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따라잡기’ 행안부 큰 그림

경찰국 모자라 수사지휘권 쥔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행정안전부가 변화에 나섰다. 장관의 실질적인 경찰 지휘권이 약해 지휘·감독 체계 도입을 추진할 계획이다.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과 닮은 꼴이라는 평가다. 윤석열정부가 들어선 이후 검찰의 직접 수사권 범위가 넓어지면서 경찰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해당 안건이 추진될 경우, 경찰의 독립성이 증발할 수 있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난해 8월 ‘경찰 장악’ 논란에도 불구하고 경찰국 신설을 강행했다. 정부조직법 등에 근거해 경찰을 지휘·감독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는 논리다. 경찰 안팎에서는 수사 독립성 침해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행안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술 더 떠서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에 준하는 틀을 맞추는 분위기다.

정치적
중립 의무

경찰제도발전위원회는 지난 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11차 회의를 열고 안건별 추진 방향을 논의했다. 이날 위원회는 오는 23일 최종 권고안 발표를 앞두고 ▲현장경찰 역량 강화 방안 ▲자치경찰 이원화 방안 ▲국가경찰위원회 개편 방안 ▲행안부 장관의 경찰청 지휘·감독 체계 보완 방안 ▲경찰대학 개혁방안에 대한 의견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특히 행안부 장관의 경찰청 지휘·감독 체계가 보완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일부 위원은 장관이 실질적으로 경찰을 지휘·감독할 수단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상황이 발생하면 국회 등에서는 매우 높은 지휘·감독 책임 수준을 요구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위원회는 경찰 심의·의결 기구인 국가경찰위원회의 성격과 위원들의 정치적 중립 의무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국가경찰위 위원이 정치적 중립 의무를 훼손했을 때 책임 규정이 없다는 점과 현행법상 행안부 소속 자문위원회인데도 법적 성격에 관한 불필요한 논쟁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지난해 12월 국가경찰위가 행안부 장관을 상대로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한 데 대한 비판도 나왔다. 국가경찰위는 지난해 8월2일 제정된 ‘행안부 장관의 소속 청장 지휘에 관한 규칙’이 국가경찰위의 권한을 침해했으므로 무효라는 취지로 권한쟁의를 청구한 바 있다.

장관은 경찰청장에 대한 지휘권이 없으므로 지휘규칙 제정행위는 위헌·위법하고, 지휘규칙 제정 시 국가경찰위의 심의·의결을 거치지 않았다는 취지다. 헌재는 국가경찰위의 청구를 부적법하다며 각하했다.

위원회는 이달 말 열릴 예정인 최종 회의서 제도발전 권고안을 확정한 후 발표할 예정이다. 박인환 위원장은 “오늘 회의서도 경찰대 개혁방안에 관한 의견 대립이 팽팽했으므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표결해서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지휘·감독 체계 보완 방안 정해지면 추진
“법무부와 비교 후 논의…확정된 것 없어”

경찰제도발전위원회 관계자는 “최종 회의가 남았고 논의된 것들은 아직 추진 계획이나 검토 단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까지 논의된 건 법무부와 비교해 어떻게 장관의 권한과 경찰청 지휘체계를 보완할 것인지 여러 개선안이 나왔다”며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도 예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경찰 안팎에선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찰국에 이어 사실상 법무부와 다를 게 뭐냐는 주장도 나온다. 서울경찰청 한 간부는 “지난해 경찰국 신설로 독립성을 잃어버렸다는 인식이 늘었다”며 “행안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이 추진되면 또 다른 갈등을 불러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경찰청 관계자도 “독립성 증발을 넘어 경찰이 곧 ‘정부의 하수인’으로 전락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며 “검찰도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했을 때마다 마찰이 심했다. 우리라고 그러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이 장관은 경찰국 신설을 강행했다. 정부조직법에 따라 행안부 장관이 경찰을 지휘·감독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는 게 근거였다. ‘말 바꾸기 논란’에 휩싸인 건 이태원 참사 이후다. 이 장관은 지난해 11월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질의서 “경찰에 대한 일반적인 지휘·감독권이 없다. 특히 개별적 치안 상황에 대해서는 제가 지휘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책임 회피를 위한 말 바꾸기가 아니냐’는 지적이 일자 “(경찰에 대한)지휘 권한은 있으나 그 지휘 권한을 행사할 방법이 없다”며 “지휘·감독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행안부는 국가 재난·안전의 주무 부처다. 정부조직법에는 행안부 장관이 안전 및 재난에 관한 정책 수립·총괄·조정 등 사무를 관장한다고 돼있다. 재난안전법도 행안부 장관에게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행하는 재난 및 안전관리 업무를 총괄·조정하는 역할을 부여한다.

법무부와
뭐가 달라?

이태원 참사아 관련해 이 장관이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당 내부서조차 나왔던 이유다.

비판이 거셌음에도 이 장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11일 동남아시아 순방길에 오르면서 전용기 탑승에 앞서 이 장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귀국할 때는 이 장관에게 “고생 많았다”는 말을 건넸다.

경찰국의 업무 중에는 경찰의 중요정책 수립과 관련해 행안부 장관이 경찰청장을 지휘·감독하는 사항이 포함돼있다. 특히 행안부 장관의 경찰청장 지휘규칙에는 경찰청장이 ‘중요 정책 및 계획의 추진 실적’을 행안부 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또 ‘그 밖의 법령에 규정된 권한 행사 및 책무 수행에 필요하다고 인정해 행안부 장관이 요청하는 사항’도 보고 대상이다. 이 같은 막강 권력을 쥐고 경찰국의 보고를 받는 이 장관은 인사제청권이라는 칼날까지 휘두를 수 있게 됐다.

이 장관은 “행안부와 경찰을 연결하는 끈은 전혀 없다”며 “유일한 끈이라는 것은 경찰 고위직에 대한 (행안부 장관의) 인사제청권이 유일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행안부 장관의 인사제청권이 칼날이 된 시기는 경찰국 신설과 겹친다.

기존에는 경찰청장이 인사안을 추천하면 행안부 장관을 경유해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결정했으나 총경 이상(경정부터 대상)의 인사제청권이 실질화됐다. 형식에 그쳤던 제청권을 행사하면서 경찰 수뇌부를 주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경찰의 변화로 장관의 수사 개입 여지가 열렸다고 보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특히 검찰보다 인사와 지휘에 취약한 경찰의 특성상 현실화 가능성이 클 수 있다는 걱정도 많았다.

힘 실어주는
윤 대통령


서울 직협 관계자는 “범죄수사규칙상 관할서장은 수사를 지휘하고 보고받는다. 서장의 지휘자는 경찰청장인데, 과거의 개선안은 행안부 장관이 청장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결국 13만 경찰이 한순간에 장관 지시에 따라 수사하게 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경찰국 신설만으로 불만이 상당한데 법무부와 비교해 행안부 장관의 권한을 강화하는 건 경찰을 대놓고 통제하겠다는 비판이 대다수다. 한 경찰청 관계자는 “현재 법무부도 수사지휘권을 없애는 방향으로 변화를 시도 중인데 행안부 장관의 권한 강화 핑계로 보완하겠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우려했다.

경찰국 신설 직전 당시 경찰 대부분은 반대 움직임을 보였다. 이른바 ‘경란’으로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주도했던 류삼영 울산 중부경찰서장(총경)이 대기 발령됐고, 회의 참석 총경들에 대한 감찰도 진행됐다. 그러나 경찰 내부의 반발은 줄지 않았었다.

서울 광진경찰서 김성종 경감(경찰대 14기)은 당시 경찰 내부망을 통해 경감과 경위 등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 현장팀장 회의’를 열겠다고 밝혔다. 경찰 내부망에도 “나도 대기발령 시켜달라” “윤희근(당시 후보자)의 자진사퇴를 촉구한다” 등의 실명 게시글이 쏟아졌다.

경찰국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던 일선 경찰들도 징계 조치에 대한 비판 움직임에는 동참하고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활발했던 경란도 현재는 사그라든 상황이다. ‘검찰 하수인’이라는 시선을 극복하고 싶었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검수원복(검찰수사권 원상 복구)’ 시행령에 대한 반발이 작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경, 영향력 약화 독립성 사실상 증발
검, 검수원복·경찰 간접 비판 여론전


현재 검찰은 직접 수사권 일부를 회복하고 여론전에 나섰다. 특히 마약 수사 등 가시적인 성공을 적극적으로 치하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고 이태원 참사 보완수사 성공사례나 경찰이 연루된 사건 수사 결과를 강조하며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 무력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지난 3월6일부터 이틀 동안 부산지역 방문 일정을 소화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부산지검 서부지청이었는데, 개청 이후 검찰총장이 방문한 것은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서부지청을 찾은 이 총장은 취재진과의 약식 기자회견서 “직원 격려 차원”이라고 방문 목적을 밝혔다. 또 마약 수사 등 최근 부산지역 검찰이 발표한 사건들을 직접 언급하며 ‘수사 성과’라고 강조했다.

당시 이 총장은 “마약범죄특별수사팀을 만들자마자 부산지검서 해외로부터 밀수한 필로폰 50㎏을 압수하는 성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 총장의 행보를 두고 검수원복에 속도를 내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실제 검찰은 지난해 9월부터 검수원복 시행령으로 수사 범위를 확대한 뒤 각종 성과를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특히 부산지검은 마약범죄특별수사팀을 신설한 뒤 시가 1650억원에 달하는 필로폰을 압수한 사건을 공개했는데, 이례적으로 직접 언론 브리핑까지 나섰다.

지난해 부산지검은 보도자료를 통해 불구속 송치된 성폭력 피의자의 2차 가해 정황을 포착해 피의자를 구속한 사건 등 5건의 보완수사 성공 사례를 모아 공개하며 “검찰의 적극적인 보완수사 결과”라고 자평했다.

동부지청은 해외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자를 기소한 사건과 관련해 “경찰 수사에 묻힐 뻔한 일을 검찰의 시정조치 요구를 통해 밝혀냈다”며 검찰의 사법통제권한을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 1월에는 교육감 선거 과정서 일어난 금품 제공 관련 사건을 공개하며 검사에게 재수사 요청을 받은 담당 경찰이 수사 기밀을 피의자에게 알려줬다는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검찰의 재수사 요청에도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유지한 사건을 검찰이 직접 수사해 4명 전원을 기소했다는 사실도 함께 포함됐다.

위기감
무기력

최근에는 무인단속장비 납품 비리 관련 수사 결과를 공개하며 현직 경찰이 수사 정보를 흘리고 수사를 엉터리로 진행해 구속했다고 강조하는 등 경찰의 수사를 비판하는 동시에 검찰 직접 수사의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어필하고 모양새다.

경찰 내부에서는 일선의 수사 부담을 덜어주는 검찰의 보완수사 여지 확대 등에는 동의하면서도, 검수원복·수사준칙 개정 등 일련의 흐름 안에서 ‘경찰이 패싱당하고 있다’는 위기감·무기력증을 보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검수원복이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며 “지난해 검경협의체가 구성됐을 때부터 결국 법무부 뜻대로 될 것이란 말이 많았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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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