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진보미술 기둥’ 박진화 화백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2.27 16: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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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시련 없으면 울림이 없죠"

[일요시사=사회팀] 박진화 화백은 한때 모든 그림을 불태운 적이 있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고등학교 미술교사였던 그는 '그림'을 그렸다가 동료와 함께 구속됐다. 1980년대. 그렇게 모든 것을 잃었어도 그에게 '그림'만은 남았다. 지친 몸을 일으켜 그가 향한 곳은 바로 강화였다.



인천 강화군 대산리에는 '박진화미술관'이 있다. 1991년 한 무명작가는 가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그곳은 '박진화미술관'이 됐다.

분단 주제로 작품

국내 진보미술의 바통을 이어받은 박진화 화백은 최근 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 회장에 당선됐다. 바쁜 일정 속에 만났지만 소박한 그의 웃음은 너무나도 여유롭고, 또 아름다워 보였다.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 딱 한 마디만 했어요. 민미협의 자존심을 지키겠습니다."

민미협은 800여 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국내 최대의 진보미술가 단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회원수는 1500여 명에 달해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박 화백은 "1995년을 기점으로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입을 열었다.


"꼭 진보미술가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살기 어려워진 것 같아요. 물질적으로도 그렇지만 문화적으로도 마찬가지구요. 사회가 점점 폐쇄적으로 변하잖아요. 모든 것들이 시장 논리에 흡수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내면 혹은 주체성을 잃어가고요."

박 화백은 1985년 7월 '서울미술공동체'가 군사독재에 맞서 싸울 때 그 최전선에 섰다. 이른바 '20대 힘전(展) 사태'가 그것이다. 그때 당시 화가인 박 화백은 오직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모든 예술은 자기 성찰에서 시작하는데 독재 정권하에 있는 우리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의 실존 문제를 그림으로 그리자. 사실 진보미술도 그렇거든요. 하지만 저는 꼭 모든 진보미술가가 정치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다고 봐요. 저도 굉장히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리고요. 그런데 이 부분에서 대중이 진보미술을 좀 오해하는 게 있죠."

그가 말하는 진보미술은 자기성찰적·사회반영적 미술이다. 예술가 개인이 문제의식을 갖고 자신만의 주체성을 세워야 한다는 게 그가 갖고 있는 지론이다.

"MB정부 이후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지원이 사실상 끊겼어요. 돈 되는 예술만 하겠다는 건데 그럴수록 미술계는 위축될 수밖에 없죠. 산업적 가치만큼이나 예술적 가치도 중요한데 문화 정책이 편중되다보니 공공미술관도 외국 유명작가만 초대해서 작품을 내걸어요.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작가가 많은데 그들이 전시할 공간은 거의 없고요.”

전두환 정권 시절 '20대 힘전' 주도해 구속
돈 되는 예술만?…MB정부 미술계 지원 '뚝'
"화가는 시대의 증언자"

박 화백은 한 미술관의 사례를 들며 진보미술가라는 이유로 전시를 유보한 사례를 언급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술가는 자유로워야 하고 어디에 갇혀있으면 안 돼요. 우리 인구가 5000만명이면 이 5000만명이 제각각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예요. 그런게 다양성이죠. 그런데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우리나라에는 없어요. 북측은 말할 것도 없고."

그는 흔히 '분단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91년 서울을 떠나 인천에 자리 잡은 박 화백은 북한과 마주한 강화도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10년 넘게 있으니까 자연스레 분단을 소재로 한 작품이 나왔어요.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 사람들의 삶.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보니 분단을 주제로 한 그림을 구상했고…."

박 화백이 그린 작품 주제는 대부분 사람과 연결돼 있다. 사람의 이야기. 때로는 섬뜩하리만큼 슬프지만 또 어떻게 보면 굉장히 따뜻한 작품.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그의 그림들은 2009년 포항공대 전 건물에 전격적으로 전시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무서운 그림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계속 보다보니까 익숙해졌는지 나중에는 좋아하더라고요. 이렇게 작품들이 좀 더 많은 곳에 전시됐으면 좋겠는데…. 예전 우리 민족은 집집마다 그림을 붙여놨어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들면서 우리 고유의 문화가 모두 말살됐죠. 일제에 저항한 화가 들어보셨어요? 이런 부분들은 화가들의 책임도 있는 거죠. 뿌리 깊은 사대주의도 그렇고."

자생미학 찾아야

박 화백은 우리 민족에 맞는 자생미학을 주장한다. 서양의 것도 받아들이면서 궁극적으로는 민족 고유의 미학과 한국 미술만의 색채를 만들어야한다는 얘기. 이를 위해 그는 고흐와 밀레 등의 연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공을 다졌다.

"저는 지금 시대에도 아픔과 시련이 없는 예술은 영혼의 울림이 없다고 믿어요. 반 고흐는 생전 그렇게 불행했는데 나중에서야 자신의 작품이 유명해질지 몰랐겠죠. 그런데 이건 고흐의 작품에서 그런 아픔과 시련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겁니다.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거든요. 혹시 누가 압니까. 제가 죽은 뒤에 제 작품이 더 큰 인정을 받을지."

박 화백은 어렵거나 비관적인 얘기에도 그 끝에는 항상 웃음을 지어보였다. 굉장히 긍정적인 그의 성격 탓인지 진보미술과 민미협의 미래가 그다지 어두워보이진 않았다. 그와의 헤어짐을 앞두고 역사의 경계선에 서있는 박 화백이 '시대의 증언자'란 화가의 사명을 오래토록 완수하기를 빌었다.


강현석 기자<angeli@ilyosisa.co.kr>

 

박진화 화백은?

▲1957년 전남 장흥 출생
▲1981년 홍익대학교 졸업
▲1985년 서울미술공동체 조직 ‘20대 힘전’ 주도로 구속
▲1989년 한강미술관 개인전
▲2009년 박진화미술관 개관
▲2010년 포스텍 기획초대전 ‘발밑과 눈’
▲2013년 민족미술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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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