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별기획] MB정부 출범, 그 이후…③대형 사건·사고 풀스토리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2.07 18: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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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펑펑' 하루도 편한 날 없었다

[일요시사=사회팀] "이보다 더 바쁠 순 없다." 한 경찰 관계자는 MB정부 5년을 평가해달라는 얘기에 이렇게 답했다. 유난히 대형 사건이 많았던 지난 5년.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을 모아봤다. 


MB정부 5년은 말그대로 다사다난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민주화 정부 출범 이후 MB정부만큼 경찰력이 바삐 돌아간 적이 없었다"며 지난 5년을 회상했다. 그만큼 이번 정부 들어 사건·사고가 많았다는 뜻이다.

항간에서는 MB정부가 '꼼꼼한(?) 정부'로 불리지만 사건·사고 뒷수습에서는 합격점을 줄 수 없다는 게 각계의 중론이다. MB정부의 대형사건 처리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건 지난 2008년 소위 '명박산성'으로 대변되는 '촛불정국'이 개시되면서다.

꼼꼼한 그분의
사건·사고 처리

지난 2008년 5월 10대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한·미 쇠고기 협상 결과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 참가자였다. 이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 광우병의 위험을 전해 듣고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에 정부는 '전교조 배후설' 카드를 꺼내들었다. 집회 참가자 대부분이 10대인만큼 교육 현장에 있는 전교조가 학생들을 선동하지 않았겠냐는 얘기가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흘러나왔다.

현장에 있던 학생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와 동시에 촛불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20∼30대 청년층이 서울광장에 결합했고, 아이들 '먹을거리' 걱정에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정주부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폭등하는 물가와 불안정한 일자리에 시름하던 직장인들도 촛불 행렬에 대거 합류했다.


치솟는 촛불의 기세가 청와대를 위협하자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하지만 문제가 됐던 쇠고기 위생조건검역 장관고시 강행을 기정사실화했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도로를 점거한 채 가두시위에 나섰다. 경찰은 불법시위라며 물대포와 방패를 동원해 이들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자와 연행자가 속출했다. 경찰의 진압은 연일 과격해졌고 시위대도 이에 맞서 폭력성을 띄었다. 촛불은 어느새 큰 횃불이 됐다.

당시 경찰 수장이었던 어청수 경찰청장은 "(시위 참가자들은) 폭력 시민이기 때문에 강경 진압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시민들은 '쇠고기 재협상'에서 '이명박 퇴진'으로 구호를 바꿨다. 매일 밤 서울 종로 일대에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전·의경과 경찰 호송버스가 진을 쳤다. 정부와 시위대 간 끝을 알 수 없는 '벼랑 끝 대치'는 두 달이 지나서야 정부의 승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정권초기 광우병 촛불 시위로 '전국 들썩들썩'
서울 한복판서 현대사 비극 용산참사 벌어져

그러나 광우병 촛불 시위는 우리나라 집회 풍토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살벌한 죽창을 든 폭력 시위가 아닌 종이컵에 촛불을 든 문화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첫 집회였기 때문이다.

시위 기간 서울 곳곳에서는 흥겨운 노래가락이 퍼졌고, 함께 하는 춤사위가 광장마다 이어졌다. 초기 집회 현장에서 시위대가 비폭력을 외치다보니 경찰력과 직접 맞서기보다는 공권력에 대한 날선 풍자와 유머가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선풍적인 인기도 이 같은 사회지형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사회 저명인사들의 반성도 이어졌다. 당시 김지하 시인은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온라인을 통해 소통하고 토론하는 새로운 정치집단이 대한민국에 생겨났다" 평한 뒤 "정치권이나 지식인을 비롯한 책임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젊은 세대와의 교감을 더욱 넓히고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촛불서 놀란 MB

용산서 터트렸다

그러나 촛불이 켜진 광화문 일대를 말없이 바라봤다던 이 대통령은 이때부터 시위대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촛불시위의 트라우마는 끝없이 MB정부를 괴롭혔다. '촛불 정국' 이후 경찰은 '명박산성'과 같은 소극적인(?) 대응을 벗어나 방패를 들고 직접 내리찍는 강경진압을 선택했다.

그리고 곧바로 현대사의 비극인 '용산참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2009년 1월 서울 용산4지구 철거민 40여명은 철거가 예정된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들은 정부의 재개발 정책을 반대하며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농성에 돌입한 시점부터 비극은 막을 올렸다.

이?날 경찰은 특공대를 동원해 강제진압에 나섰다. 철거민이 올랐던 망루에는 난데없이 불길이 일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절규와 함께 현장은 불바다로 변했다. 이 불길에 고 이상림씨를 비롯한 철거민 5명, 경찰특공대원 1명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전체 부상자는 23명에 달했다.

'용산참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날,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의 사퇴로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용산참사'는 다시 법정공방으로 이어졌다.

검찰은 용산4지구 철거민 대표 이충연씨 등을 상대로 특수공무집행 방해 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기소된 이씨 등은 1심에서 모두 4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민변 등의 사민·시회단체는 검찰의 기소내용을 반박하며 "화재 원인으로 지목된 화염병을 농성자가 던진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고, 경찰 측에도 진압 과정에서 주의의무 위반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대법원은 2010년 11월 기소된 철거민들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

이씨 등이 수감된 후 이씨 가족과 철거민 유가족들은 매해 '용산참사 추모제'를 열었다. 사고가 발생한 용산4구역 재개발은 참사 발생 4년이 지나도록 답보 상태다. 비록 최근 용산참사 수감자들이 설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용산참사 진상규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 공은 박근혜 정부로 넘어간 상황이다.

극심한 좌우분열
천안함 사건터져

용산참사가 벌어진 해와 같은 해인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거하면서 우리나라는 극심한 좌우 분열을 겪게 된다. 해방 공간 이후 최대의 갈등 국면에 접어든 2010년. 북한발 대형 사고가 터졌다.

소위 '천안함 침몰 사건'이라 불리는 이 대형 국가재난은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정국을 뒤흔드는 핵심 변수로 급부상했다. 같은 사안을 놓고 각기 다른 해석이 우후죽순처럼 불거졌고, 진보와 보수로 나뉜 정치적 입장은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상호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2010년 3월. 인천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PCC-772(천안함)가 침몰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천안함 피격 사건'이라 지칭했다. 국방부는 "북한 정찰총국이 우리나라 초계함을 침몰시켰다"고 브리핑했다.

당시 천안함에 탑승하고 있던 104명의 군인 중 58명은 구조됐으나 나머지 46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모두 사망자로 확인됐다. 더불어 수색과정에서 UDT 대원인 한주호 해군준위가 작업 중 순직했다. 뿐만 아니라 천안함 실종자 수색 작업을 하던 '금양98호' 역시 인천 서해 부근에서 침몰해 탑승 선원 9명 전원이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점점 늘어났다.

논란도 점차 확대됐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미국, 영국, 스웨덴 등의 국제 전문가 24명이 포함된 '천안함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공식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천안함 공격을 규탄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하지만 합동조사단의 발표를 반박하는 증거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잠수함의 이동 경로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지적부터 어뢰가 북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이에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살면서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믿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의혹 제기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북한은 사고 지점에 암초가 많다는 점을 근거로 스스로 좌초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천안함 침몰 원인을 놓고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으나 결론은 '피격설'로 마무리됐다. 남북 간의 긴장은 고조됐으며, 대한민국 안에서도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부정하는 글을 쓴 시민이 국정원으로부터 내사를 받는 등 이른바 '용공 논란'이 점화됐다.

이에 대해 천안함 조사 의혹을 제기한 이승헌 버지니아대학교 교수는 "정부의 천안함 발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고소됐다"며 "이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고 비판했다.



천안함·연평도 도발 초긴장
연쇄살인·아동성폭행 잇달아

'천안함 사건'으로부터 8개월 후 북한은 '연평도 도발'을 통해 또 한 번 대한민국의 안보를 건드렸다. 2010년 11월 북한은 대한민국의 영토인 연평도에 예고 없는 집중 포격을 가했다.

북한이 대한민국 영토를 직접 타격하여 민간인이 사망한 건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보복 사격을 했고 이 사건은 국제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남북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남북 간의 기류가 심상치 않자 언론은 좌우 갈등이 극명한 민감한 이슈보다는 살인·성폭행과 같은 자극적인 이슈에 천착한다. 괜한 걸 건드렸다가 이해당사자로부터 고소를 당하거나 정부기관으로부터 내사를 받는 것에 비해 강력 사건은 비교적 안전한(?) 이슈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향은 지난 2009년 용산참사 이후 "'강호순 사건'을 활용해 여론을 반전하라"고 지시한 청와대발 메일로 한 차례 드러난 적이 있다. 그러나 MB정부 들어 흉악범들이 기승을 부린 건 사실. 그 첫 시작은 지난 2008년 조두순이었다.

2008년 12월. 조두순은 초등학생 A양을 납치·성폭행했다. '조두순 사건'으로 알려진 이 범죄로 피해자 A양은 생식기와 내장 대부분이 파열되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다. 조두순은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2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아동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최대 50년까지 상향 조정하고 공소 시효도 폐지하기로 하는 법안을 입법했다.

2009년 12월. 정부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주도한 아동성범죄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3개월도 되지 않아 '김길태 사건'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10년 2월, 김길태는 예비 중학생인 한 아이를 납치·성폭행·살해하고 그 시신을 유기했다. 범죄의 심각성을 느낀 경찰은 6년 만에 피의자 신상을 공개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범죄 예방 효과는 없었다. 아동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흉악범죄는 더 잔인한 성격을 띠게 됐다.

2011년 4월. 늘어나는 성폭행 사건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커지자 법무부는 모든 성범죄자들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신상공개도 희대의 살인마 오원춘의 범행을 막진 못했다.

2012년 4월. 오원춘은 20대 여성 B씨를 집으로 납치한 뒤 강간을 시도했으나 실패, 이후 목 졸라 살해한 뒤 그 시신을 토막 냈다. 범행의 잔혹함이 가져다주는 충격도 컸지만 경찰의 늦장 대응은 당시 범국민적인 분노를 촉발했다. 이 사건으로 조현오 경찰청장은 스스로 옷을 벗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이가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유족들은 오원춘 사형 판결을 목 놓아 기다렸다. 많은 국민도 오원춘의 사형을 바랬다. 하지만 오원춘은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현재는 오원춘 사건으로 인해 사형수들에 대한 형 집행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천안함 정국 이후
성폭행 보도 봇물

실질적인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됐던 대한민국은 이제 다시 '사형'을 부르짖는 상황에 놓여 있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남·북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금강산 관광은 언제 재개될지 알 수 없다. 용산 참사 진실규명은 아직도 멀어 보이며, 전국에서는 철거민과 개발업자들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쇠고기 협상으로 물꼬를 튼 한·미 FTA가 2011년 체결됐지만 정부가 약속한 체감 경제 이득은 전무하다. 먼 미래의 누군가는 아마 MB정부를 '잃어버린 5년'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강현석 기자<k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지난 5년간 재난·재해

▲08년 02월 숭례문 방화사건 (사망 없음)
  08년 12월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고 (사망 8명)
▲09년 02월 화왕산 억새태우기 사고 (사망 6명)
  09년 11월 부산 실내사격장 화재 사고 (사망 10명)
▲10년 01월 한국 중부 폭설 (사망 1명·피해 106억)
  10년 11월 포항 요양원 화재 참사 (사망 10명)
▲11년 4월 구제역 파동 (사상 36명·피해 2000억)
  11년 7월 한국 중부 집중호우 (사망·실종 71명)
▲12년 5월 부산 노래방 화재 사고 (사망 9명)
  12년 8월 태풍 볼라벤 상륙 (사망·실종 25명·피해 800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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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진법사 ‘5000만원 관봉권’ 미스터리

건진법사 ‘5000만원 관봉권’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건진법사 전성배씨의 ‘5000만원 관봉권’ 출처를 두고 소문이 무성하다. 검찰은 대통령실 특활비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전씨는 그저 ‘기도비’라고 진술 중이다. 검찰이 김건희씨까지 수사 대상에 올린 점을 보면 전씨의 진술은 허위일 가능성이 크다. 전씨가 전방위 로비를 벌인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김씨의 소환조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윤석열 일가를 향한 수사는 그간 서울중앙지검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건진법사 전성배씨의 로비 사건은 중앙지검이 아닌 ‘여의도 저승사자’로 불리는 서울남부지검 가상자산범죄합동수사부(부장검사 박건욱)가 포문을 열었다. 전씨는 통일교와 캄보디아 사업 및 정·재계를 가리지 않고 돈을 받았다. 윤석열 일가와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수상한 증거들 남부지검은 전씨를 수사하기 이전에 한 가상자산 사기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최근 정식 부서로 신설된 가상자산범죄합동수사부는 지난해 7월 ‘퀸비코인(QBZ)’ 관계자 이모씨 외 3명을 사기 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사업 진행 능력이 없음에도 허위 자료를 제출해 스캠 코인을 상장했다. 1만명이 넘는 투자자로부터 가로챈 금액은 300억원에 육박한다. 남부지검은 수사 과정서 퀸비코인 관계자 이씨가 2018년 1월 자유한국당 경북 영천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정모씨를 전씨와 연결한 정황 및, 이들 간 수상한 자금 흐름을 포착했다. 취재를 종합하면 당시 정씨는 전씨 법당을 찾아 1억원을 건넸다. 이 사실을 파악한 남부지검은 지난해 12월 전씨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고 그의 법당과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두 달여 전에는 경기 성남의 카카오 판교 서버를 압수수색해 전씨의 카카오톡 기록까지 확보했다. 전씨는 2022년 제20대 대통령선거 당시 윤석열 전 대통령 대선캠프 네트워크본부서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그의 처남으로 알려진 ‘찰리’ 김모씨도 전씨와 같이 활동했다. 전씨는 김건희씨가 운영하던 전시기획회사 코바나컨텐츠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전씨의 딸도 잠깐이지만 코바나컨텐츠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남부지검은 전씨가 윤 전 대통령과 김씨와의 친분을 이용해 로비 행위를 벌였다고 보고 수사를 시작했다. 실제 전씨가 로비 창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남부지검은 지난달 30일 윤 전 대통령 사저인 아크로비스타를 압수수색했다. 압수수색 영장에는 “피의자들이 2022년 4월부터 8월 사이 공직자의 직무와 관련해 공직자의 배우자에게 선물을 제공했다”고 적시됐다. 청탁 사유로 ▲캄보디아 메콩강 부지 개발 ODA(공적개발원조) 사업 ▲YTN 인수 ▲유엔 제5사무국 한국 유치 ▲교육부 장관 통일교 행사 참석 ▲대통령 취임식 초청 등이 담겼다. 이 압수수색은 전씨를 통해 통일교 세계본부장 출신이자 2인자였던 윤모씨가 수천만원 상당의 그라프(Graff) 다이아몬드 목걸이, 샤넬 가방, 천수삼 농축차 등을 김씨에게 전달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남부지검은 윤씨가 지난 2022년 7월 전씨에게 ‘김 여사가 물건(천수삼) 잘 받았다더라, 건강이 좋아지셨다고 한다’고 보낸 문자메시지 내용을 확보하기도 했다. ‘한국은행’ 찍혔는데…통상 정부 예산 활용 금융권 “개인이 갖고 있을 수 없다” 일축 검찰이 지난 3일 전씨를 청탁금지법 위반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한 만큼 김씨에 대한 소환조사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 남부지검 수사팀 내부에서는 김씨를 대선 직전에 소환조사해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전씨는 “목걸이와 명품백을 잃어버렸다. (김 여사가 잘 받았다는 문자는) 거짓 문자”라고 부인하는 상황이다. 김씨 측도 “전씨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실 자체가 없다”는 입장이다. 우선 검찰은 윤씨가 전씨에게 윤석열정부의 캄보디아 ODA 사업 추진을 청탁했는지 여부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검찰은 윤씨가 “윤 전 대통령과 독대했고 국가 단위 ODA 연대 프로젝트에 동의했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을 확인했다. 검찰은 지난 2022년 3월 윤씨가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전 대통령과 김씨를 인수위서 만난 뒤 캄보디아 사업을 추진하려 했다고 보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통일교는 같은 해 메콩강 핵심 부지에 ‘아시아태평양유니언 본부’를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윤씨는 훈센(Hun Sen) 당시 캄보디아 총리와도 이 사업을 논의했지만 자금난으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씨는 2022년 5월 한 통일교 행사에서 “3월 22일 대통령을 만나 1시간 독대를 하면서 이 나라가 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하고 암묵적 동의를 구한 게 있다”고 말했다. 이어 “ODA는 비영리기구(NGO)가 펀딩 가능하고 국가가 지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검찰은 이 직후인 2022년 6월 기획재정부가 제4차 한-캄보디아 ODA 통합 정책협의서 대(對)캄보디아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차관 지원 한도액을 기존 7억달러에서 15억달러로 늘리는 기본 약정을 체결한 점을 주목했다. 한도액이 늘면 중기후보사업 승인 절차가 간소화돼 ODA 사업 수주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김씨가 나토 순방 당시 착용했던 6000만원대 반클리프 앤 아펠 목걸이와 관련해 재산 신고 누락 논란이 불거지자, 윤씨는 전씨에게 “김 여사에게 빌리지 말고 하고 다니라”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건넸다. 검찰은 지금까지 김씨 명의 휴대전화 3대를 확보했다. 이 중 1대는 김씨가 지난달 11일 서울 한남동 관저서 나오면서 보안 비화폰(안보폰)을 반납한 뒤 개통한 휴대전화다. 나머지 2대는 옛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서 사용하던 휴대전화로, 사실상 공기계로 알려졌다. 자택 압색 그 이후… 검찰은 100여개에 달하는 압수 대상에 윤씨 선물 명목으로 전씨에게 제공했다는 그라프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샤넬 가방, 인삼주 등도 적시했지만 확보하지 못했다. 법조계에서는 윤씨의 청탁이 성사됐거나 윤씨와의 직무 관련성 등이 입증된다면 김씨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와의 전화 통화에서 “카톡 기록과 전달됐거나 전달되려 했던 물품들은 이미 수사팀이 확보했으니 김씨가 대면 조사를 피하긴 힘들다”며 “남부지검서도 성역 없이 수사 의지가 강하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현행법상 공직자의 배우자를 청탁금지법으로 처벌할 수 없으니 직무 관련성 입증이 관건”이라며 “입증만 된다면 알선수재 혐의 적용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가장 중요한 건 전씨의 자택을 압수수색할 당시 발견된 5000만원 관봉권이다. 앞서 검찰은 지난해 12월 서울 서초구 전씨의 집을 압수수색하면서 5만원권 3300매(1억6500만원)를 확보했는데, 이 중 5000만원은 비닐 포장이 벗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검찰은 전씨에게 이 관봉권의 출처에 대해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관봉권은 ‘제조권’과 ‘사용권’ 두 종류로 나뉜다. 제조권은 한국조폐공사에서 한은이 받아온 신권으로 돈다발에 십자 형태의 띠를 두르고 비닐로 싸 압축한 형태다. 사용권은 한은이 시중은행서 회수한 돈을 검수해 낡은 돈은 폐기하고 사용하기 적합한 돈만 골라낸 것이다. 발견된 돈다발 김씨와 전씨 사건서 등장하는 관봉권은 모두 사용권이다. 전씨 자택서 발견된 5000만원 관봉권 돈다발은 한은이 적힌 비닐로 포장돼있었고, 비닐엔 기기 번호와 담당·책임자 일련번호도 적혀 있었다. 그러나 김씨 측이 옷값을 치를 때 썼던 관봉권은 비닐 없이 띠지만 둘러져 있는 돈다발 형태였다. 관봉권은 국가 예산으로 편성되는 대통령실(청와대)과 검찰, 국가정보원 등 사정기관의 수사나 조사에 필요한 특수활동비로 쓰이기도 한다. 과거 정부에서는 이 특활비가 로비 자금으로 악용됐다. 한은은 전국에 16개 지역 본부를 두고 금융기관에 관봉권을 보낸다. 서울엔 남대문 본점 및 강남본부 등 두 곳이 있다. 이 중 강남본부가 대통령실과 사정기관 등에 예산 조달을 담당해 왔다. 다만 민간인의 집에서 관봉권이 발견될 수 없다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대개 일반 정부 예산은 관봉권 형태가 아닌 계좌이체 등을 통해 전달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수천만원 상당의 관봉권이 묶인 채로 남아 있는 건 영수증 내역도 남지 않는 특활비”라며 “통상 정보와 사정기관이 ‘돈의 주인’”이라고 말했다. 실제 검찰도 전씨의 자택서 발견된 5000만원 관봉권이 강남본부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이 관봉권에는 ‘2022년 5월13일’이라는 날짜가 기재돼있다. 윤 전 대통령 취임일 사흘 뒤다. 전씨는 검찰 조사에서 주로 돈은 ‘기도비’ 명목으로 받아왔지만 관봉권은 정확하게 누구에게 받은 돈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한은 방문 이후 전씨의 집에서 발견된 관봉권에 적힌 ▲기기번호 ▲담당자 ▲책임자 ▲발권국 항목 등의 의미를 확인했다. 기기번호의 뜻은 정사기(검수기) 기기번호와 기기호수를 뜻하고, 발권국 정보에는 정사 업무를 담당하는 발권국 화폐관리1팀을 의미하는 숫자인 것으로 전해졌다. MB 때 국정원 ‘입막음·로비’ 용도로 사용 검·정보 “이번엔 아니다”…남은 건 용산 포장지에 적힌 ‘2022년 5월13일 오후 2시5분59초’는 한은이 검수를 마친 시각이라고 한다. 다만, 한은은 개별 사용권이 어느 시점에 어느 금융기관으로 지급됐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금융기관서 화폐를 요청하는 경우 ▲지급한 금융기관명 ▲지급일자 ▲권종 ▲금액 등만 기록할 뿐, 어떤 사용권 묶음을 제공했는지는 별도 기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 관봉권이 지난 대선 기간 전씨가 운영했던 윤 전 대통령 선거캠프 운영비일 수 있다고 보고 금융 흐름을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올해 초 당시 네트워크 본부장으로 있던 오을섭씨를 소환조사하면서 양재동 캠프의 운영비 출처를 물어본 것으로 전해졌다. 법조계에서는 해당 관봉권 출처가 불분명한 만큼 특활비일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금융범죄 수사 경험이 풍부한 한 변호사는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운 한은 뭉칫돈은 대부분 특활비”라며 “특활비라면 한은 검수 이후 수천만원 상당의 돈이 필요한 곳은 보통 사정기관이다. 일반적으로 정부 예산은 뭉칫돈으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결국 사정기관 담당자들을 불러 확인해봐야 하는데 정보기관에서는 특활비 활용 자체가 보안으로 분류돼 확인도 어려울 것이다. 출처 규명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와 접촉한 복수의 사정기관 관계자들은 ‘국정원 특활비’는 아니라고 단언했다. 앞서 이명박정부 청와대는 국정원 특활비를 상납받은 바 있다. 지난 2011년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은 국정원의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을 폭로했는데, 당시 국정원은 관봉 형태의 특활비 5000만원을 장 전 주무관에 ‘입막음비’로 전달했다. 이 같은 내용은 검찰 수사와 공판 등을 통해 청와대서 국정원 특활비를 받아 장 전 주무관에 전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불분명한 출처 어디?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과거 국정원 특활비와 흡사해 보이지만 2022년 이후의 특활비 활용이나 대통령실을 통해 쓰인 ‘국정원 특활비’ 등에 대해서 들여다봤을 때 불법적이거나 위법하게 쓰인 사실이 없다. 한 개인에게 갈 일은 더더욱 없다”고 못 박았다. 검찰 관계자도 “남부지검서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검찰 특활비는 아니다. 남부지검 수사팀도 검찰과는 상관없는 관봉권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