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억원 다단계 사기 ‘남양주 조희팔’ 쫓고 쫓기는 추적기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4.24 11:42:32
  • 호수 1424호
  • 댓글 2개

우즈베크, 필리핀… 피해자들이 잡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우즈베키스탄으로 도망친 200억원 사기 대부업체 사장을 잡은 건 누굴까? 바로 해당 업체로 피해를 입은 피해 당사자다. 피해자 세 명은 도망친 대부업체 사장을 잡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서 필리핀까지 갔다. 5일간의 쫓고 쫓기는 긴 여정이었다.

지난 17일 경기도 남양주서 200억원대 사기를 친 대부업자가 잡혔다. 이날 남양주남부경찰서는 50대 A씨에 대해 특수경제 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사채업자
사기꾼으로

경찰이 밝힌 A씨는 남양주 지역서 10년 이상 대부업체를 운영하며 봉사 및 향우회 활동으로 신뢰와 인맥을 쌓은 인물이다. 그는 “골프연습장 등 투자로 연 20% 이상 이익을 보장한다”며 투자자들을 모았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달 21일,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한 사실을 파악하고 여권 무효화 조치를 했고, 그 여파로 필리핀으로 이동했다가 발이 묶여 국내로 돌아와 공항서 체포됐다.

이렇듯 설명은 간단했다. 하지만 A씨를 잡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A씨에게 사기 피해를 본 피해자 3명이 직접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그를 회유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피해자들은 A씨를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A씨는 그저 안전한 투자처였다.

가족 전체가 총 8억원의 사기 피해를 본 김지선(가명)씨는 투자 종용을 1~2년 전부터 계속 받았다. 결정적으로 그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김씨의 어머니가 7~8년 전부터 A씨에게 안정적으로 돈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 어머니는 지인의 소개로 투자했다.

1000만원을 투자하면 30만원을 받는 수준이었다. 사람마다 기준은 모두 달랐지만, 은행보다는 훨씬 이자가 높았다. A씨는 김씨에게 “은행에 적금을 넣을 바엔 나에게 투자하는 게 좋다”고 조언하듯 말했다.

김씨도 처음에는 의심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투자해 이자를 수년간 받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A씨는 남양주서 호남향우회, 산악회, 성당, 봉사활동을 계속했던 데다 동네 유지였고 주변의 평판도 좋았다. 대부업체를 운영했지만 법정 이자를 잘 지키는 ‘안전한 대부업’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2021년 김씨의 어머니가 김씨에게 같이 투자하자고 했고 함께 A씨의 사무실에 방문했다. A씨는 “나한테 돈 빌린 사람이 많다. 지금 골프장 등 부동산 개발을 하고 있다”며 투자를 종용했다. 

대부업체 운영하며 지역 유지로 ‘떵떵’
“은행보다 좋아” 연 20% 이상 이익 보장

김씨는 그 자리서 투자약정서를 작성했다. 투자약정서에는 ‘‘을’이 ‘갑’에게 직접 투자하고 ‘갑’이 ‘제3자’에게 투자하는 방식’ ‘‘갑’이 알선하는 금전차용희망자 ‘제3자’로부터 ‘을’ 명의로 담보를 제공받고 ‘을’이 그 ‘제3자’에게 직접 대여하는 방식’이라고 적혀 있다.


한동안은 이자가 잘 들어왔고 김씨도 안심했다. 문자나 카톡으로 안부를 물어보기도 했고, 자신이 알고 있는 투자 방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힐스테이트 ○○는 현 시세 8.6억~9억원이다. 차주 직장인 1주택자다. 5억7000만원이 필요하다” “요즘 돈을 많이 찾고 있다. 좀만 더 투자해서 용돈 벌어라. 기회는 이틀 남았다. 원래 기존에도 다른 사람보다 이자를 더 많이 준 것”이라는 식이었다.

김씨 가족이 야금야금 투자한 금액만 8억원. 장시간 안전하게 이자를 받던 김씨 어머니는 지인들까지 A씨에게 연결했다. 피해는 이런 식으로 커졌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만 투자한 것이 아니다. A씨 사무실 건물의 청소부, 시장서 장사하던 상인, 노후자금을 갖고 있던 노부부 등도 투자했다. 주위서 이자를 많이 준다는 소문이 나자 너도나도 투자했다.

A씨가 김씨에게 마지막으로 돈을 준 것은 지난달 15일이다. 그러고선 4일 뒤인 19일에는 갑자기 A씨로부터 급박한 목소리로 “음주운전 교통사고가 났다. 합의해야 하는데 합의금이 없다. 1000만원만 빌려달라”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김씨 가족은 “당장 줄 수 있는 현금이 없다”고 거절했다.

“믿고 맡겨봐”
투자자 모아

결국 A씨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렸는데 그 돈을 들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도망친 것이다. A씨가 한국에 없으니 이자를 주는 사람도 없었다. 피해자들은 사기당한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의 대응은 뜨뜻미지근했다. 경찰은 “이미 A씨가 해외에 도주했다. 인터폴에 요청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피해 금액은 계속 커졌다. 몇몇 피해자는 사기당한 사실을 알고 난 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다 가족에게 발견되기도 했다. 피해자는 입을 모아 A씨를 빨리 잡아달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피해자 3명이 모여 A씨를 잡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났다. 이들 3명(B씨)은 현지 영사관에 방문했지만 협조를 전혀 받지 못했다.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B씨가 A씨를 찾기 위해 수소문한 곳은 여행사였다. A씨는 우즈베키스탄 언어인 우즈베크어나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지 통역사 없이 우즈베키스탄서 지낼 수 없었다. 

현지 통역사 수소문 중 A씨를 만난 적 있다고 밝힌 한 사람은 그의 개인 정보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면서 영사관에 찾아가라고 조언했다.

B씨는 영사관을 찾아 “한국서 A씨에 대한 적색수배(체포영장이 발부된 중범죄 피의자에게 내리는 국제수배)가 곧 내려질 것이다. 우리가 피해 당사자인데 좀 도와달라”고 말했지만, 영사관으로부터 “여기서 분란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대답만 들었다.

처음에는
꼬박꼬박


당시 B씨 일행은 A씨가 거주하고 있는 호텔을 알아낸 상태였다.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키스탄에 체류 중인 외국인에 한 해 3일에 한 번씩 ‘거주증 신고’를 해야 하는데, 이를 추적해 알게 된 거주지다. 

이 같은 사실을 영사관에 알려도 영사관에선 “곤란한 일을 만들지 말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영사관이나 현지 경찰도 도와주지 않으니 우즈베키스탄 현지서 직접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한인 식당이나 한인 마을을 돌며 사진을 들고 물색에 나섰다.

그러다가 기적같이 A씨를 알고 있다는 사람을 찾아 전화번호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고 A씨에게 연락했다. 도망 중인 사람에게 ‘너 잡으러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면 누가 만나줄까? 일행 중 그나마 피해 금액이 가장 적은(1억6000만원) 일행 중 한 명이 나서 A씨를 회유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A씨의 변제 능력 여부 ▲한국으로의 귀국이었다.

B씨 일행은 A씨가 묶고 있는 호텔에 방문해 10시간이 넘게 이야기했다. 이 과정서 A씨는 “돈은 없다. 이곳저곳에 돈을 사용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을 믿지 마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 두려워하면서도 돈이 없다고만 했다. 

B씨 일행은 A씨에게 “너가 필리핀 마닐라로 가면 도망가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말했고, A씨 역시 이에 동조해 필리핀으로 향했다. 문제는 마닐라 숙소를 구할 돈이 없었다. 장기체류를 하게 되면 숙박비가 많이 든다. A씨는 스스로 여자친구에게 5000만원을 달라고 전화 요청했지만, 여자친구는 돈이 없다고 거절했다. 

충격을 받은 A씨는 B씨 일행이 모두 잠이 든 사이 도망쳤다. 당시 핸드폰 2대를 갖고 있던 A씨는 한 대는 남겨두고 한 대만 가져갔다. 남겨놓은 핸드폰에는 “죽음으로 죄를 갚겠다”는 유서를 남겨놨다. 


“일단 돌아가자” 현지서 만나 회유
“한 푼도 없다” 유서 남기고 사라져

도망치는 A씨를 본 사람은 숙소 가사 도우미였다. 도우미가 봐도 A씨의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양말을 신지도 않은 채 길거리를 걸어 택시를 탔다. 그 방향으로 1시간 반 넘게 가면 바닷가 마을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B씨 일행도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가는 작은 동네와 붙어 있었는데 그 동네를 아무리 뒤져도 A씨를 찾을 수 없었다. 8시간 뒤, 한인에게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400명 넘게 있는 필리핀 한인 단체 카톡방에 “바닷가서 한국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데 누군지 아는 사람 있나요”라는 글이 사진과 함께 올라온 것이다. A씨를 찾고 있었던 B씨 일행에게 이 연락이 닿았다.

A씨는 그 지역 한인회장이 경찰로부터 인계받아 보호 중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인회장에게 가는 도중 A씨는 다시 도망쳤다. 도망치면서 결제하지 않은 병원비는 B씨 일행이 결제했다. 쫓고 쫓기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B씨 일행도 지칠 대로 지쳤다. 다만, A씨의 여권을 B씨 일행이 가지고 있었는데, 여권은 전달해줘야 했다.

이 시점부터 A씨가 사기꾼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한국의 사채업자, 향우회 인맥이 A씨가 갈만한 곳에 연락한 것이다. 이때부터는 한인회장이 B씨 일행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A씨는 도망쳤지만 멀리 가진 못했고 필리핀서 도망치던 중 다른 한인에게 사기를 당했다. 들고 있던 골프 가방, 서류 등 마지막 물건들을 모두 뺏기자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결국 A씨를 잡은 것은 B씨 일행이 우즈베키스탄까지 가서 회유한 덕분이다. 필리핀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경찰은 B씨 일행에게 수사를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경찰은
어디에?

B씨 일행은 “A씨가 돈이 없었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한국에 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경찰의 너무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했다. 결국 피해자가 우즈베키스탄, 필리핀까지 가서 잡아온 것”이라며 “처음 뉴스에 보도되길 ‘공조수사’로 A씨를 잡았다고 발표했다. 전혀 그런 것(우리 도움 내용)이 없어서 억울하다. 지금 피해자들이 너무 많다. 더 적극적으로 수사해 A씨가 재산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alsw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다단계 사기업체 내부자료
“과세 근거로 삼아도 적법”

다단계 사기업체의 내부자료라도 신빙성이 있으면 과세 근거로 삼아도 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지난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김순열 부장판사)는 A씨가 서울 성북세무서장을 상대로 ‘종합소득세 부과 처분을 취소하라’며 낸 소송을 최근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A씨는 외환 차익거래 사업을 벌인 B사에서 2014∼2016년 본부장으로 근무했다.

B사 설립자는 폰지 사기(다단계 금융사기)로 약 5년간 1만2000명으로부터 1조740억원을 편취한 혐의(특가법상 사기)로 2017년 12월 대법원에서 징역 15년을 확정받았다.

A씨 역시 회사의 사기행위에 동조한 혐의(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기소돼 2020년 1월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확정받았다.

그는 재직 기간 회사와 금전소비대차계약 및 투자약정을 체결해 약 2년간 매월 이자 명목으로 대여금의 5%, 이익 배당금 명목으로 투자금의 2%를 지급받았다.

종합소득세 부과 처분 취소 소송
“피해액 커도 사업소득액 산정 무관”

과세당국은 A씨가 이렇게 받은 이자·사업소득 약 5억8000만원에 대한 종합소득세 신고를 누락한 사실을 확인하고 2020년 9월 그에게 세금 1억9000만원을 부과했다.

A씨는 “당국이 아무런 관리·감독을 받지 않은 불법 다단계 회사가 만든 자료를 토대로 세금을 산정했기 때문에 근거과세 원칙에 반한다”며 과세처분에 불복하는 소송을 냈다.

하지만 재판부는 B사 자료에 신빙성이 있고, 이를 근거로 한 과세 처분도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B사 자료 내용 중 특별히 사후적으로 변경됐다고 인정할 만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며 특히 “폰지 사기는 오직 다단계 구조에 참여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토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투자금·수익금 지급 현황을 장부에 기계적으로 정리하는 게 사업 유지의 필수 요소가 된다”고 설명했다.

자금거래를 수시로 기록하는 만큼 장부의 신뢰도가 높다는 취지다.

A씨는 “B사에서 받은 돈보다 B사에 줬다가 돌려받지 못한 투자 피해액이 더 커 사실상 사업소득이 없었음에도 종합소득세를 부과한 것은 실질과세 원칙에 반한다”고도 주장했다.

재판부는 “설령 A씨가 받은 수당보다 재투자로 인한 투자 피해액이 더 크더라도, 재투자는 총수입금액에 포함한 수당을 처분하는 한 방법에 불과해 사업소득액 산정과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민>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