에 배상청구를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피해자, 조사위 결정 받아야
보상입법 마련도 어려워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조사위에 의해 손해배상사건 위자료 규명 결정이 난 이후 이를 근거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처음부터 소멸시효가 큰 문제가 됐다”라며 “조사위의 결정이 있은 후 3년이 지나면 소멸시효가 끝나 이 사건을 더 이상 다룰 수 없다. 6월 말이 되면 더 이상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결정을 받은 피해 유가족들에게 이 같은 사실이 많이 알려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시효가 완성될 경우, 보상입법이 마련되지 않는 한 피해유족들이 보상받기는 어렵지만 그것도 가능성이 낮다. 게다가 대법원에서 조사위로부터 피해자로 결정하더라도 그 요건을 엄격히 해석하고 있어, 막상 손해배상을 받는 것도 쉽지 않다. 피해 규모가 약 800억 정도로 국가 예산에 대한 정책적 고려를 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전국에서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관련 소송은 현재 50건 정도 진행되고 있다. 피해유족 윤모씨는 “아버지가 보도연맹 연루 및 좌익으로 몰려 억울하게 참살 당했다. 신문에서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 기사를 읽고 아버지의 억울함과 가족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라고 말했다. 
 
조아라 기자 <arch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그 때 잔인한 사살 현장에서는..

생존자 확인하고 ‘확인사살’

1950년 7월11일 새벽, 경남 창원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국가보도연맹원으로 가입한 민간인들이 창고에 감금돼 있었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간 군인들은 구금자에게 기관총과 소총으로 총격을 가했다. 그리고 수류탄을 투척했다.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 김모씨는 “군인들은 ‘산 사람은 일어나면 살려준다’라고 했고, 그 말에 총을 맞지 않은 사람들이 일어서자 재차 기관총을 쏘았다”라고 과거사조사진상위원회와의 면담을 통해 밝혔다.

또 다른 생존자는 “1차로 총을 쏜 후 군인들이 말하길 ‘산 사람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문 앞으로 걸어 나오면 살려주겠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생존자 몇 사람이 ‘대한민국 만세’를 하며 문 앞으로 걸어 나가자 군인들이 그들을 총으로 사살했다”라고 전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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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전국 한의과대학교에는 ‘졸업준비위원회’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졸업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명목상 자발적인 가입을 독려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졸업준비위원회(이하 졸준위)는 졸업앨범 촬영, 실습 준비, 학번 일정 조율, 학사 일정과 실습 공지, 단체 일정뿐 아니라 국가시험(이하 국시) 대비를 위한 각종 자료 배포를 하고 있다. 매 대학 한의대마다 졸준위는 거의 필수적인 조직이 됐다. 졸준위는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체(이하 전졸협)’라는 상위 조직이 존재한다. 자료 독점 전졸협은 각 한의대 졸업준비위원장(이하 졸장)의 연합체로 구성돼있으며, 매년 국시 대비 자료집을 제작해 졸준위에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텐’ ‘의지’ ‘의맥’ ‘의련’ 등으로 불리는 자료집들이다. 실제 한의대 학생들에게는 ‘국시 준비의 필수 자료’로 통한다. 국시 100일 전에는 ‘의텐’만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졸준위가 없으면 국시 준비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정설이다. 한의계 국시는 직전 1개년의 시험 문제만 공개되기 때문에 시험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시 문제는 오직 졸준위를 통해서만 5개년분 열람이 가능할뿐더러, 이 자료집은 공개자료가 아니라서 학생이 직접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상 전졸협이 자료들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자료집을 얻을 수 있는 경로는 단 하나, 졸준위를 결성하는 것이다. 졸준위가 학생들의 투표로 결성되면 전졸협이 졸준위에 문제집을 제공한다. 이 체계는 오랫동안 유지돼왔고, 학생들도 졸준위를 통해 시험 자료를 제공 받는 것이 ‘관행’처럼 받아들여왔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반드시 결성돼야만 한다는 기조가 강하다. 학생들의 반대로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시 전졸협은 해당 학교에 문제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은 모든 학생들의 가입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졸준위 가입 여부는 실질적으로 선택이 아니다. 자료집은 전졸협을 통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에, 졸준위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문제를 얻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문제집을 받아볼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학생들의 해당 학년 학생들을 모두 가입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 한 대학교에서는 졸준위 결성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는데 익명도 아닌 실명 투표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진행했지만 반대자가 나오자 실명 투표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오기 어렵다. 실명으로 투표가 진행되는 데다,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후 자료 배포·학년 일정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 실명 투표로 진행 가입시 200만원 이상 납부 필수 문제는 이 졸준위 가입이 무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졸준위에 가입하면 졸업 준비 비용(이하 졸비)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데, 그 비용이 상당하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한 대학교의 졸비는 3차에 걸쳐 납부하도록 했는데 1차에 75만원, 2차에 80만원, 3차에 77만원 등 총 232만원 수준이었다. 이는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금액이다. 금액 산정 방식은 졸준위 가입 학생 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나머지 인원의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된다. 심지어 2명 이상 탈퇴하게 된다면 졸준위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은 ‘졸장’의 주도 하에 움직인다. 졸장은 학년 전체를 대변하며 전졸협과 직접 소통하는 역할을 맡는다. 실제 졸장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탈퇴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 오갔을 정도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졸준위가 결성되면 가입한 모든 학생들은 졸준위의 통제를 받는다.<일요시사>가 입수한 한 학교의 규칙문에 따르면 졸준위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었다. ▲출석 시간(8시49분59초까지 착석 등) ▲교수·레지던트에게 개인 연락 금지 ▲지각·결석 시 벌금 ▲회의·행사 참여 의무 ▲병결·생리 결 확인 절차 ▲전자기기 사용 제한 ▲비대면 수업 접속 규칙 ▲시험 기간 행동 규칙 ▲기출·족보 자료 관리 규정 등이다. 학생들이 이 규정을 어길 시 졸준위는 ‘벌금’을 부과해 통제하고 있었다. 금액도 적지 않았다. 규정 위반 시 벌금 2만원에서 50만원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병결이다. 졸준위는 병결을 인정하기 위해 학생에게 진단서 제출을 요구하고, 그 내용(질병명·진료 소견·감염 여부 등)을 직접 열람해 판단했다. 제출 병원에 따라 병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지도 있었다. 한 병원의 진단서가 획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단체가 학생의 개인 의료 정보를 열람해 병결 여부를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은 학생들 사이에서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했다. 질병이 있어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고, 병결을 얻기 위한 절차가 학습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규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졸준위는 대면 면담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3:1로 면담을 진행하는 등 학생이 위축될 수 있는 방식을 행하기도 했다. 전자기기 사용 불가 규칙 어기면 벌금도 이 같은 문제로 탈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실제 A 대학 졸준위 전체 학번 회의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한 학생은 규정에 문제를 느껴 졸준위 측에 탈퇴를 의사를 밝혀왔다. 이 회의에서는 그간 탈퇴 의사를 밝힌 학생과의 카톡 대화 전문이 학생들에게 공개됐다. 공개된 카톡 내용에는 탈퇴 과정이 담겨있었는데 순탄하지 않았다. 졸준위 측은 탈퇴 의사를 즉각적으로 승인하지 않았고, 재고를 요청하거나 면담하는 방식으로 요청을 지연했다. 해당 학생이 다시 한번 탈퇴 의사를 명확히 밝힌 뒤에도, 졸장은 “만나서 얘기하자”며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대화를 공개한 뒤 학우들에게 ‘졸준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졸준위 운영이 조직 이탈 자체를 문제로 판단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압박을 가한 정황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당 학우는 탈퇴 확인 및 권리 포기 동의서에 서명한 뒤에야 졸준위를 탈퇴할 수 있었다. 탈퇴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험 기간 중, 강의실 앞을 지나던 탈퇴 학생은 졸준위 임원 두 명에게 “제보가 들어왔다”며 불려 세워졌다. 임원들은 이 학생이 학습 플랫폼 ‘퀴즐렛’을 사용한 점을 언급하며, 그 자료 안에 졸준위에서 배포한 기출문제가 포함돼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졸준위에서는 퀴즐렛에 학교 시험 내용이 있다며 탈퇴자가 보지 못하도록 사용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한편, 전졸협은 10년 전 자체 제작한 문제집으로 논란된 적이 있다. 당시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문제가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예상 문제집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시험이 끝난 직후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 60여명을 상대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압수했고, 국가시험원까지 압수수색해 기출문제와 대조 작업에 들어갔다. 기형적 구조 문제가 된 교재는 ‘의맥’ ‘의련’ 등 졸준위 연합체인 전졸협이 제작·배포해 온 자료들이다. 학생들은 교재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신분증을 확인한 후 배포하는 등 통제된 방식으로 유통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는 “학생들이 전졸협을 통해서만 기출문제를 구할 수 있는 구조는 기형적”이라며 “국가고시를 위해 몇백만원씩 돈을 받고 문제를 제공하는 건 문제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