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신주체인가 쇄신대상인가 ‘친노’ 실체 전격해부

  • 조아라 archo@ilyosisa.co.kr
  • 등록 2013.01.22 11: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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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힌 돌’ 빼낸 ‘개천의 용’…“외롭네~”

[일요시사=정치팀] 이쯤 되면 ‘귀에 못이 박힐 만’도 하다. ‘좋은 소리도 세 번 하면 듣기 싫다’고 했듯 이젠 지루함을 넘어 거부감마저 들 지경이다. 당 안팎에서 ‘친노(친노무현)’에 대한 비난이 거세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피곤하긴 마찬가지. 그럼에도 국민은 친노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는 눈치다. 이에 <일요시사>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역사 뿌리인 친노의 실체를 해부해 보았다.

 

민주통합당의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 공방 중심에는 여전히 ‘친노’가 있다. 좀 더 격한 표현을 빌리자면 ‘친노 패권진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치적 보폭을 맞췄던 이들이 권리와 힘을 휘둘러 대선에 패배했다는 당내 목소리가 넘쳐나는 상황이다. 친노로 분류되는 인사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굳히는 DJ
흔드는 YS

1967년 유진오를 당대표로 창당된 신민당은 당내 갈등 없이 가장 오랫동안 건재했던 민주당계 정당이다. 이후 ‘40대 기수론’의 DJ와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YS가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신민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들이 1985년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야권 진영에 바야흐로 ‘양김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무리의 수장은 둘이 될 수 없는 법. 신한민주당에서 DJ측 동교동계와 YS측 상도동계 사이에 당권 장악을 위한 물밑전쟁이 치열해졌다. 상도동계 인사들이 DJ의 당권 장악을 저지하면서 야권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12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신민당을 깨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한 양김은 1987년 DJ가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면서, 13대 총선을 앞두고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완전히 갈라섰다.

'3당야합’ 반대하고
세력 없는 혈혈단신

이때 재야활동을 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YS와 인연을 맺었다. 노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후보로 1988년 제13대 총선에 출마해 부산동구 지역구에서 당선돼 헌정사에 이름을 올렸다.

1990년 통일민주당 총재인 YS,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전 대통령, 신민주공화당 총재인 김종필의 ‘3당합당’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밀실야합’이라 규정하고 통일민주당 잔류세력들과 함께 소위 ‘꼬마민주당’ 생활을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혈혈단신’ 신세가 됐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5공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명판을 집어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일약 ‘청문회 스타’자리에 오르며 자신의 이름석자를 전국민에게 알렸다. 

하지만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했으나 여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고, 15대 총선에서는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당시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와 민정당 사무총장 출신의 정계거물로 DJ가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이종찬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얼마 전 “친노의 잔도 불태워라”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던 김영환 민주통합당 의원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었다.


1997년 노 전 대통령은 김정길, 김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DJ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동교동계 VS 상도동계 싸움판… YS 노무현 발탁 후 ‘줄튀’ 
‘낙동강 오리알 신세’ 노무현, 민주당 ‘미운 오리 세끼’

여당에 몸담게 된 노 전 대통령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서울시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의 벽을 넘겠다면서 부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해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인터넷에서 ‘노사모’가 조직돼 붐을 일으켰던 것도 이때다. 국회의원에 낙선한 후 그는 DJ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한마디로 노 전 대통령은 ‘박힌 돌’ 빼내는 ‘굴러들어온 돌’이였다. 지연, 학연을 비롯해 아무런 세력이 없는 노 전 대통령이 DJ계 인사들에게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제16대 대선후보경선에서 잔뼈 굵은 인사들과 경쟁해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면서 단숨에 수장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실시된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잇따라 참패하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노 전 대통령의 대통령 후보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 ‘친노’와 ‘반노’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심지어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서는 의원까지 등장했다. 대선이 끝날 때까지 노 전 대통령을 둘러싼 당내 분란은 좀처럼 봉합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대권을 잡자, 그를 추대하던 친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반면 반노를 향한 책임론이 거세게 일었다. 친노 의원들은 일제히 지도부 사퇴를 요구하고 한화갑 대표가 이에 불응하면서 양측 갈등은 더욱 악화됐다.

당시의 노 전 대통령을 둘러싼 진통은 지금보다 더욱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 쇄신안 처리 과정에서 양측이 몸싸움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대북송금특검’으로 노 전 대통령이 DJ에 법망을 씌웠으니, 이들의 날 선 대립이 골육상잔의 아픔에 비견할 만했다.

2003년 4월28일 친노 중심세력은 본격적인 신당 창당 작업에 돌입한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재선 이상의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민주당에 잔류했지만, 초선의원은 대부분 신당 창당에 동참했다. 이들은 더욱 자유롭게 당적을 선택할 수 있었단 이야기다. 호남을 기반으로 둔 의원들도 대부분 잔류를 선택했다.

노무현 연이은 ‘등업’에
민주당 인사들 ‘열 받네’

한 전문가는 논문을 통해 “호남 지역구 국회의원들에게 신당참여는 지역구 유권자에게 반감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신당 참여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라고 분석했다.

작년 민주당 대선 후보경선 과정에서 대표적인 비노로 분류됐던 박준영 전남도지사가 그런 경우다. 현 강운태 광주광역시장도 당시 민주당에 잔류했으며, 친노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호남이 친노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다. 이는 결국 '친노의 호남홀대론'으로까지 이어졌다.

친노를 둘러싼 민주당의 갈등이 분출되는 슬로건은 그때나 지금이나 남아있는 자들을 향한 ‘쇄신’이다. 10년 전 친노는 ‘쇄신’을 외치며 뛰쳐나왔지만, 실상은 노 전 대통령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DJ 인사들에 대한 ‘갈등의 분출’로 볼 수 있다.

11년 전 친노는 비노를 이겼다. 친노는 대선에 승리했음에도 승자의 포용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이것은 친노의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으로 꼽힌다. 오히려 비노에게 ‘재보선 패배 책임’을 물어 야권 분열을 가속화 시켰다.

이 때문에 민주당 내부에서 “이번 대선에서 비노에 속하는 의원들은 선거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비노입장에서 11년 전과 같이 친노의 ‘득세’로 험한 꼴을 보느니, 차라리 대선 패배의 책임을 친노에 묻고, 신당 창당의 명분을 만드는 것이 나을 것이란 계산이 가능하다. 11년 전 친노가 대선 승리로 비노에게 책임을 묻고 신당 창당의 명분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 친노 “한화갑 사퇴” 지금 친노 “모두가 책임져”
그때 비노 “노무현 사퇴” 지금 비노 “문재인 책임져”


달리 보면 ‘친노’의 시작은 비노에게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이 YS가 아닌 DJ를 통해 동교동계 인물들과 세력을 형성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면, 혹은 DJ계가 노 전 대통령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대선 승리에 힘을 모았다면 애초에 친노와 비노의 대립이 있었겠느냐는 얘기다.

노 전 대통령을 끝까지 인정하지 못한 DJ계 인사들의 고집도 ‘패권’이요, 대선 승리에도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새집을 마련한 친노 인사들의 속 좁은 처사도 ‘패권’이란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친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노 전 대통령의 급부상을 목격해야 했던 비노의 ‘쓰린 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의 25년 갈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친노보다 비노가 먼저 생겼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현재 '친노 직계'로 불리는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3당합당 당시 노 전 대통령과 통일민주당에 잔류했던 인물이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도 노 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했던 88년에 보좌관을 맡았다. 문재인 전 후보는 알려진 바대로, 노 전 대통령과 인권변호사 활동을 했던 ‘골수 친노인사’다.

노 전 대통령을 따라 열린우리당 창당에 힘을 보탰던 이들은 이후 각각 정동영 전 상임고문, 고 김근태 전 상임고문, 손학규 전 상임고문을 필두로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명숙, 이해찬, 문희상, 유시민 의원 등이 소수 무리를 이끌었다. 그야말로 ‘춘추전국당’이었다. 현재 당권을 장악한 박영선 의원은 열린우리당 시절 정동영계 인사였다.

이번 18대 대선에서 대표적 동교동계 인사인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박근혜 후보 지지선언을, 한광옥·김경재 전 의원은 아예 새누리당에 입당해 박근혜 정권 창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내가 하면 ‘쇄신’
남이 하면 ‘구태’

이러한 맥락에서 대표적인 동교동계 인물로 대북송금특검 과정에서 갖은 수모를 겪고도, 이해찬 전 당대표와 함께 문재인 전 후보의 당선을 도왔던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구태’로 몰린 것은, 참으로 큰 손실이라는 평가도 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둘러싸고 친노와 비노의 대립이 격한 이때. 이들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가진 구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정치평론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10년 전 그들이 서로에게 요구했던 것을 자신이 먼저 실천하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친노는 대선 패배 책임을, 비노는 노 전 대통령을 인정하고 친노에 대한 포용력을 발휘해 얽히고설킨 갈등을 해결하기를 ‘실패한 투표자’ 48%는 바라고 있다.

DJ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라며 울먹였던 것처럼, 친노와 비노는 결국 한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조아라 기자 <archo@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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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