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기획> 정권별 '재계인사 키워드' 전격비교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3.03.26 16: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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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가 만사…“줄 잘 대면 5년이 편하다”

[일요시사=경제1팀] 정권이 바뀌면 많은 것이 바뀐다. 기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새 정권 아래서 승승장구 하기 위해 최소한 미운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새 권력에 줄을 대려 애쓴다. 경험상 권력과의 친분은 어떻게든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 이러한 시도는 곧 정기인사로 나타난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새 정권 출범은 주요그룹 인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권력과 줄대기가 향후 5년간 기업성패의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던 만큼, 과거 주요 그룹들은 사장단 및 임원인사를 대통령 선거 이후로 미루곤 했다. 대통령이 당선되면 지연이든 학연이든 새 지배 권력과 가까운 인사들을 그룹 핵심 포스트에 전진 배치하는 것 또한 당연한 관행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재계는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기 위한 행보를 보였다. 공통 키워드는 ‘여성’이다.

여기도 '여' 저기도 '여'
핵심 포스트에 포진

재계의 ‘여성 파워’는 갈수록 세지고 있다. 그간 남성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대기업 최고경영진에 상대적으로 소외돼온 여성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여풍’이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여성 인재들은 특유의 치밀함, 유연성, 남성 못지않은 리더십을 인정받으며 각 분야에 중용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먼저 포스코는 창사 이래 처음 해외 법인장에 여성 임원을 임명했다. 포스코는 지난 7일 정기 임원인사를 발표하고 “22일자로 양호영 스테인리스열연판매그룹장을 상무보로 승진시켜 중국 청도포항불상유한공사 법인장으로 임명한다”고 밝혔다.

포스코에서 여성이 해외법인장을 맡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포스코의 이번 인사에서는 처음으로 공채 출신 여성 임원도 뽑혔다. 최은주 사업전략2그룹장이 포스코A&C의 상무로 승진한 것.


포스코에서는 2010년 오인경 포스코경영연구소 상무가 처음으로 여성 임원이 됐지만 아직까지 공채 출신 여성 임원은 나오지 않았다. 이 밖에 유선희 글로벌리더십센터장은 상무보에서 상무로 승진해 미래창조아카데미원장에 임명되는 등 이번 포스코 정기 인사에서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삼성도 올해 여성 임원 발탁에 적극적인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삼성 그룹 전체의 여성임원은 42명으로 올해 임원 인사에서 12명 여성 인력을 임원으로 승진시켰다. 여성 승진 규모는 역대 최대다. 삼성 여성 임원 승진자는 지난 2011년 7명, 2012년 9명에 이어 2013년 12명으로 크게 늘었다.

올해 승진자 중 부사장과 전무에 오른 여성 임원은 2명이다. 삼성전자 이영희 전무가 1년 발탁으로 부사장에, 삼성SDS 윤심 상무는 전무로 각각 승진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그간 지속적으로 여성인력 활용을 강조해왔으며 지난해부터는 심수옥 삼성전자 부사장 등 부사장급 이상의 고급 여성 인력을 양성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시대, 여성 임원·CEO로 전진배치
이명박 시대, 고대 출신 그룹 실세로 부상

LG그룹 에서도 여성인재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LG의 경우 올해 정기 임원 인사에서 LG디스플레이의 김희연 상무와 LG U+의 백영란 상무, LG생활건강의 김희선 상무를 임원으로 승진시켰다.

코오롱도 올해 그룹 임원 정기인사에서 이수영 코오롱 워터앤에너지 전략사업본부 본부장 전무를 공대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승진 선임했다. 코오롱그룹 여성 최고경영자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부사장은 지난 2003년 차장으로 코오롱그룹 웰니스TF에 입사한 뒤 10년 만에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다.

문화 콘텐츠를 강조하는 CJ그룹 역시 여성임원을 앞세워 부드러운 리더십을 전개하고 있다. 2013년 정기 임원인사에서는 2명의 여성임원이 배출됐다. 바이오 사업에서 기술개발 혁신에 기여한 김소영 바이오 기술연구소 팀장과 지역채널 매체 경쟁력 강화에서 우수한 성과를 보인 강명신 CJ헬로비전 커뮤니티 사업 본부장이 각각 상무대우로 승진했다.


MB정부 출범 땐
고대 출신으로

이는 MB정부 출범 때와는 확 달라진 모습이다. 이명박 정권 초기 주요 그룹들은 공격경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인사를 단행하고 ‘고려대 출신’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주류를 이뤘다.

가장 주목 받은 것은 롯데그룹이다. 롯데는 40대 후반의 ‘젊은 피’ 임원과 함께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수장들을 대거 기용하고 공격경영에 나섰다.

장경작 호텔롯데 대표이사를 호텔부문 총괄사장직에 임명하고 정범식 호남석유화학 대표이사를 롯데대산유화 대표이사에 겸직하게 하는 등 총 155명의 임원에 대한 정기인사를 단행했다.

이중 승진 인사만 142명. 당시 롯데 인사는 거의 ‘파격’에 가까웠다. 특히 호텔부문 총괄사장에 임명된 장경작 대표는 이 대통령과 고대 경영학과 동기동창으로 재계의 대표적인 ‘MB라인’으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혈연·지연·학연 인맥 총동원 코드 맞추기

MB를 있게 한 현대가의 인사에도 고려대 출신이 눈에 띄었다. 정몽윤 회장이 이끄는 현대해상화재보험에서는 이 대통령의 고려대 경영학과 후배인 이철영 현대해상 경영총괄 사장이 대표이사로 승진했고, 현대자동차그룹에서는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인 최재국 현대차 사장과 고려대 경영학과 석사 출신의 김용환 현대차 사장이 유임에 성공했다. 

그룹 오너인 최태원 회장 자신이 고려대 출신인 SK그룹에선 SK네트웍스 경영서비스컴퍼니부문 사장으로 승진한 조기행 사장과 SK인천정유에서 SK텔레콤 CFO로 인사 이동한 이규빈 전무 등이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이었다.

참여정부 내내
대대적 물갈이

대림그룹은 최재신 대림산업 관리본부 부사장을 고려개발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고려대 공업경영학과 출신인 그는 1981년 대림산업에 입사해 1997년 자금 담당부 담당 이사 대우에 오른 이후 건설 사업부 담당상무, 전무를 거쳐 부사장으로 일해 왔다.

㈜두산 사장으로 승진한 이태희 사장도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이었다. 1977년 두산건설에 입사한 그는 1996년 두산건설 이사, 1999년 ㈜두산 상무, 2003년 ㈜두산 부사장을 거쳤다. 이 외 코리아나 화장품 유상옥 회장의 사위로 마케팅 영업총괄 대표이사로 승진한 김태춘 사장 역시 이 대통령과 같은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이었다.

노무현 시대, 젊은피 수혈로 세대교체 바람
새 대통령 탄생하면 재계도 덩달아 ‘호흡’

앞서 참여정부에는 15년 만에 등장한 50대 젊은 대통령을 의식했는지 재계 인사에서도 젊은 인재를 과감히 발탁하는 세대교체 현상이 두드러졌다.


LG전자 인사에서는 상무급 승진에 30대가 2명이나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임원 평균연령이 44세에 불과했다.

SK그룹도 신임 임원 49명의 평균연령이 44세였다. 40대 초반 임원 승진이 보편적인 추세로 자리 잡았다. 30대 임원 승진도 3명이나 됐다. 사장단에서는 SK케미칼 홍지호 대표가 유일하게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홍 사장은 SK케미칼을 화섬업체에서 정밀화학과 생명과학기업으로 변신시킨 주역으로서 SK가 추구하는 투비모델(To be Model)의 성공케이스로 꼽힌다.

현대자동차그룹도 당시 인사에서 오너인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 의선씨를 비롯해 조카 정일선, 둘째사위 정태영, 셋째사위 신성재씨 등 가족 4명을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전격 승진시키며 “새로운 기업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30, 40대 오너 출신 경영진을 전면에 내세우는 세대교체를 단행했다”고 설명했다.

금호그룹 역시 박삼구 회장 체제가 강화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임원 26명이 새로 승진했다. 한진도 고(故) 조중훈 회장의 장남인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그룹 회장을 승계하면서 이에 따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한화석유화학의 허원준 대표는 전무 승진 1년 만에 최고 경영자로 발탁돼 주목 받기도 했다.

“한국은 인맥 사회
사업에도 상승작용”

이런 흐름에 대해 한 대학 교수는 “새 정권 초반부터 미운털이 박힐 경우 향후 5년 동안 가시밭길을 걸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주요 그룹들은 새 정부와 호흡을 맞출 수 밖에 없다”며 “한국은 여전히 인맥을 이끌고 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인사 코드 맞추기가 그 시작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과거부터 재벌기업들은 연줄을 통해 권력기관으로부터 특정 사업권을 따내는 등 탁월한 실적을 내 왔다”며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연줄이 다시 인사평가에 반영되는 상승작용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대기업들의 인사 관행에서도 과거 정경유착관계의 변화까지 읽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박근혜 시대’그룹 후계자들은?

눈치 안보고 초고속 점프

 

박근혜 정부 출범 후 경제민주화 논의가 본격화되는 시점에 주요 그룹들의 2∼4세들이 경영 전반에 나서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올 초까지 정기인사에서 승진한 오너 3∼4세들은 그룹 전반의 경영에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전망이다.

삼성그룹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승진시키며 후계 구도 안착에 주력했다. 승진이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더 우세했으나 당시 이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경영 보폭을 확대했다.

현대차그룹에서는 정몽구 회장의 장남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역할에 시선이 집중된다. 정 부회장은 2009년 부회장 자리에 오른 이후 국내외 영업과 기획을 총괄하며 보폭을 넓히고 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아들인 허윤홍 GS건설 상무도 지난 연말 인사에서 사장 직할 경영혁신 담당 상무로 승진했으며,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솔라원 기획실장은 그룹 전면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진그룹 3세들도 나란히 승진하며 경영권 승계 경쟁이 본격화됐다. 조양호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 기내식기판사업본부장과 장남인 조원태 경영전략본부장이 나란히 부사장으로 올라섰고, 막내딸 조현민 상무보는 상무로 승진했다.

주요 대기업 오너 2∼4세 대부분 승진
족벌경영 사전포석…점차 영향력 확대

한국타이어 조양래 회장의 장남 조현식 사장은 지난해 9월 지주회사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1월 한국타이어 사장으로 승진한 차남 조현범 사장은 그룹 주력인 타이어 사업을 전담하고 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장남 박세창 부사장은 지난 1월 금호타이어의 영업총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박 부사장은 지난 6월 직접 자사의 신제품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경영 일선에 나섰다.

대상그룹은 임창욱 회장의 장녀 임세령 식품사업총괄 부문 상무와 차녀 임상민 전략기획본부 부본부장이 일선에서 뛰고 있다.

LS 그룹은 창업 2세가 모두 그룹 경영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구자열 LS전선 회장이 그룹 회장에 오르며 구자엽 LS산전 부문 회장이 LS전선 부문 회장을 맡았다.

그는 LS그룹의 공동 창업자인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로 내년에 그룹 연수원인 LS미래원 회장으로 이동하는 구자홍 LS그룹 회장의 친동생이다. 구자홍 회장의 막내동생인 구자철 한성 회장은 한성의 대주주인 예스코 회장으로 올랐다.

구자열 회장의 친동생인 구자용 E1 회장은 이번에 LS네트웍스를 포함시켜 사업 부문으로 승격시킨 E1 부문 회장이 된다. 동생인 구자균 LS산전 부회장은 산전 부문 총괄 부회장으로 역할이 커진다.

8명의 사촌형제 중 유일하게 CEO가 아니었던 구자은 LS전선 사장도 최고운영책임자(COO)에서 이번에 CEO가 됐다. 구자명 회장의 외아들인 구본혁 LS니꼬동제련 이사가 오너 3세로는 처음으로 상무가 됐다. 구 이사는 지난해 이사가 된 뒤 1년 만에 다시 승진한 케이스다.

이들 기업들은 2∼4세의 전면배치에 대해 ‘세대교체’로 포장하고 있지만 ‘족벌경영’을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앞으로 이들이 자신의 ‘몫’을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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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