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버린 성폭행 증거, 왜?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4.07.08 14:58:48
  • 호수 14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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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있는데 증거불충분 구속 기각?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사랑이 폭력으로 바뀌고, 애인은 가해자가 됐다. 이 일도 충격이지만, 폭행·강간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을 두고도 “성폭행이 아니다”라고 판단한 검사가 더 충격적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향해 뿌리치고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가해자는 피해자를 강간했다. 이런 상황이 성폭행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성폭행이 되는 것일까?

김지애(가명)씨가 전 남자친구 정성훈(가명)씨를 만나기로 한 이유는 ‘잘해줘서’였지만, 이 결정을 머지않아 후회했다. 정씨는 김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정씨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김씨가 정씨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알코올 중독인 걸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사회생활을 잘했으며 티도 나지 않았지만, 정씨가 1년 내내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됐다.

홈캠 촬영

‘술만 마시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은 정씨를 두고 한 말이었다. 술을 마셔도 바깥에서는 좋은 사람이었던 정씨는 김씨와 단 둘이 있을 땐 폭력적으로 변했다. 힘이 약한 김씨는 정씨의 폭력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욕을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폭력은 주로 김씨와 단둘이 있을때 발생했다.

술을 마셔도 바깥에선 멀쩡했지만 집에 오면 변했다. 처음엔 잘해줬지만 이내 본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갈수록 상황은 심각해졌다.

알고 보니 정씨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갈 상황에 처한 적도 있었다. 뒤늦게 정씨의 친구가 김씨에게 해준 말이다.


이러다간 정씨한테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김씨는 특단의 조처를 했다. 바로 집에 ‘홈캠’을 설치했다. 홈캠은 CCTV와 달리 설치된 장소서 움직임이 생기면 작동되며, SD 메모리카드를 따로 넣어야 영상이 녹화된다. 또, 가끔은 녹화가 되지 않는 상황도 있다.

지난 2월5일 김씨는 정씨에게 헤어지자고 통보했다. 그리고 6일이 지난 11일 새벽 2시 김씨가 자는 새, 정씨가 김씨의 집에 쳐들어와 재회할 것을 강요했다.

강제로 몸을 끌어안고 침대에 넘어뜨리는 등 과격한 행동을 했다. “집을 나가라” “하지 말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김씨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몸싸움이 1시간 동안 지속됐고, 이 시간 동안 김씨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밖에선 다정했지만
둘이 있으면 폭력적

정씨는 김씨를 강간·폭행하면서 “나를 다시 만나주면 그만하겠다”고 했다. 집을 나가라고 소리치던 김씨도 계속 거부하면 정말 죽을까 싶고 살고 싶어서 재회를 허락했다. 어쩔 수 없이 김씨는 정씨와 처음 연애를 했던 때처럼 대화했다. 

조금이라도 정씨의 의견에 반대되는 말을 하면 바로 폭력적인 모습이 나왔다. 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까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5일 뒤 정씨는 갑자기 김씨에게 욕을 했다. 이유는 김씨와 김씨의 친구가 SNS를 했기 때문이었다. 정씨는 김씨를 ‘미친년’이라고 부르며 욕했고, 다짜고짜 욕을 들은 김씨는 기분이 나빠서 화를 냈다. 적반하장으로 정씨는 김씨에게 “너 친구를 욕하는 게 왜 기분이 나쁘냐”며 김씨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그날 김씨는 정씨에게 다시 2월17일에 이별을 통보했다. 

김씨는 정씨와 완벽하게 헤어졌단 생각에 홀가분해졌다. 이제 폭언, 폭행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됐다는 생각이었지만, 이내 이 생각은 무너졌다.

지난 2월20일 오전 0시5분, 침대서 쉬고 있었던 김씨는 누군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듣고 몸이 굳어졌다. 이내 정씨가 들어왔고, 김씨는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정신을 차리고 “집을 나가라”고 소리쳤지만, 정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김씨가 앉아 있는 침대 옆에 앉았다. 

김씨가 정씨를 나가라고 현관 쪽으로 밀자, 정씨는 김씨의 양팔을 잡고 몸을 침대로 던졌다. 다시 일어나려고 하는 김씨의 얼굴을 밀치며 못 일어나게 막았고 얼굴을 손으로 압박했다. 강제로 김씨의 목을 잡고 누른 뒤 몸을 압박하며 성추행했으며, 목을 끌어안으면서 일어날 수 없도록 다리로 몸을 붙잡으며 압박했다.

김씨가 정씨를 아무리 밀어도 밀리지 않았으며, 발버둥 치는 김씨의 뺨을 때리거나, 강제로 눕혀서 목을 조르다가 베개로 얼굴을 눌렀다. 숨을 쉬지 못한 김씨는 극한의 고통과 두려움을 느꼈다.

정씨는 김씨를 향해 “조두순이랑 사귀어라” “죽어라” “너 집에 범죄자를 부르겠다” 등 폭언을 했으며, 이런 상황이 4시간 동안 이어졌다. 결국 정씨는 김씨의 속옷을 강제로 벗겨 강간했고, 그 순간 김씨는 기절했다.

술에 취한 정씨는 그대로 뻗었다. 김씨가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고 자는 정씨를 깨워서 쫓아냈다. 정씨는 반성하지 않고 “정신이 나간 년, 앞으로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다. 꺼져라”고 욕하며 집을 나갔다. 김씨는 그날 퇴근한 뒤 가까운 지구대에 정씨를 신고했고, 다음 날 성폭행 사실을 인정한다며 연락을 해왔다.

다른 영상 가져오라고?
“가해자 말만 신뢰” 주장

이후에도 정씨는 김씨의 집에 무단침입하려 했으나, 경찰관이 찾아와 정씨를 집에 돌려보낸 적이 있다.

끔찍한 사건보다 황당한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김씨는 ▲상해진단서 ▲정신과 진단서 ▲녹취록 ▲홈캠 영상을 경찰서에 제출했다. 담당 수사관은 이 영상을 확인한 뒤 “너무 심각하다.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 걱정 마라”고 말했다.

문제는 검찰에 있었다. 담당 여성 검사는 증거물을 다 확인했지만 강간, 폭행을 인정하지 않았고 증거불충분으로 경찰로 되돌려 보냈다. 오히려 정씨의 “합의로 관계한 것이다. 때린 적도 없고 잘못한 것 없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새벽에 관계를 더 했다”는 말을 믿었다.

검사는 홈캠 영상이 매끄럽지 않고 끊어지는 데다 영상이 전체가 아니라며, 도리어 김씨가 영상을 조작한 것으로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요시사>가 김씨에게 받은 영상을 확인한 결과, 해당 사건은 명백한 성폭행, 폭행, 주거침입이 발생했다. 목을 조르거나 숨을 못 쉬게 하는 장면도 있으니 살인미수라고 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음성까지 녹음돼 있어 김씨가 피해자란 사실이 명확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담당 여성 검사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구속 영장을 기각했다. 기존 영상에 성폭행당하는 장면이 명백한데도, 다른 영상을 더 가져오라고 했다. 정씨가 “너가 나 버리고 간 게 너무 미워서” “엄청 사랑한다면서 나 버리니까(그랬다)”며 성폭행을 인정한 카톡도 있지만, 증거로 사용되지 않았다.

김씨는 현재 다른 집으로 이사갔지만 직장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어서 여전히 가해자인 정씨와 같은 동네에 거주 중이다.

“당했는데…”

김씨는 “검사는 정씨가 협박해서 억지로 재회한 것 등을 두고 성폭행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내가 낸 증거자료는 모두 소용없었다. 미쳐버릴 것 같고 너무 억울하다. 최대한 안전하게 이별하려던 것이 나를 꽃뱀으로 만들었다. 검사는 가해자 말만 믿고, 여전히 나는 가해자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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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