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쏙 들어간’ 피의사실 공표 논란

같은 식구라 하는 척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배우 이선균씨가 경찰 수사를 받다 세상을 떠난 지 세 달이 다 돼간다. 그의 죽음으로 불거졌던 피의사실 공표와 관련된 조사나 처벌은 여전히 미미하다. 경찰의 실적을 위해서인지 사문화된 법조문 때문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제2의 이씨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관련자 처벌과 관련 법 개정이 절실하다.

지난해 12월, 고 이선균 배우가 마약 투약 혐의로 수사를 받다 목숨을 끊은 후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사 자료를 유출한 사람에 대한 징계와 피의사실이 유출된 사람에게 공표금지 청구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경찰 등에 따르면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 마약범죄수사계는 이씨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상 대마·향정 혐의로 입건하고 지난해 10월부터 수사했다. 

시끌벅적
마약 사건

수사 과정서 이씨는 간이시약 검사를 비롯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1·2·3차 정밀검사에서 음성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경찰은 지난해 12월23일 이씨를 3차로 불러 19시간에 걸친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했다. 같은 달 26일엔 변호인을 통해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의뢰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인천경찰청 마약범죄수사계에 제출했다.

마약 투약 혐의 관련 증거가 유흥업소 실장의 진술뿐이라 억울하다는 입장이 의견서에 적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결백을 주장하던 이씨는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 인근 성북구 성북동의 한 주차장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이씨가 구체적인 수사 상황과 확인되지 않은 혐의가 실시간으로 보도되자 이씨가 심적 부담감과 절망감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봤다.

실제로 이씨 사건 당시 수사 과정서만 확보할 수 있는 진술, 자료, 수사 계획 등이 지속적으로 보도됐다. 심지어는 통상 피검사자에게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 마약 검사 상황이나 결과 등까지도 실시간으로 보도됐다. 게다가 수사 상황과 상관없는 이씨의 사생활이나 확인되지 않은 의혹까지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기도 했다.

경찰 내부서 수사 자료를 유출했다는 의혹이 커지자 김희중 인천경찰청장은 “이 사건과 관련한 조사, 압수, 포렌식 등 모든 수사 과정에 변호인이 참여했고 진술을 영상 녹화하는 등 적법 절차를 준수하며 수사를 진행했다”며 “일부서 제기한 경찰의 공개 출석 요구나 수사 상황 유출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의혹이 사그라들지 않자 경기남부청에선 인천경찰청으로부터 이씨 사건 수사 정보 유출 경위 관련 수사 의뢰를 받아 조사에 착수했다. 

경기남부청은 지난 1월18일 정식 조사에 착수하고 같은 달 23일, 이씨 수사를 진행한 인천청 마약범죄수사계와 이씨 수사 정보를 자세히 보도한 언론사 등을 압수수색하며 재빠르게 행동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수사보고서가 유출된 것은 맞다”는 수사 유출을 확인한 것 외에는 진척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내부 문건인 수사보고서를 유출한 사람이 누군지 유출 경위는 어떻게 되는지조차 파악되지 않은 것이다. 

경찰은 해당 사건에 대한 수사를 상당히 진행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홍기현 경기남부경찰청장은 지난 4일 기자 간담회 자리서 “수사 유출 목록 확인 등 필요한 수사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며 “추가 압수수색 여부 등 자세한 수사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종수 국가수사본부장도 지난 4일 정례 간담회서 “철저하게 필요한 수사는 모두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일각에서는 경찰이 실적 수사를 지향하고 있어 징계 절차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지난해 4월 전국 시·도경찰청장 화상회의서 ‘마약범죄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마약범죄 수사 유공자를 특진 임용했다.

이선균 사건 모든 수사 상황 중계 보도
징계 없이…경찰 실적 위해 처벌 안 해?

윤 청장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테러와도 같은 마약범죄 근절을 위해 계속 노력해줄 것을 당부드린다”며 “올해 마약 특진 규모를 작년의 6배인 50명 이상으로 늘리고, 공적이 뛰어나다면 수사팀 전체도 특진시키는 등 대대적으로 포상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윤 청장의 발언 이후 경찰의 모든 기능이 마약 수사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각 시도경찰청장(본청은 국가수사본부장)이 총괄하는 합동단속추진단 설치 구상을 내놨다. 

이런 상황서 유명 연예인이 연루된 마약범죄로 이목을 끌고 수사 결과까지 좋았다면 팀 단위 특진은 떼놓은 당상인 셈이다. 한 마약수사계 경찰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다른 사건보다 마약범죄 보도가 많이 된 것은 수사 실적을 널리 알리려는 내부적인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경찰 출신 변호사는 “이씨 사건은 경찰이 명확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서 수사가 진척됐다”며 “내부 자료를 유출하고 또 강압적인 수사를 진행해 자백받아 사건을 마무리해 실적을 올리려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이목을 끈 덕분인지 인천경찰청은 지난달 역대 가장 많은 6명의 총경 승진 인사를 배출한 데 이어 전국 경찰청 성과 평가에서 ‘A’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달 21일 경찰청이 국민의힘 김웅 의원실에 제출한 18개 시·도청 성과 평가 등급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부산청 등 4곳은 가장 높은 S 등급(상위 20% 이상)을 받았다. 인천청을 비롯해 대구·광주청 등 7곳은 A 등급(상위 40% 이상)이었다.

등급은 최고인 S부터 최하인 C까지 4개로 나뉘는데, 소속 직원의 성과급과 승진 인원에 영향을 준다.

이를 두고 부실 수사 논란과 기밀 유출 의혹에 휩싸인 인천청이 상위 두 번째에 해당하는 평가를 받은 것을 두고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경찰청 관계자는 “성과 등급은 치안 종합성과 등 각 지표를 종합 판단하는 만큼 하나의 사건이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다”고 항변했다.

어디까지
진행됐나

경찰 내부에선 인천청이 실적을 인정받았는데 징계위원회가 열리게 되면 경찰청 전체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어 조사나 징계위원회 구성이 늦어지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피의사실공표죄가 이미 사문화된 조문이라는 의견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피의사실공표죄는 1953년 형법이 만들어질 때부터 존재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민감한 피의사실이 공개되면 ‘여론재판’이 이뤄져 무죄추정의 원칙은 의미를 잃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상실될 우려가 있다는 취지였다.

형법 제126조에 따르면 검찰, 경찰 그 밖에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수행하면서 알게 된 피의사실을 공소제기 전 공표한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하지만 피의사실 공표에 관련한 형사 판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난 10년간 검찰서 피의사실 공표로 기소한 사례조차도 없다.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지난 2019년 5월 발표한 피의사실 공표 사건 조사 및 심의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2018년까지 검찰에 피의사실 공표로 접수된 사건은 347건이지만 기소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단지 검찰서도 그저 민사소송의 대법원 판례만 참고할 뿐이다.

대법원은 지난 2002년 9월24일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공표 행위는 공권력에 의한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국민들에게 그 내용이 진실이라는 강한 신뢰를 부여함은 물론 그로 인해 피의자나 피해자 나아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 치명적인 피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수사기관의 발표는 원칙적으로 일반 국민들의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항에 관해 객관적이고 충분한 증거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실 발표에 한정돼야 하고 이를 발표함에 있어서도 정당한 목적하에 수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에 의해 공식의 절차에 따라 행해져야 하며 무죄추정 원칙에 반해 유죄를 속단하게 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나 추측 또는 예단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표현을 피하는 등 그 내용이나 표현 방법에 대해서도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는 매우 엄격한 요건하에서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이 공표 목적의 공익성, 공표 내용의 공공성, 공표의 필요성, 피의사실의 객관성 및 정확성, 그 표현 방법, 침해되는 이익의 성질 및 내용 등을 두루 고려하지 않고 관행처럼 피의사실 공표를 묵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도 
흐지부지?

이를 두고 대한변호사협회 사법인권침해조사단 소속 한 변호사는 “기소 판단의 주체가 수사기관이라는 특이점서 온 현상”이라며 “수사기관의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수사 관행을 타파하고 관련 법령체계를 합리적으로 재정비하기 위해 실정법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피의사실공표죄가 사문화된 것에는 법무부와 수사기관의 공보 규칙서의 많은 예외 사항이 있는 것이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예외 사항으로는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가 존재하거나 발생할 것이 명백한 경우’, ‘중요 사건으로서 언론의 요청이 있는 등 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는 경우’ 등 6개 사항이다.

특히 ‘중요 사건’의 범위가 넓은 것도 문제다. ‘공소시효가 임박한 사건’ ‘내란, 외환, 대공, 선거, 노동, 집단행동, 테러, 대형참사, 연쇄살인 관련 사건’ ‘판사 또는 변호사의 범죄’ ‘국회의원 또는 지방의회 의원 등 공직자 범죄’ ‘공안사건’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등이 여럿 있다.

‘특히 사회적 이목을 끌만한 중대한 사건’도 포함되는데, 이 또한 자체 해석에 따라 고무줄처럼 적용될 여지가 있다.

실례로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현 조국혁신당 대표)의 자녀 입시 비리 수사 당시 검찰 수사 내용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피의사실공표죄 적용을 둘러싼 논란이 있기도 했다. 

이에 법무부는 당시 기존 수사공보준칙을 폐지하고 공표 금지의 강도를 더욱 높인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재개정했다.

해당 규정에는 내사 사실을 포함해 피의사실과 수사 상황 등 형사사건 관련 내용은 원칙적으로 공개가 금지되고 공개소환 및 촬영이 전면 금지된다고 나와 있다. 예외적으로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공개가 허용된 경우에도 수사에 관여하지 않는 전문공보관의 공보와 국민이 참여하는 형사사건공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해 사건관계인의 인권보장과 국민의 알 권리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하지만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공익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피의사실 공표는 계속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애매모호한 규정만 있어 죄를 입증하기도 처벌을 하기도 어렵다고 주장한다. 발표할 수 있는 사실의 범위, 구체적인 언론 대응 기준이 수사기관마다 다른 점 등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없다?
흘려도 71년 동안 기소 없어

미국의 경우는 검사의 업무 지침에 언론 브리핑 원칙이 적혀 있다. 그중 피의자의 범죄 전력, 유무죄에 대한 의견 등 편견을 낳을 수 있는 정보는 공개할 수 없다. 보도자료에도 “단순한 혐의에 불과하며 재판이 확정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된다”는 코멘트 역시 필수로 적도록 했다.

미국 미연방대법원서도 “언론의 자유는 모든 법적 절차 과정서 최대한 보장돼야 하나 그것이 재판의 원래 목적인 공정성을 혼란시킬 정도로 허용돼서는 안 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피의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표돼 재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언론사와 수사기록을 흘린 사람을 법정 모욕죄에 따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피의사실공표죄의 사문화를 없애기 위해서는 법령 개정이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재현 오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피의사실공표죄의 사문화는 공보와 피의사실 및 위법성 조각 사유 사이에 얽힌 법리와 명확하지 못한 기준들도 적지 않은 원인이 됐을 것”이라며 “명확한 기준 제시를 통해 공표의 내용과 범위를 설정하는 게 규범력을 회생시키는 데 가장 중요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김상겸 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피의자의 인권과 국민의 알 권리 관계를 고려해 보다 조화롭게 개정해야 한다”며 “피의사실이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중대한 범죄로 인해 공익적 목적이 있거나 피의자가 공적 인물인 경우 우선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피의자의 기본권 보장과 관련한 엄격한 기준이 적용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수사 과정서의 일반적·절차적 사항은 공표가 가능하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봤다. 

그는 “중요한 건 진술과 증거 내용이다. 어떤 맥락이나 관점서 해당 진술을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뒤바뀔 수 있다. 증거도 위법하게 수집됐거나 ‘전문 증거(타인에게 전해 들은 말)’일 수도 있다. 법원이 심리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태서 일방적 진술이나 증거가 진위 확인도 없이 공개되면 편견과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는 것”라며 “객관적 사실만을 공표할 수 있게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하는 이른바 ‘이선균 금지법’ 이야기도 대책으로 꼽혔다. 지난 1월30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법센터 소속 백민 변호사는 “수사기관 등이 피의사실을 공표한 경우 피의자가 법원에 피의사실의 삭제와 피의사실 공표 금지를 청구할 수 있도록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변호사는 “재판부에 선입견을 심을 수 있는 피의사실을 검찰이나 경찰이 기소 전에 공개한 것으로 의심될 때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판사 출신 더불어민주당 김승원 의원도 지난해 12월 피의사실공표금지청구권을 신설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피의사실이 공표·유포·누설됐을 경우, 피의자가 법원에 언론 보도 등을 삭제하거나 앞으로의 공개도 막게 해달라고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내용이다.

이선균 
금지법

한편 수사기관이 흘린 피의사실을 그대로 받아적는 언론기관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이야기도 나온다.

백 변호사는 “피의사실 공표는 수사기관의 실적 홍보와 언론기관의 선정적 보도라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에 서로 확대, 증폭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언론사에 대한 실효적인 대책도 필요하다”며 “수사기관이 제공하는 정보를 받아 위법하게 피의사실을 보도한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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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