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전국 181곳 공공기관에 북한의 기관지 <노동신문>이 일제히 깔렸다. 지난 5일부터 비치된 국회도서관의 풍경은 낯설다 못해 참담하다. 정부의 행정 판단으로 적성국의 선전물이 공공 자료라는 이름으로 놓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조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정부가 안보의 경계선을 어디까지 그었는지에 대한 정치적 선언이다.
논란은 지난해 12월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외교부·통일부 업무보고에서 시작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북한 >노동신문> 등 사이트를 “별도의 국정과제로 추진할 필요 없이 열어두면 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이후 정부는 곧바로 후속 조치에 착수했다. <노동신문>은 국가정보원의 ‘특수자료’에서 ‘일반자료’로 재분류됐고, 누구나 별도 절차 없이 12월30일부터 열람할 수 있게 됐다.
정부는 이를 정보 접근권 확대와 표현의 자유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더 이상 정보를 독점하거나 차단하지 않고, 국민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열어두겠다는 논리다. 성숙한 시민 사회라면 가능한 접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안보는 정부의 설명만으로 가볍게 다뤄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노동신문>은 북한의 현실을 전달하는 정보지가 아니다. 그것은 체제 유지와 우상화를 목적으로 설계된 정치 선전물이다. 김정은 체제를 찬양하고, 적을 규정하며,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도구다. 정보와 선전의 경계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 선전물을 공공 자료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노동신문> 1곳당 연간 구독료는 약 191만원이다. 전국 181곳 기관이 이를 구독하면 연간 약 3억4000만원이 든다. 이는 정부가 결정한 지출이지만, 부담은 국민에게 돌아간다. 국민의 혈세로 적성국의 선전 기관지를 구독하는 장면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구독료가 북한으로 들어간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다. <노동신문>은 통상 북한 대외출판물 취급 기관이나 정부 승인 수입 대행 경로를 통해 들여온다. 그리고 공공기관이 지불한 구독료는 이 대행 경로를 거쳐 북한 당국 산하 출판·선전 기관으로 귀속된다. 즉, 공공 예산이 적성국의 체제 선전 재원으로 간접 이전되는 구조다.
국회도서관은 국가 지식 체계의 상징이다. 그 공간에 어떤 자료가 놓이느냐는 국가가 무엇을 공적 지식으로 승인했는가를 보여준다. 이 상징적 무게를 정부는 과연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와 여권은 반론을 제기한다. 북한 매체를 금기시하는 것이 오히려 공포를 키워왔고, 정보 차단이 냉전적 사고를 강화해 왔다는 주장이다. 이제는 숨기기보다 드러내 비교하고 판단해야 할 시점이라는 논리다. 개방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개방을 해도 접근을 허용하는 것과 정부가 직접 구독하고 공공기관에 비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자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후자는 정부의 승인이다. 정부는 이 자료가 공공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음을 스스로 선언한 셈이다.
일부에서는 <노동신문> 개방이 오히려 북한 체제의 허구를 드러낼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노동신문>은 선전의 밀도와 개인 숭배의 구조를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효과는 개인의 독해 능력에 달려 있다. 국가는 효과를 기대하며 책임을 유보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또 우리는 북한의 선전물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지만, 북한 주민은 한국 언론을 자유롭게 접할 수 없다. 정보 개방은 상호적일 때 의미를 갖는다. 지금의 개방은 일방적이며, 그 부담은 국가 전체가 떠안는다.
이번 조치는 단독으로 보면 일회성 정책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흐름으로 보면 다르다. <노동신문> 개방, 북한 사이트 60여개 개방 추진, 탈북민을 ‘북향민’으로 바꾸려는 시도, DMZ 평화의 길 재개방 논의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조치는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다. 국가 안보의 경계선을 낮추는 방향이다.
이 조치가 일회성 판단이 아니라는 점은 국회의 움직임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14일 여권은 북한 자료 개방을 전제로 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잇따라 발의했다. 정부의 행정 조치에 입법이 즉각 호응하며, <노동신문> 개방이 정책을 넘어 제도화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재명정부는 지금 안보를 재정의하고 있다. 적대와 경계의 언어를 걷어내고, 관리와 개방의 언어로 대체하려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국가가 져야 할 책임까지 함께 내려놓고 있다는 점이다. 판단의 부담을 국민에게 넘기면서, 정부는 한 발 물러서 있다.
왜 지금인가. 왜 이렇게 빠른가. 사회적 논의는 충분했는가. 국회 차원의 공론화 과정은 있었는가. 답은 모두 ‘아니오’에 가깝다. 정권 초기,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분명한 이념적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상징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전 정부와 다르다”는 메시지를 안보 영역에서 가장 먼저 던졌다. 그러나 안보는 정부의 차별화 수단이 아니라 국가의 생존 장치다. 실험의 대상도 아니다. 안보 정책은 속도가 아니라 축적의 문제다. 신중함이 곧 국가의 책임이다.
정부는 말할 것이다. “우리는 열어줬을 뿐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런 말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가는 언제나 판단의 결과를 떠안는 주체다. 특히 안보 영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열어두겠다는 결정 자체가 이미 정부의 판단이자 국가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열어두는 것과 지켜내는 것은 동시에 가능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국가 공동체의 안전 위에서만 성립한다. 그 균형을 잃는 순간, 자유는 책임 없는 방치로 변한다. 국가가 경계를 포기할 때 자유는 확장이 아니라 공백이 된다.
<노동신문> 개방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부 판단의 문제다. 그리고 지금 이 판단은 너무 가볍다. 국회도서관에 깔린 <노동신문>은 종이가 아니라 신호다. 국가가 무엇을 위험으로 보지 않기로 선택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열어둔 창문인지, 허문 방어선인지는 시간이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든, 대가는 늘 국민과 국가가 치러왔다. 그래서 이 문제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정부가 경계를 내려놓는 순간, 그 빈자리를 책임져 줄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개방이 아니다. 누가 무엇을 열었고, 그 결과를 누가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다. 안보는 선의로 운영되지 않는다. 판단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책임은 언제나 국가의 몫이다.
국회도서관에 놓인 <노동신문>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그것은 정부가 국민과 국가 앞에 던진 안보에 대한 메시지다. 이 메시지가 자유의 확장이었는지, 아니면 방어선의 해체였는지는 곧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의 성적표는 언제나 그래왔듯, 권력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 앞에 놓일 것이다.
소설 <목민심서>를 통해 정약용의 통치 윤리를 현대로 옮긴 황인경 작가는 <노동신문> 개방에 대해 "경계를 낮추는 정치는 쉽다. 그러나 그 결과를 끝까지 짊어지는 것이 목민”이라고 말했다. 정약용이 말한 목민은 단순한 행정이나 통치가 아니라, 백성을 대신해 판단하고 그 판단의 결과를 끝까지 책임지는 일이다.
정부는 200여 년 전 다산의 경고를 지금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