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망해도 잘사는 부자들④김석원의 쌍용그룹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3.14 13:4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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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후 어찌 사나 봤더니…지금도 '떵떵'

[일요시사=경제1팀]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
잘 나가던 기업이 망했다는 소식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런데 망한 재벌이 '깡통'을 찼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IMF 이후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공중분해 됐지만 해당 기업에서 중책을 맡았던 경영진과 그 가족들은 멀쩡히 잘 살고 있다. 미리 '주머니'를 채워놔서일까? <일요시사>가 연속기획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망한 기업' 수뇌부들의 현주소를 조명해봤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쌍용그룹은 늦었다고 생각을 못 해 무너졌다. 총수 한 사람의 오판과 실수가 재계를 호령했던 우량그룹의 해체를 불러온 것이다.

쌍용그룹은 김성곤 창업주가 1939년 대구에서 설립한 소규모 비누공장 삼공유지를 모태로 출발했다. 48년 금성방직을 설립하면서 기반을 확립한 쌍용그룹은 62년 쌍용양회, 67년 쌍용제지, 67년 쌍용해운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자산 15조
왜 무너졌나?

73년 쌍용정공, 76년 쌍용중공업과 쌍용정유, 77년 쌍용건설, 78년 쌍용엔지니어링을 설립한 쌍용그룹은 80년대 들어서서는 84년 쌍용투자증권, 85년 쌍용경제연구소, 88년 쌍용투자자문 등을 설립하면서 건설업, 중화학공업, 금융업 등 사업다각화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75년 김 창업주의 갑작스런 작고로 31세의 나이로 그룹을 이어받은 장남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은 쌍용그룹의 '제2성장'을 이끌었다. 73년부터 시작된 쌍용양회 동해공장을 연간 560만 톤 규모로 증설하는 프로젝트를 7년 만에 이뤄냈고 76년에는 이란의 국영석유공사(NICO)와 합작하여 쌍용정유를 설립하고 80년에 지분을 전량 인수, 쌍용정유를 국내 3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같은 해 김 회장은 쌍용중공업 사장직에 올라 사업 안정화를 이끌었고 83년에는 효성증권(쌍용증권)을 인수해 국내 굴지의 증권사로 성장시켰다. 김 회장이 그룹을 이끈 지 20년이 되던 95년에는 74년 대비 192배(15조5240억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였다.


재계 7위 총수 결정적 실책 '자동차·정계행'
결국 그룹 공중분해…매각 계열사 명맥만 유지

성장가도를 달리던 쌍용그룹이 '몰락'이라는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는 자동차 산업을 만나면서부터다. 이미 60년대 말 쌍용그룹은 하동환자동차(쌍용자동차)라는 이름의 회사를 인수하면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바 있다.

80년대 들어 쌍용자동차는 코란도와 무쏘라는 지프형 자동차를 선보이면서 급격히 부상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현대, 대우, 기아자동차의 공세로 쌍용자동차는 사세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안팎으로 자동차를 포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포기가 답이었다. 김 회장은 포기 대신 투자를 선택했다. 쌍용그룹은 추가적인 투자와 신모델 개발을 위해 용평리조트 등을 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렸다. 90년대 중반 쌍용그룹 대부분의 자산은 은행 담보로 잡혔다. 그룹 내부에서 자동차사업 중단을 요구하던 인사들은 줄줄이 잘려나갔고 그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됐다.

이러한 김 회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쌍용자동차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벽을 넘지 못했다. 92년 쌍용자동차의 내수 점유율은 1.6%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계속 추락세를 보였다. 그럼에도 김 회장은 95년부터 4년간 3조원을 쌍용자동차에 투입했다.

현대·기아차 벽
넘지 못한 쌍용차

김 회장이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은 때였다. 결국 그는 자동차사업을 접기로 하고 쌍용자동차 매각에 나섰다. 김 회장은 한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당시 자동차사업 진출을 준비 중이던 삼성그룹과 대우그룹에 동시 매각 협상을 벌였다. 오판이었다. 이중 매각 협상을 삼성에서 알아차렸고 삼성은 쌍용자동차 인수에서 발을 뺐다. 대우그룹도 삼성이 인수를 포기하자 대폭 내린 인수가격을 제시하고 나섰다.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김 회장은 결단을 못 내리고 한동안 우왕좌왕했다.


그러는 동안 쌍용그룹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수조원의 돈을 빌려준 은행들과 채권단은 김 회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고민하던 김 회장은 쌍용차 처리를 채권단에 넘겼고 채권단은 대우에 매각협상을 재개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쌍용자동차 채권단에 인수 조건으로 막대한 추가지원을 요구했다. 채권단은 이를 받아들였고 쌍용자동차는 대우그룹 품에 안겼다. 김 회장은 단돈 1원도 못 건졌다. 98년 1월, 대우그룹에 쌍용자동차를 넘겼을 때 쌍용그룹 계열사들이 떠안은 쌍용자동차의 부채는 공식적으로 1조7665억원이나 됐다. 쌍용자동차에 투자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급보증을 섰던 계열사들은 줄줄이 매각의 길을 걷게 됐다.

그룹의 고속성장을 이끌 만큼 뛰어난 경영성과를 보이던 김 회장이 포기할 때를 잡지 못한 이유는 뭘까. 물론 자동차 사업에 대한 김 회장의 욕심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잠시 한눈을 팔았던 것도 무시 못 할 이유 중 하나다.

그룹 분해되도
돈 걱정 없다

김 회장은 정계 진출이라는 특별한 외도를 했다. 쌍용자동차의 부실로 그룹이 위태로웠던 96년 김 회장은 15대 국회의원(민자당 소속)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다. 97년 쌍용자동차 부실 문제가 본격화되고 외환위기까지 겪으면서 98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그룹 회장으로 복귀했지만 약 2년간의 외도는 김 회장의 판단력을 흐려놓기에 충분했다. 정치와 자동차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던 김 회장은 두 마리 모두 놓치는 패착을 겪었다.

계열사 매각에 나선 쌍용그룹은 쌍용자동차를 대우그룹에 넘긴 98년 쌍용투자증권을 미국의 H&Q AP에 매각하고 99년 쌍용정유를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사 펀드에 매각했다. 2000년에는 쌍용중공업(현 STX)을 한누리투자증권 컨소시엄에 매각하고 2002년 쌍용화재를 중앙제지에 매각했다. 2003년에는 용평리조트를 세계일보에 매각했으며 쌍용캐피탈, 남광토건을 계열분리 했다.

주력회사인 쌍용양회는 일본 태평양시멘트로 경영권이 넘어갔고 대우그룹 해체로 다시 매물로 나온 쌍용자동차는 중국에 넘어갔다가 다시 인도에 팔려나갔다. 쌍용건설은 한국 자산관리공사가 주인이 됐고 ㈜쌍용은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 쌍용그룹은 '쌍용'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사실상 공중분해된 셈이다.

그룹의 모태인 쌍용양회가 2000년 12월 경영권이 넘어가자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김석원 전 회장은 2004년 말 쌍용그룹 재산 310억원을 개인 명의의 재산으로 빼돌린 혐의로 구속됐다.



이밖에도 김 전 회장은 ▲계열사인 쌍용양회가 소유한 42억원짜리 임야를 차명으로 헐값에 사들인 혐의 ▲그룹 계열사가 운영하는 고속도로 휴게소 영업권을 비서 명의로 만든 회사를 통해 싼값에 사들인 혐의 ▲폭락한 자신의 계열사 주식을 쌍용양회에 비싼 값에 팔아 54억원의 이익을 남긴 혐의 등을 받았다.

2007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4주년 기념 특별사면을 받은 김 전 회장은 친인척, 과거 참모들과 미래 사업에 대한 구상을 하면서 재기를 노리다가 이른바 '신정아 게이트'에 연루된 사실이 포착되면서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2008년 7월 위장 계열사 4곳에 1271억원을 부당지원한 혐의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김 전 회장은 즉각 항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어 2011년 12월에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과 사회봉사 200시간을 최종 선고 받았다.

쌍용그룹 해체 당시 김 전 회장은 명목상으로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현재 김 전 회장은 전직 국회의원 자격으로 헌정회로부터 매달 120만원의 지원금을 받고 있는 게 전부다.


부인은 미술관장으로, 아들들은 대주주로
태아산업 자식들이 장악 "사실상 가족회사"

하지만 김 전 회장의 가족들은 '120만원'에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먼저 김 전 회장의 부인 박문순씨는 성곡미술관장을 맡고 있다. 2007년 11월 신정아 게이트의 여파로 잠시 관장직을 떠난 적이 있지만 지난 2011년 3월 관장으로 복귀했다. 박씨가 관장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는 김 전 회장의 누나인 김인숙 전 국민대 교수가 미술관을 운영했다.

김 전 회장의 장남 지용씨는 용평리조트에서 전무로 근무하고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녀 유희씨의 남편이기도 하다. 특히 지용씨는 올림픽 개발효과를 누리고 있는 평창에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용씨는 현재 횡계리 소재(613-39외 3필지) 논밭 7000여m²을 보유하고 있다. 

지용씨는 2004년 김 전 회장이 구속될 당시 받았던 혐의 중 하나인 편법 매각의 대상, 고속도로휴게소 운영권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는 태아산업의 최대주주다.

98년 8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세워진 태아산업은 현재 충북 음성에 두 곳, 경기도 여주에 한 곳 등 총 세 곳의 휴게소를 운영하면서 2011년 440억여원의 매출액과 14억여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이 회사의 주주 구성을 보면 지용씨가 34.0%,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박문규씨가 16.2%, 지용씨의 동생인 지명·지태씨가 각각 24.9%를 갖고 있다. 박씨는 김 전 회장의 처남이다. 


쌍용그룹 해체 전까지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차남 지강씨는 그룹 해체 후 국내로 들어와 2002년 친인척 등과 함께 자본금 1억원으로 기획이벤트와 쇼핑몰 등을 하던 동아시아회사를 창업했다. 지강씨는 동아시아회사 임원으로 재직하면서 2003년 8월 IT업체 진두네트워크 인수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수 중도금을 납입하지 못해 주식양수도 계약이 깨졌다. 동아시아회사를 나온 지강씨는 특별한 직업 없이 투자활동을 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지강씨는 2011년 10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경찰에 따르면 지강씨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자신의 오피스텔 화장실에서 문고리에 목을 매 숨진 채 여자친구에게 발견됐다. 유서는 따로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날 오전 2시30분께 여자친구에게 자살을 암시한 뒤 연락이 끊긴 것으로 전해졌다.

스스로 목숨 끊은
비운의 황태자

쌍용그룹 해체 후 쌍용건설 사장직 내놓고 물러났던 김 창업주의 차남 석준씨는 그의 경영 능력을 필요로 한 직원들의 요청으로 다시 쌍용건설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이후 회사 정상화를 이뤄냈지만 최근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이에 따라 해임안까지 통보되는 등 위기를 맡고 있다.

김 창업주의 3남 김석동 전 쌍용증권 회장은 1986년 한상태 세계보건기구 명예사무처장의 딸 준희씨와 결혼했다. 그는 그룹 붕괴 이후 잇츠티비, 영화직물 등의 개인사업을 통해 재기를 꿈꿨으나 실패의 쓴맛을 봤다. 최근 또 다른 사업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진 그는 1남2녀(지호-지원-지영)를 두고 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쌍용그룹은?>

▲1939년 삼공유지 설립
▲1948년 금성방직 설립
▲1960년대 쌍용양회, 쌍용제지, 쌍용해운 설립, 하동환자동차(쌍용자동차) 인수
▲1970년대 쌍용정공, 쌍용중공업, 쌍용정유, 쌍용건설, 쌍용엔지니어링 설립(1975년 김석원 회장 취임)
▲1980년대 쌍용투자증권, 쌍용경제연구소, 쌍용투자자문 설립
▲1998년 쌍용자동차 매각, 부채 약2조원, 계열사 매각 시작
▲2002년 쌍용양회 워크아웃 돌입, 쌍용그룹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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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