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800억’ 파두 사태 전말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3.12.07 15:22:24
  • 호수 14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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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려도 너무 불린 ‘뻥튀기 상장’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1조800억원 가치의 팹리스(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파두(FADU)가 내리막을 걷고 있다. 기대와 달리 미미한 실적이 드러나면서 이른바 ‘파두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주가가 반토막 나자 투자자들은 집단소송을 언급했다. ‘기술특례상장’ 제도라는 날개를 달았던 파두의 추락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시작은 호재였다. 파두는 2015년 컨설팅 회사 베인앤드컴퍼니 출신 이지효 대표와 SK텔레콤 융합기술원서 반도체 연구원으로 일했던 남이현 대표가 세운 스타트업이다. 주력 제품은 데이터센터서 데이터 처리속도를 높이고 안정적인 전송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SSD(Solid State Drive·데이터 저장 장치)컨트롤러다. 

날개 달고

지난 2월 120억원의 프리IPO(상장 전 지분투자)를 이뤄냈다. 스타트업 펀딩 냉각 속에서 명확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점도 높게 평가됐다.

SSD 컨트롤러는 SSD에 탑재되는 시스템반도체를 의미한다. SSD 내에서 읽기, 쓰기, 수명 관리 등을 처리한다. 주요 고객사로는 SK하이닉스와 페이스북 지주사 메타가 있다. SK하이닉스에는 ‘Gen 3 SSD’ 컨트롤러를 공급하고 있으며, 메타에는 ‘Gen 4 SSD’ 완제품 형태로 납품했다.

이밖에 주력 사업은 디스플레이 구동시스템 반도체(DDIC), 메모리 하드디스크(HDD, 컴퓨터 대용량 저장장치) 설계 등이다. 국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말고는 독자 설계가 불가능한 기술인 만큼 기대감을 키웠다. 파두 연구원들은 서울대 반도체 연구실서 박사 시절부터 십수년을 갈고닦은 재야의 고수들로 평가받는다.


본격적인 매출이 발생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지난해 매출은 564억원으로 당시 Gen 3 SSD 컨트롤러 매출은 439억원, Gen 4 SSD 완제품 매출은 123억원을 기록했다. 세계적으로도 인텔, 마이크론, 도시바 정도가 낸드와 SSD를 이해하고 컨트롤러를 독자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그렇기에 파두의 도전은 의미가 있었다.

기대와 달리 상장 직후부터 불안감을 안겼다. 이지효 파두 대표는 지난 7월24일 서울 영등포구 63빌딩서 열린 기업공개(IPO) 기자간담회서 “PMIC, 네트워크 반도체, CXL 관련 반도체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며 “상장을 통해 확보된 자금은 내년부터 양산을 위한 운용자금으로 사용하고,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도 아낌없이 투자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파두는 NH투자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을 공동 주관사로 IPO서 총 625만주를 공모했다. 주당 공모 희망가액은 2만6000~3만10000원으로 상장 후 예상 기준시가 총액은 약 1조2495억~1조4897억원으로 측정됐다.

이 대표의 포부와 달리 지난 8월7일 코스닥 시장에 입성한 파두는 첫날부터 공모가를 밑도는 부진한 성적으로 거래를 마쳤다. 당시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파두는 공모가(3만1000원) 대비 15.2% 하락한 2만6300원에 시초가를 형성한 뒤 장 초반 2만5000원까지 떨어졌다.

이후 소폭 반등하기도 했으나 결국 공모가보다 11% 낮은 2만7600원으로 마감했다. 시가총액은 1조3263억원으로 코스닥 시장 44위에 머물렀다.

파두는 상장 전 진행한 기관투자자 대상 수요 예측서 참여 기관 84.4%가 희망공모가격(2만6000원~3만1000원) 상단보다 높은 가격을 써내며 공모가를 3만1000원으로 확정한 바 있다.

국내 유일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장밋빛 기대…까보니 매출 5900만원


하지만 수요 예측 경쟁률은 362.9대 1로 지난 7월 수요 예측을 실시한 곳 가운데 파로스아이바이오(303대 1), 큐리옥스바이오시스템즈(192대 1)를 제외하고 가장 낮았다. 일반 청약 경쟁률도 79대 1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부푼 기대감이 흥행에 독이 됐다고 풀이했다.

최종경 흥국증권 연구원은 “(8월7일)파두의 주가는 회사의 기업가치 대비 공모가가 11% 비쌌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파두는 상장 3개월이 지나서도 사상 최저가를 나타냈다. 지난 9일 파두 주가는 전날보다 1만400원(29.97%) 내린 2만4300원에 장을 마쳤다. 이날 파두 종가는 상장 첫날 기록했던 역대 최저가(2만7600원)를 밑도는 수준이었다.

이날 급락으로 파두 시가총액은 전날 1조6890억원대서 1조1830억원대로 하루 만에 5000억원 규모가 증발했다.

10월까지만해도 파두 주가는 4만원선서 거래되며 기대감을 안겼다. 그러나 계속된 주가 부진에 이어 하한가를 맞이하면서 투자자들은 회사명에 빗대어 “파두 파두 끝이 없는 지하실”이라고 비꼬았다. 이날 코스닥서 하한가를 기록한 종목은 파두가 유일하다. 

파두의 ‘뻥튀기 상장’ 논란은 이날 3분기 실적이 공시된 이후 불거졌다. 파두는 3분기 매출 3억2100만원, 영업손실 148억원을 기록했다고 공시했다. 2분기는 이보다 더한 5900만원에 그쳤다. 파두는 금융당국에 제출한 증권신고서에서 올해 연간 매출액 자체 추정치로 1202억원을 제시했다.

그러나 올해 3분기까지 누적 매출액은 180억원에 불과한 상태다.

주가가 반토막 위기에 놓이자 이 대표는 실적자료를 통해 “메모리 산업은 지난 10년간 가장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다”며 “단기적으로 볼 때 파두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큰 그림서 파두는 올해 강한 기반을 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악화된 실적에 겹쳐 최근 3개월 보호예수 물량(373만8044주)이 풀리면서 매도세가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기관과 외국인은 각각 63억800만원, 83억4200만원 규모의 파두 주식을 순매도했다. 반면 개인은 133억9800만원을 순매수하며 저가매수에 나섰다.

매출 공백으로 돌아선 투심은 회복되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파두의 주가는 2만850원으로 전일 대비 550원 내린 가격에 거래됐다. 실질적인 매출보다 고평가된 파두는 ‘기술특례상장’ 제도를 통해 상장할 수 있었다. 전문평가기관으로부터 기술성과 미래가치를 인정받은 파두는 비교적 진입장벽을 쉽게 넘었다는 것이다.

기술성장기업은 일정 시가총액, 매출, 매출 증가율, 주가순자산비율(PBR) 등 요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가능했다. 실제 기업가치보다 부풀려지기 쉽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기술특례상장’ 손질 나선 당국
업계선 SSD 시장 하락세 감지

파두 사태에 관해 상장주관사의 책임도 부각됐다. 파두 상장을 주관했던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등은 상장 전 제시되지 않은 2분기 매출 공백에 대해 알 수 없었다는 입장이다. 그러자 투자자들은 주관사가 모를 수 없다고 봤다. 최근 투자자들은 파두와 상장주관사들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례상장 기업들의 공시 의무를 강화하고 공시 위반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쏟아졌다.

금융당국은 기술특례상장 기업들의 ‘실적 부풀리기’를 막기 위해 나섰다. 당장 예비 상장사들은 IPO(기업공개)를 위한 증권신고서 제출 시 제출 직전 월까지의 매출액·영업손익 등(잠정 포함)을 추가로 기재하고, 자본잠식 상태 기업들은 자본잠식 해소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포함하도록 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4일 한국거래소, 금융투자협회, 주관사, 코스닥협회와 간담회를 갖고 상장 프로세스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당국은 IPO 시장의 공정과 신뢰 제고를 위해 ▲상장 추진기업의 재무정보 투명성 제고 ▲상장 주관업무 내부통제 강화 ▲유관기관 협력 확대 등을 통해 상장 프로세스를 개선할 계획이다.

이날 김정태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IPO 시장은 무엇보다도 투자자의 신뢰를 기반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투자자를 기망하는 등 시장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조사 역량을 총동원해 엄정히 조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급추락

한편, 업계에선 이번 파두 사태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 나온다. 파두가 주력으로 개발하는 SSD 컨트롤러 시장이 위축될 전망은 이미 나온 얘기라는 것이다. 해당 업계에선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주목을 받으면서 SSD보단 그래픽처리장치(GPU)가 부각될 것으로 점쳐졌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번 파두의 매출 공백은 SK하이닉스 수주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는 파두가 주력하는 SSD 시장이 침체된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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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