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뉴월드호텔 살인사건 재구성

29년 만에 끝난 조폭 혈투

[일요시사 취재1팀] 옥지훈 기자 = 1994년 12월4일. 노태우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4년 뒤 ‘뉴월드호텔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강서구 영산파와 광주 신양파는 강남 일대서 주름잡던 조폭 집단이었다. 영산파 두목은 1991년 팔레스호텔 살인사건 당시 신양파 일당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3년이 지나고 영산파가 신양파 일당에게 보복범죄를 저지른 것이 살인사건의 전말이다.

29년 전,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뉴월드호텔서 4명의 조직폭력배 사상자를 냈던 사건 수배범이 지난 11일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한 수배범은 공소시효 기간 해외로 도피한 흔적이 들통나자 검찰이 공개수배에 나서면서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관악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후 4시30분쯤 관악구 소재의 한 호텔서 수배범 정동섭(55)이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경찰은 숙박업소 주인으로부터 “퇴실 시간이 지났는데 손님 인기척이 없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리적 압박
극단적 선택

현장에는 유서로 보이는 자필 문서와 전날 저녁 정씨가 혼자 입실한 점을 두고 극단적 선택에 무게를 두고 조사하고 있다.

정씨는 1994년 12월4일 뉴월드호텔 결혼식에 참석한 신양파 조직원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2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정씨는 당시 강서구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영산파 행동대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정씨는 자신의 두목을 살해한 광주 신양파에 앙심을 품고 보복살인을 계획한 것으로 조사됐다.


12명의 가담자 중 10명은 검거돼 처벌받았다. 영산파 조직원 12명 중 10명은 붙잡혀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정씨는 사건 직후 도주해 2011년 공소시효 만료로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고 국내서 살인죄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정상인처럼 생활해왔다.

사건의 또 다른 주범인 서모씨는 지난해 3월 영사관에 자진신고하고 귀국한 뒤 처벌을 피하려고 밀항 시점을 속였다가 적발돼 28년6개월 만에 구속 기소됐다. 중국으로 밀항했던 그는 지난해 갑자기 중국 영사관으로 찾아가 밀항 사실을 자수해 서씨의 신병을 넘겨받은 해경이 수사했다. 검찰은 그를 밀항단속법위반죄로 추가 기소했다고 밝혔다.

자수 후 1년간 전남 지역에 살던 서씨를 긴급체포한 검찰은 확보한 증거를 토대로 밀항 시기를 속였던 것을 밝혀냈다. 조사 결과 그는 1994년 사건 직후 도주해 숨어 지내다 2003년 가을 전북 군산서 선박을 타고 중국으로 밀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함께 검거되지 않았던 영산파 행동대장 정씨와 중국서 수차례 만나고, 가족까지 중국으로 불러들여 재회하는 등 대범한 도피 행각을 이어간 것으로 조사됐다. 서씨 밀항 시기가 2003년이면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경우’에 해당해 해외 체류 기간 공소시효는 정지된다.

12명 가담자 중 10명 검거…남은 2명은?
주범 서씨 구속 정동섭은 숨진 채 발견 

해외 도피 생활에 지친 서씨는 밀항 시점을 살인사건 공소시효가 끝나는 15년 뒤인 2016년으로 주장하면 살인죄 처벌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서씨는 1994년 살인범죄에 관한 공소시효가 만료된 15년 이후인 2016년 중국으로 밀항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해경은 살인 혐의를 적용하지 못한 채 밀항단속법 위반으로 서씨를 불구속 송치했다.


2015년에는 살인죄와 관련 공소시효까지 폐지돼 서씨는 뉴월드호텔서 저지른 살인죄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 이전에 밀항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재수사를 벌여 서씨가 2016년이 아닌 2003년 중국으로 밀항한 행적을 찾아냈다. 해외에 머문 기간 동안 공소시효가 중단됐고 살인죄 공소시효도 폐지된 만큼 검찰은 서씨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이영남 광주지검 차장검사는 “살인사건의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는 각오로 전면 재수사에 착수,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고 말했다.

뉴월드호텔 살인사건 수사는 정씨가 사망하면서 ‘공소권 없음’으로 종료될 예정이다. 검찰은 정씨와 서씨의 도피를 도운 이들을 향한 수사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당시 광주지검 관계자는 “서씨에 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될 무렵, 정씨가 재차 잠적해 소재가 불분명했다”며 “출석요구에도 응하지 않아 결국 지난달 26일 공개수배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이로써 뉴월드호텔 살인사건은 29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당시 서울 삼성동 뉴월드호텔 앞에서 자행된 집단살인사건은 범인들이 1991년 서울 팔레스호텔 조직폭력배 피살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조직적으로 저질렀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강남경찰서는 영산파 두목 이모씨와 행동대장 안모씨 등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된 조직원 10명에 대한 검거에 주력했다.

대범한 
도피 행각

당시 경찰은 범인들이 이번 범행에 앞서 팔레스호텔서 영산파 조직원 최모씨를 살해한 혐의로 복역 중이던 박모씨의 출소일에 맞춰 그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당시 경찰에 따르면 강남 일대 조폭 간 세력다툼으로 인해 최씨가 박씨에게 살해당했다. 

행동대장 안씨는 부하 10명과 함께 박씨가 출소하는 광주교도소로 내려갔으나 살해 계획을 사전에 인지한 선배들의 만류로 일단 범행을 보류했다. 이후 12월4일 뉴월드호텔서 보복범죄를 계획한 후 박씨를 살해했다. 그러나 살해된 박씨는 같은 성씨의 다른 인물로 밝혀졌다.

뉴월드호텔 살인사건은 그 당시 파장이 컸다. 1990년 노태우정부는 범죄와 폭력 등 민생치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0·31 특별 선언인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일각에서는 당시 노태우정부가 실제 민생치안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들고 나온 정책이 아니라 집권 4년 차를 앞두고 어지러운 정국과 사회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정책이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실제로 첫 시행단계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경찰이 폭력 조직 검거 건수를 올리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선량한 시민을 체포한 사례가 증가했던 것이다. 경찰이 검거한 조직에는 13세 초등생이 있을 정도로 무차별적이었다.


그러나 대낮 칼부림으로 이어진 뉴월드호텔 살인사건은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는 단초가 됐다. 당시 강남 번화가 일대를 지나던 행인은 칼부림 목격 후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폭력 조직을 향한 여론이 들끓자 조폭 소탕의 타당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1995년 서울중앙지검은 살인사건 주범 서씨와 정씨를 소재 불명으로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 이후 영산파 조직은 사실상 와해 수준으로 해체됐다.

팔레스호텔 
보복 계획

영산파는 20년 뒤 해외서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영산파가 운영하는 캄보디아 도박장서 원정도박을 벌인 국내 기업인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이 벌인 도박판 규모는 무려 수십억원에 달했다. 한 판에 1억원이 넘는 돈을 베팅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캄보디아의 한 카지노서 원정도박을 알선한 혐의(도박장소 개설 등)로 폭력조직 영산파 행동대장 전모씨를 구속 기소했다. 당시 검찰은 2014년 6월 전씨가 원정도박 브로커 문모씨와 함께 캄보디아의 한 카지노서 코스닥 상장업체 대표 오모씨를 유인한 혐의를 적용했다.

전씨는 오씨에게 60억원 상당의 도박 자금과 카지노칩 등을 제공했고, 오씨는 1회당 7000만원까지 베팅할 수 있는 바카라 도박을 수백회 했다. 전씨는 같은 방식으로 원정 도박자들을 유인한 뒤 카지노 업체 측으로부터 수수료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해외 도피와 관련 공소시효 정지에 관한 규정은 일반 공소시효에만 적용되고 재판 시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대법원 첫 판례가 나왔다. 재판 중인 범인이 해외로 도피하더라도 시효가 정지된다는 규정이 없다. 이처럼 재판 중 장기간 해외로 도피한 범인을 처벌하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면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1995년 유흥주점 인수대금 등을 마련하기 위해 피해자들을 속여 5억6000만원을 편취한 혐의로 1997년 8월 기소됐다.

같은 해 11월 1심 첫 공판이 열렸지만 이후 A씨가 1998년 4월 미국으로 출국해 다시 입국하지 않아 재판이 진행되지 못했다.

공소시효 계산 실수로 입국했다 붙잡혀
해외 도피 끝까지 심판 ‘김봉현 방지법’

1심 재판부는 “공소제기 후에 처벌을 모면하기 위해 국외로 도피한 피고인을 처벌할 필요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고, 또한 공소제기 전에 국외로 도피한 피의자의 경우와의 형평을 고려하면 공소제기 후에 국외로 도피한 피고인에 대해서도 ‘공소시효완성 간주’(재판 시효)의 시효를 정지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피고인에 대한 처벌의 필요만으로 공소시효 정지를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253조 3항이 구 형사소송법 제249조 2항에 적용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형사처벌에 관한 법규를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유추하거나 확장 해석하는 것으로서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어긋날 우려가 있다”고 결정했다.

국내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은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 참고하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이다. 대법원 판례는 1심 2심 재판부가 판결할 때 참조 판례로 제일 인용을 많이 한다. 법무부가 재판 시효 규정을 개정하기로 한 배경에는 해외 도피 피고인에 대해선 공소시효 규정을 적용할 수 없다고 한 대법원 판결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법무부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재판 중인 피고인이 형사처벌을 회피하기 위해 해외로 도피하더라도 재판 시효(25년)가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 정지돼 끝까지 처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현행법상 형사소송법이 정한 재판 시효는 25년이다. 공소제기 후 25년이 지나도록 확정판결이 나지 않으면 공소시효가 완성된 것으로 본다. 수사를 받고 있거나 형이 확정된 이후 해외로 도피하면 공소시효나 형 집행시효가 정지되는 반면, 재판 중인 피고인은 해외로 도피해 25년이 지나면 처벌할 방법이 없다.

이번 법 개정으로 수사나 형 집행 단계 시효정지 제도의 불균형이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라임 사태 주범인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이 보석으로 불구속 재판을 받던 도중 도주해 이에 대한 사각지대가 우려됐다. 이른바 ‘김봉현 방지법’으로 불리는 개정안이 통과된 후 김 전 회장이 해외로 나갔다면 신병 확보 후 처벌이 가능하다.

법무부는 입법 예고 기간 해당 법안에 대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개정안을 확정할 계획이지만, 도주 48일 만에 검거된 김 전 회장은 정부가 추진 중인 소위 ‘김봉현 방지법’ 적용은 피해가게 됐다.

해체된
영산파

해당 개정안은 부칙서 아직 공소시효가 완료되지 않은 범죄에도 적용한다고 규정한다. 향후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해외로 도피한 피고인에게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수사 과정서 김 전 회장이 도피 기간 중 해외에 출국했던 사실이 드러나면 적용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후 개정안에 대한 각계 의견을 수렴해 최종안을 확정하고, 국무회의를 거쳐 국회에서 통과돼야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범죄자들이 아무리 오래 해외로 도피하더라도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법률의 공백을 메우는 취지”라고 말했다.

<ojh34522@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밀항한 살인범
19년 지나 처벌 이유?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따지던 내연녀 남편을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뒤 19년 만에 나타나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우겼던 40대 남성 A씨가 범행 이후 1년5개월 뒤 밀항한 사실이 들통나 살인죄로 재판을 받게 됐다.

해당 남성은 추궁 끝에 1998년 4월 밀항 사실을 자백했으며 피해자는 A씨 내연녀의 남편이었다.

외도를 눈치챈 피해자가 여성를 때렸고, A씨가 이 사실을 알고서 피해자를 찾아가 다툼 끝에 살해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성은 피해자의 시신을 불에 태워 유기한 후 이들은 2015년 주중 영사관을 찾아가 밀항을 자수했다.

현지서 여권법 위반으로 붙잡힌 두 사람은 2016년 1월 한국으로 압송됐다.

한국으로 건너온 남성은 “살인죄 공소시효가 지난 2014년 중국으로 밀항했다”고 주장했으나 조사 결과 1998년 밀항했던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

이들은 한국서 재판에 넘겨져 A씨는 살인죄로, 내연녀는 여권위조죄로 법정에 서게 됐다.

이들은 중국서 은신하면서 투옥과 비슷한 삶을 살았기에 선처할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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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빅텐트 타령 국민의힘, 왜?

또 빅텐트 타령 국민의힘, 왜?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이 당심 반영 비율을 늘린 지방선거 경선 규칙을 발표했다. 이어 장동혁 대표를 필두로 지방선거 전략으로 ‘반명 빅텐트론’을 지난 대선에 이어 또 거론했다. 국민의힘이 6년째 내리 실패한 전략을 또 끌고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의힘이 지난달 25일 지방선거 경선 규칙을 발표했다. 국민의힘 지방선거 총괄기획단 대변인을 맡은 조지연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진행된 기획단 회의 후 “내년 지방선거 경선에서 당원투표 비중을 기존 50%에서 70%로 늘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민심보다 당심으로? 국민의힘 지방선거 공천은 당원투표 70%와 국민 여론조사 결과 30%가 혼합돼 결정된다. 만 44세 이하 청년은 가점을 부여받고, 여성 신인은 만 45세 이상이어도 가산점이 부여된다. 광역의원 비례대표 후보자는 청년 인재 오디션을 거쳐 선출해 최우선 순위로 당선권에 배치할 예정이다. 지난 2022년 지방선거 당시 국민의힘 대표였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시행했던 공직 후보자 기초 자격 평가는 기초자치단체장·기초의원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국민의힘 지방선거 총괄기획단장은 5선 나경원 의원이 맡고 있다. 나 의원은 서울시장 출마 후보군 중 1명으로 거론된다. 현 시점에선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일각에선 “나 의원이 사심 때문에 경선 규칙을 정한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당내 기반은 약하다”는 평가로부터 비롯되는 의심이다. 새로 정한 경선 규칙에 대해선 당내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김용태 의원은 지난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내년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실질적인 수권 전략을 실현하려면,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 규칙은 국민경선 100% 제도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비판했다. 윤 의원은 “민심이 곧 천심이고, 민심보다 앞서는 당심은 없다”며 “민의를 줄이고 당원 비율을 높이는 것은 민심과 거꾸로 가는 길이고, 폐쇄적 정당으로 비칠 수 있는 위험한 처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 사법부 압박 논란과 대장동 항소 포기 문제까지 있었는데도 우리 당 지지율은 떨어지고 여당 지지율이 오르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며 “여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성찰과 혁신 없이 표류하는 야당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갤럽이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정당 지지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지지율은 43%였고,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24%였다. 지난 7월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만 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화 면접 여론조사 당시 국민의힘 지지율이 19%를 기록했던 것에 비하면 높지만, 두드러진다고 보긴 어렵다. 내부 비판 이어지는데 당심 비중↑ 비상계엄 사과 두고도 ‘옥신각신’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당분간 크게 오르긴 어렵다”는 일각의 예측도 있다. 다음 달 3일은 비상계엄 1주년이라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실정과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불참 ▲윤 전 대통령 체포 저지 시도 ▲심야 대선후보 교체 시도 등 지난 1년 동안 국민의힘이 여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행보들이 다시 주목받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국민의힘 일부 소장파 의원들은 비상계엄 사과 등을 통한 윤 전 대통령과의 확실한 절연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은 지난 24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좀 더 명확한 메시지를 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당내에서도 나온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역사와 국민 앞에 누군가 사과해야 할 상황이고, 국민의힘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적인 계엄이 있었고, 탄핵에 이어 정권을 잃은 후 국정의 주도권을 넘겨줬다”고 강조했다. 반면 같은 당 김재원 최고의원은 같은 달 2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일회성 사과로 과거의 잘못을 끊어내고 새로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사과를 자꾸 하는 것은 오히려 현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며 “사과하는 것보단 앞으로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는 게 더 낫다”고 역설했다. 장 대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히고 있다. 그는 같은 달 25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후 “사과 메시지를 내는 것은 지금 말씀드릴 단계는 아닌 것 같다”며 “국민의힘이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은 무도한 이재명정권과 의회 폭거를 이어가는 민주당”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구미역 광장에서 진행된 민생 회복·법치 수호 경북 국민대회에 참석해 “저들이 똘똘 뭉쳐 우리를 공격하고 손가락질할 때, 우리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비판하는 게 부끄럽다”고 목소리 높였다. 그러면서 “대한민국과 자녀 세대를 위해 소리치는 우리가 아스팔트 세력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나라가 쓰러져가는데도 한마디도 못하는 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당 발언은 “사과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풀이된다. 돌발적인 계엄이다? 이재명 대통령·민주당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장 대표의 주장은 빅텐트론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나 의원도 지난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대통령과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국민의힘은 네 탓 공방을 벌이면서 분열에 빠져 있다”며 “정당의 뿌리를 흔드는 내부는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하나로 뭉쳐 민주당의 독재 완성 계략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에선 각종 선거와 정국에 대응할 때마다 빅텐트론이 거론됐다. 시작은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재임했던 지난 2019년이다. 이듬해엔 “각 정당·정파가 참여하는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모든 자유민주 세력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전 대표는 “통합 없이는 절대 이길 수 없단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며 “이 나라를 망치려는 사람들은 통합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황 전 대표가 주장했던 빅텐트론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란 헌법 가치를 공유한다면, 태극기 세력부터 중도 보수 인사까지 아우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을 토대로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으로 바뀌었다. 황 전 대표는 제21대 총선 패배 후 물러났다. 이 대표는 빅텐트론에 일관적으로 반대하면서 세대 포위론을 토대로 지난 2022년 대선을 지휘했다. 지난 6월 대선에 출마했던 이 대표는 국민의힘 등 보수 각계로부터 후보 단일화 요구를 받았다. 이 대표는 당시에도 국민의힘 등에서 주장했던 ‘반명 빅텐트론’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대선을 완주했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의 빅텐트론을 놓고 “혁신 요구가 나올 때마다 제기되는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빅텐트론의 핵심은 통합이다. 통합은 정치권에서 반대 계파·의견을 억압하는 수사로 활용되는 예가 잦다. 빅텐트의 핵심은 조정 능력이다. 여기엔 다양한 계파·의견을 조율해 갈등을 최소화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장 대표는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체제 전쟁 깃발 아래 모일 수 있는 모든 우파가 함께 모여서 이재명정권이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가려는 걸 막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주장하는 ‘체제 전쟁’의 근거는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민주당의 배임죄 폐지·대법관 증원 시도 등이다. 장 대표는 공식적으로 국민의힘과 관계없는 황 전 대표가 지난 12일 내란 선동 혐의를 받아 내란 특검에 의해 체포되자 “우리가 황교안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어지는 재탕 삼탕 이어 “국민의힘만으로 이재명정부·민주당과 싸우긴 어렵다”며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주도하는 자유통일당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주도하는 자유민주당 ▲새누리당 조원진 전 의원이 주도하는 우리공화당 ▲황 전 대표가 주도하는 자유와혁신 등을 연대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모두 부정선거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반해 개혁신당과 이 대표는 부정선거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장 대표가 주장하는 빅텐트론은 김문수 전 대선후보 등이 주장했던 빅텐트론과 큰 차이가 없다. 당시 김 전 후보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이기기 위해선 어떤 경우든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덕수 전 총리 ▲황 전 대표 ▲이낙연 전 총리 ▲이 대표 등을 통합 대상으로 지명했다. 권성동 당시 원내대표는 김 전 후보·한 전 총리의 단일화를 지지하면서, 당시 당내 주류와 불화했던 국민의힘 김상욱 당시 의원(현 민주당 의원)에게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장 대표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에게 당원 게시판 의혹 관련 압박을 가한 것과 비슷하다. 당시 권 전 원내대표는 “당원 대부분은 민주당 이 후보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반명 빅텐트가 필요하단 의견을 갖고 있다”며 “지도부는 당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는 부정선거론을 주장하는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연대를 주장하면서, 개혁신당과의 연대설도 공개적으로 부정하진 않는다. 일각에선 “오 시장이 장 대표·이 대표의 가교 역할을 한다”고 관측하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 9월 “개혁신당과의 연대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이후 꾸준히 개혁신당과의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이후 정치권 일각에선 “오 시장이 서울시장으로 다시 출마하고, 이 대표가 경기도지사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면 수도권에서 보수 진영이 선전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 <미디어토마토>가 지난달 28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특별시 거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무선·ARS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 시장은 보수 진영에서 민심 27.5%·당심 50.3%의 지지를 얻어 서울시장 후보 중 가장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선출한 후 ‘여당 프리미엄’을 앞세워 오 시장에 대한 공세를 이어간다면, 재선을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국민의힘이 중도층의 민심을 끝내 얻지 못하면, 오 시장으로선 힘겨운 선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체제 전쟁” 명분으로 사과 거부 홍 “국힘은 보수 참칭 사이비 레밍” 당내에서도 나 의원 등 막강한 경쟁자가 있어 본선행을 확실하게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지난달 23일 “국민의힘 내부에서 변화·쇄신 목소리가 전혀 안 나온다”며 “연대를 함께할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은 지난 대선에 이어 1990년대식 ‘뭉치면 이긴다’ 구호만 내세운다”며 “그 전략으로 패배한 사람은 황 전 대표였는데, 같은 선택을 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이해가 안 간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내부에도 연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민의힘 지도부에서 강경 보수의 주장을 가장 강하게 내세우는 김민수 최고위원은 같은 달 25일, 채널A 유튜브 채널 ‘정치시그널’에 출연해서 “이 대표는 당내 많은 분쟁을 가져온 사람이라서 화합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며 “개혁신당과의 연대는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김 최고위원의 주장은 오 시장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최고위원은 “개혁신당은 보수 정당인지, 진보 정당인지 모르겠고, 그 사이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저는 최고위원이 되기 전부터 우측으로의 연대를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대선은 기동전·총력전 성격이 강한 반면, 지방선거는 진지전 성격이 강하다. 선거의 성격이 다르지만, 국민의힘에선 똑같이 ‘반명 빅텐트’라는 구호를 거론하고 있다. 역사엔 위기 상황에서 변화를 거부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한 사례가 다수 기록돼있다.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 그 집단을 주도할 때, 이 사례는 더욱 빈번하게 재현된다. 중국 청나라에선 수구파를 이끌던 서태후가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던 광서제에게 반대해 정변을 일으켜 성공한 후 광서제를 유폐했다. 중국 정부가 지난 2008년 광서제의 능을 공식 발굴 조사한 결과, 광서제는 급성 비소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 3세 나이로 즉위한 청나라 황제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인 선통제다. 선통제는 영화 제목 그대로 마지막 황제였다. 광서제의 개혁 시도는 청나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취사 선택해 그 정보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불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을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지역구 관리에만 능하고, 기득권·이익 추구에만 관심을 두는 의원들이 당을 주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언더 찐윤’이란 집단이 거론된다. 확증편향 소탐대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이 변화·혁신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같은 선택을 반복하는 핵심 이유로 언더 찐윤을 거론한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지난 6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은 이념도 없는, 보수를 참칭한 사이비 레밍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여러 번 선거에서 패배한 전략임에도 확증편향·소탐대실을 근거로 같은 선택을 고집한다면, 무리 지어 절벽에서 떨어지는 레밍과 비교되는 수모를 또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선 또 빅텐트론이 반복되고 있다. 빅텐트는 국민의힘 주변을 배회하는 유령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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