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고’ 금감원 초강수 막전막후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3.08.22 10:00:00
  • 호수 14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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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한발 늦는 무능한 저승사자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은행 직원들의 횡령과 내부정보 거래, 무단 계좌 개설 등의 도덕적 해이로 금융감독원이 분주하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조사 1·2·3국 체제로 전방위 조사에 나섰다. 검사 출신답게 특기를 살렸다는 의견이 나온다.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은 권위를 되찾기 위해 강수를 뒀다. 금감원은 지난해 금융회사 검사 체계를 ‘종합·부문검사’에서 ‘정기·수시검사’로 개편했다. 일각에선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최근 금융권서 발생한 금융사고와 관련해 금감원 책임론이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상한
책임론

지난해 1월 금감원은 검사의 예측 가능성 및 실효성 제고를 위해 검사체계를 종합·부문검사에서 정기·수시검사로 바꿨다. 정기검사는 금융회사의 규모,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 등을 감안해 일정 주기에 따라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검사다. 수시검사는 금융사고 예방, 금융질서 확립, 기타 감독정책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실시하는 검사로 테마검사나 기획검사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당시 이찬우 금감원 수석부원장은 “종합검사는 금융회사 업무 전체를 일시에 점검할 수 있으나 사후적 시각에 중점을 둔 검사만으로는 예방적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며 “주기적인 정기검사 체계로의 전환을 통해 검사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금융회사별 특성에 맞춰 핵심·취약 부문에 검사 역량을 집중하게 돼 검사의 실효성을 높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금감원은 특정 검사사항에 대해 개별·다수 금융회사에 감사를 요구할 수 있는 자체감사요구제도를 도입했다. 


시범 실시안을 살펴보면 금융회사는 자체감사 요구사항에 관해 감사를 실시해야 한다. 그 결과를 이사회에 보고한 후 금감원에 보고하게 된다. 금감원은 금융회사 조치를 원칙적으로 수용하되 자체감사 활동이 부실하거나 허위 보고한 경우, 직접 검사한다.

이외에도 검사결과 처리의 투명성·수용성 제고 차원에서 검사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한다.

이 수석부원장은 “검사 결과의 조기 교부 및 충분한 설명을 의무화하고 쟁점이 있는 경우에는 검사국장이 직접 의견을 청취하고 다수의 임직원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통해 검사 결과를 충분히 리뷰하는 절차를 마련함으로써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검사 결과를 처리하겠다”고 강조했다.

검사체계 개편은 2022년 검사업무 운영계획 수립 시 반영됐다. 검사체계 전환 속에도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는 여전했다. 지난 4월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주가폭락과 주가조작 의혹이 터지자 이 원장은 “불공정거래 이슈나 금융기관 내부의 탈법 등을 약간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반성했다.

취임부터 금융소비자 보호와 불공정거래 근절, 금융시장 안정 등을 강조한 이 원장의 심기를 건드린 셈이다. 거듭되는 내부통제 강화 요청에도 은행권 금융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이에 금감원은 올해와 내년 은행 부문 중점 감독·검사 테마로 ‘은행 지배구조’를 선정했다.

은행 경영실태 평가서 지배구조·내부통제와 사회적 책임 비중을 확대했다. 

갈수록 더하는 은행권 비리 
검사 출신 원장 드디어 폭발


결국 전면전에 나섰다. 금감원은 내부통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자체 점검하라고 경고했다. 앞서 KB국민은행 직원들은 업무상 알게된 정보를 이용해 127억원의 주식 매매차익을 챙겼다.

지난 9일 금융당국은 상장사들의 증권 업무를 대행하는 KB국민은행 직원들이 미공개 중요정보를 이용한 행위를 적발해 검찰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이 직원들은 2021년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61개 상장사의 무상증자 업무를 대행하는 과정서 무상증자 규모와 일정 등의 정보를 미리 파악했다. 이를 주식 매매에 활용해 66억원가량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다.

무상증자란 주주에게 돈을 받지 않고 주식을 나눠주는 것을 말한다. 주주 입장에선 추가로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 더 많은 주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주식시장에선 호재로 통한다. 기존의 주주들에게 신주를 무상으로 나눠주는 것은 재무적으로 건실한 기업만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무상증가를 했다는 것은 건전성을 증명하기 때문에 대부분 주가가 오른다.

해당 부서 직원들은 은행 내 다른 부서 직원들을 비롯해 본인들의 가족, 친지, 지인들에게도 관련 정보를 전달했다. 이들도 주식거래를 통해 61억원가량의 부당이득을 얻었다.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부당이득 규모가 총 127억원에 달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국민은행 직원은 6~8명이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현재 비위가 입증돼 업무서 배제된 직원은 차장급 직원 1명이다. 나머지 직원들은 검찰 수사를 통해 구체적 혐의가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식 매매는 증권 범죄임에도 문제의식이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국민은행 내부 제보가 아닌 금융위·금감원이 포착한 것이다. 따라서 은행 내부에선 알고도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다. 올해 상반기 주가조작 사태 이후 금융당국은 자본시장 이상현상에 집중하고 있어 사건을 포착할 수 있었다.

계속 터지는
사건·사고

금융위는 “금융위와 금감원의 긴밀한 공조로 인한 성과”라고 강조했다. 양 기관은 매매분석, 금융계좌 추적은 물론 스마트폰 포렌식까지 동원했다.

신뢰가 생명인 은행에 치명적인 횡령사고도 여전하다. 금감원에 따르면 금융권 전체 횡령액은 지난해 1010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올해 7월까지 은행권 횡령액은 592억7300만원으로 2위다. 덩달아 금감원 책임론도 부상했다. 지난해 우리은행 700억원대 횡령에 이어 최근 경남은행에서도 500억원대 횡령 사건이 벌어졌다.

은행권 비위에 대한 감시와 처벌 수위가 강화돼야 할 시점이다.

금감원은 경남은행 투자금융부장 이모(51)씨가 총 562억원에 달하는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를 확인했다. 이에 경남은행은 최고리스크담당자(CRO)를 교체했다. 지난 17일 은행권에 따르면 정용운 CRO에게 지난 9일 업무배제 조치를 내렸다. 대신 BNK금융지주의 CRO인 윤석준 상무가 겸직하기로 했다. 


이씨는 2007년부터 올 4월까지 약 15년 동안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업무를 담당하면서 총 562억원을 횡령·유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 전 CRO는 2021년부터 IB사업본부, 투자금융그룹장을 역임한 이후 지난해부터 CRO를 맡았다. 경남은행은 정 CRO가 이씨와 업무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지난 4일 빈대인 BNK금융 회장은 계열사 경영진 회의를 열고 횡령 사고와 관련해 유감을 표했다.

고금리 상황이 지속된 탓인지, 실적에 눈이 멀어 비위행위를 저지른 경우도 있다. 최근 대구은행은 고객 문서를 위조하다 발각됐다. 대구은행은 2021년 8월부터 은행 입출금통장과 연계해 다수 증권회사 계좌를 개설할 수 있는 서비스를 도입했다.

지난 10일, 대구은행 직원들은 고객 동의 없이 예금 연계 증권계좌를 임의로 추가 개설했다. 이를 감지한 금감원은 지난 9일부터 긴급 검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금감원에 따르면 대구은행 일부 직원은 평가 실적을 올리기 위해 지난해 1000여건이 넘는 고객 문서를 위조해 증권계좌를 개설했다. 

은행장에 
책임 묻기로

해당 직원들은 고객을 상대로 증권사 연계 계좌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해당 계좌 신청서를 복사해 고객 동의 없이 같은 증권사의 계좌를 하나 더 개설했다. 직원들은 미동의 개설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계좌 개설 안내문자(SMS)를 차단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지난 6월30일 해당 건과 관련한 민원을 접수받고 자체감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한 금감원은 즉시 검사를 개시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임의 개설이 의심되는 계좌 전건을 철저히 검사하고 검사 결과 드러난 위법·부당행위에 관해서는 엄정하게 조치할 예정”이라며 “대구은행이 본 건 사실을 인지하고도 금감원에 신속히 보고하지 않은 경위를 살펴보고 문제가 있다면 이에 책임을 물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은행권 사고를 막고자 은행장 책임을 묻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은행장 확인서명이 들어간 내부통제체계 자체점검을 지시했다. 추후 내부통제 사고 발생 시 책임소재를 확실히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금감원은 지난 17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서 시중은행, 지방은행 등 17개 은행장과 함께 ‘내부통제 강화 방안을 위한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날 금감원은 금융사고 발생에 따른 내부통제 강화 방안을 주문했다. 간담회에 앞서 이재근 KB국민은행장은 최근 드러난 금융사고와 관련해 “심려를 끼쳐드려서 대단히 죄송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은행권은 내부통제체계 전반에 관한 종합점검을 은행장 주관하에 실시해야 한다. 점검 항목은 내부통제 혁신방안 이행 상황, 최근 사고 관련 유사사례 점검, 사고예방을 위한 내부통제 현황 등이다. 특히, 금감원은 단기 실적 위주의 성과지표(KPI) 개선, 위법·부당사항에 관한 관용 없는 조치 등 내부통제에 대한 자체 유인체계 마련도 요청했다.

이날 이준수 금감원 부원장은 “은행이 국민의 재산을 지켜준다는 신뢰가 유지될 수 있도록 내부통제 강화를 위한 특단의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당부했다.

횡령액 환수 고작 12%
실효성 없는 ‘셀프준법’

지난해 우리은행 횡령 사건 이후 은행권은 여전히 비리의 온상이다. 횡령사고 규모에 비해 횡령액의 환수는 저조한 실정이다. 최근 7년간 횡령액 중 환수된 금액은 224억6720만원으로 환수율은 12.4%에 그친다. 특히 은행의 경우 환수율은 7.6%(114억9820만원)에 불과하다.

금융당국은 은행권 임직원의 준법의식이 취약하고 내부통제의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분석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강민국 의원은 “금융권 내부통제 제도개선을 발표했음에도 횡령사고가 더 증가했다는 것은 대책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입증한다”며 “셀프 준법경영 문화 정착에만 집중한다면 횡령은 만연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은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8월 ‘금융권 내부통제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를 가동했지만, 비리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은행권 관계자는 “내부통제 시스템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도 직원이 신고를 누락하면 이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며 “결국 직원들의 윤리의식이 결여된 것”이라고 말했다.

내부통제 부실이 비단 일부 은행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원장이 법령상 최고 책임을 묻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만큼 최고경영자들은 제재를 피하기 어렵다. 비단 은행권만이 아닌 금융업 전반에 걸쳐 찬바람이 몰아칠 전망이다.

금감원 자본시장특별사법경찰(특사경)은 지난 10일 SM엔터테인먼트 주가 시세조종 혐의와 관련해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증권선물위원회는 카카오의 SM 주가 시세조종 의혹 사건을 패스트트랙으로 검찰에 이첩했다. 금감원 특사경이 검찰 지휘를 받아 수사하고 있는 사안이다. 특사경은 검찰과 4월6일 카카오와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같은 달 18일에는 SM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카카오는 올해 초 하이브의 SM 공개매수를 방해하기 위해 SM 주식을 대량 매입해 시세를 조종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카카오와 하이브는 SM 지분경쟁을 하고 있었다.

막중한
책임감

주가 상승으로 공개매수에 실패한 하이브는 공개매수 기간에 SM 발행 주식 총수의 2.9%에 달하는 비정상적 매입 행위가 발생했다며 금감원에 진정을 냈다.

이 원장은 지난달 17일 취재진에게 SM 수사와 관련해 “역량을 집중해 여러 자료를 분석하고 있고 수사가 생각보다 신속하게 진행 중”이라며 “실체 규명에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금감원은 최근 경영평가서 A 등급을 받았다. 이 원장이 취임 후 강조해온 금융시장 안정과 상생 금융, 내부혁신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A 등급 평가는 올해 금융사고와 무관하지만, 막중한 책임감에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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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