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8년 만에 원내 입성 진보당 강성희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4.10 10:10:25
  • 호수 14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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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9.4%서 39.07%로 대역전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너무도 뜨거운 사랑과 지지를 보내주신 전주시민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저의 당선은 개인 강성희의 승리, 진보당의 승리를 넘어서 전주시민의 위대한 승리다. 윤석열 검찰 독재를 심판하고 새로운 정치를 향한 전주시민의 열망이 나를 통해 표출된 것으로 생각한다. 전주시민의 선택을 가슴에 새기고 검찰 독재에 맞서 싸워 이기겠다.” (강성희 당선인)

지난 5일 전국에서 유일하게 치러진 전주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서 진보당 강성희 후보가 당선됐다. 강 당선인은 지난 6일 개표가 끝난 가운데 39.07%인 1만7382표를 얻었다. 무소속 임정엽 후보는 32.11%인 1만4288표를 얻어 2위에 그쳤다.

이번 4·5 재보선에 출마한 후보는 6명이다. 당선자인 기호 4번을 포함해, 기호 2번 국민의힘 김경민 후보, 기호 5번 무소속 임정엽 후보, 기호 6번 김광종 후보, 기호 7번 안해욱 후보, 기호 8번 무소속 김호서 후보다.

민주당 책임
후보 안 내

진보당의 첫 국회 입성이 결정됐다. 첫걸음은 지난해 12월12일, 전북 전주을 국회의원 재보선 출마였다. 이번 재보선은 더불어민주당 출신 무소속 이상직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당선 무효형으로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선거가 치러졌다. 

이 의원은 21대 총선이 열리기 직전 해였던 2019년 설날 무렵 1월과 추석 무렵 9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명의로 된 선물을 선거구민 377명에게 돌린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이었던 이 의원은 2646만원 상당의 전통주와 책자를 선물한 것으로 조사됐다.


선물을 받은 명단엔 이 의원 지역구 소속 도의원과 시의원 등 유수의 정치인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의원은 2020년 2월과 3월 민주당 당내 경선을 앞두고 여론조사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권리당원 등에게 일반 시민인 것처럼 거짓 응답하도록 권유하고 이를 유도한 문자메시지 등을 발송한 혐의도 있다.

또 선거 공보물 ‘후보자 정보공개 자료 전과기록 소명서’란에 허위 사실을 기재한 혐의도 유죄로 판단됐다. 대법원은 “과거 선거 출마 때 자신의 전과가 크게 부각됐던 전력 등도 있어 이 의원이 허위임을 잘 알면서 전과기록에 관해 허위의 소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 의원은 주가조작 교사 등 혐의로 벌금 전과가 있다.

다만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20대 총선 당시 당내 경선서 탈락한 이유를 허위로 발언한 부분 등은 무죄로 확정됐다. 대법원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당시 허위의 사실을 공표했음을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봤다.

이를 감안해 민주당은 책임 정치 차원에서 전주을 재보선에 후보를 내지 않았다. 이 기회를 잡은 것이 진보당이다.

4·5 전주을 재보선 화제의 당선
윤정부 향한 쓴소리 멈추지 않아

강 당선인은 전주을 재보선을 준비하며 공약으로 ▲농협중앙회 이전 ▲금융공기업 유치 ▲지역 공공은행 설립을 통해 금융허브도시 전주로 도약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농협중앙회 이전에 관해서는 이를 통해 금융공기업 유지 특별위원회, 전북형 공공은행 등을 구성·설립해 전주의 새로운 동력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강 당선인은 “농협중앙회 유치와 금융공기업 이전은 옛 대한방직 부지 개발 문제에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며 “불가능한 초고층 타워나 특혜 개발서 벗어나 공영개발 방식으로 전환해 농협중앙회 이전 등이 이뤄진다면 개발을 둘러싼 소모적 논란을 종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아울러 “유권자들을 만나다 보니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양당 체제에 대해 염증을 내는 분이 많았다. 한 석의 기적을 이뤄내겠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진보당의 움직임은 실질적이었다. 지난 1월16일 진보당에 따르면 당은 지난 1월14일 오후 농협중앙회 전북본부서 3차 중앙위원회를 열고 ‘전북 전주을 재보선 승리’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1분기 사업계획을 확정했다. 중앙위는 강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전주서 열렸으며, 회의에는 중앙위원과 2024년 총선 후보 등 300여명이 참여했다.

진보당은 중앙위 회의에 이어 열린 재보선·총선 승리 결의대회를 통해 “이번 재보선은 윤석열 검찰 정권 심판과 정치세력을 교체하는 선거”라며 “중앙당과 시도당이 정책, 조직, 홍보 상근자 파견을 전면화하는 등 반드시 전주을 재보선서 승리하겠다”고 강조했다.

진보당 총집합
한 석의 기적

강 당선인은 전주을 재보선을 다짐하며 이날 “윤석열정부의 무능과 무책임한 모습에 전주시민들은 절망하고 분노하고 있다. 시민들이 더 절망하는 것은 무도한 윤석열정부의 폭주에 당당히 맞서 제압할 정치세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번 선거는 국민의힘 정운천 후보와의 대결이 아니라 윤석열과 강성희의 대결이며, 전주에서 윤석열정부 심판의 신호탄을 쏘아 올려 진보당의 2023년 원내 진출을 실현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희숙 진보당 상임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 독재를 휘두르며 재벌과 대기업을 대신해 노동자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이번 전주을 선거를 윤석열 정권 심판 투쟁의 시작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국민의 삶을 지키는 정치,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정치는 지방권력만으로 불가능하다. 1987년 이후 지속돼온 보수 양당 체제에 균열을 내고, 저들만의 국회에 선명한 진보의 깃발을 꽂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당선인은 후보 때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의 아들이 받은 50억원이 뇌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법원 판결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이번 ‘50억 뇌물’ 무죄 판결은 상식과 사법 정의를 송두리째 짓밟은 폭거이며 ‘제 식구 감싸기’ 부실 수사로 ‘유검무죄’를 만든 검찰 카르텔이 빚어낸 참사”라고 비난했다.

지난 3월 4·5 재보선이 임박했을 때도 윤정부를 향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강 당선인은 “윤 대통령이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영본부 서울 이전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지난해 80조원 손실이 난 국민연금 개선방안 전면 검토를 지시하면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투자 전문인력 유출이니 기금운용본부의 서울 이전을 검토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것”이라며 “이관섭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은 윤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나,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기금운용본부만이라도 지부 성격으로 나눠 서울로 이전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해 ‘서울 이전’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윤 대통령이 직접 ‘서울 이전 불가’ 입장을 천명하길 바란다. 정말 대통령이 서울 이전을 지시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직접 공식 입장을 천명해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 지금과 같이 대통령실 관계자의 발언에 따라 ‘서울 이전’설이 그치지 않는 상황을 방치하면 안 된다”고 압박했다.

어떻게
민심 얻었나


이처럼 강 당선인은 후보 시절 지속적으로 윤정부를 향한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4·5 재보선 결과로 이어진 것일까? 이는 강 당선인의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차 여론조사에서 강 당선인 후보 지지율은 9.4%, 2차 조사에서는 15.5%였다. 마지막 조사인 지난달 22일 전주MBC 의뢰로 진행된 전주을 국회의원 재보선 지지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가 강 당선인이었다. 25.9%, 오차범위 내 1위였다. 2위는 임정엽 후보였다.

전주을은 전주시 완산구 19개동 중 9개동을 묶은 선거구다. 전주 중심인 서신동부터 삼천동, 서부신시가지 개발사업으로 2010년대 중반부터 조성된 효천지구 신도시가 있는 효자1~5동 등이 전주을이다. 총 8만8000세대, 19만7000명이 거주 중이다.

지난해 6월, 8대 지방선거 전북도지사 투표서 전주을은 김관영 민주당 후보가 75%, 조배숙 국민의힘 후보가 24%를 득표했다. 2018년 7대 지방선거에선 민주당 후보 61%, 민주평화당 후보 25%, 정의당 후보 7% 순이다. 2015년 6대 지방선거는 민주당 62%, 새누리당 24%였다.

2011년 5대 역시 민주당 60%, 한나라당 23%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 65%대 나머지 정당 합계 35% 구도다.

이렇듯 과거 진보당의 전주을 성적은 저조했다. 전신인 민중당은 21대 총선서 총투표수 9만4000여표 중 604표를 받았다. 득표율 0.6%다. 지난 19대 대통령선거에선 11만6000여표 중 55표를 득표했는데 당시 허경영 후보가 받은 표는 629표였다. 지난 지방선거 광역비례대표 정당투표에선 5만6000표 중 588표를 얻었다. 득표율은 1.03%다.


거대 양당에 염증 난 전주시민
“금융허브도시 전주로 도약하겠다”

이 같은 선거 결과는 전주시민의 민심이 거대 양당을 떠난 게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전주시민들은 “윤석열 대통령은 거꾸로 타는 보일러 같다” “민주당이 179석을 가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한다. 정권을 뺏긴 데는 이유가 있다” “전주가 민주당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세대 이야기다. 말만 많고 실제 개발은 더디다” “전주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 여태까지 (민주당이) 집값이나 올려놨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보당은 어떤 방식으로 전주시민의 민심을 얻었을까? 강 당선인이 지난 11월 대출금리인하 운동본부장을 맡아 ‘전북은행 대출금리 인하 운동’을 벌였던 바 있다. 전주에 본점을 둔 전북은행은 예대금리차가 전국 최고 수준이었고, 이는 그가 대출금리인하 운동본부장을 맡은 이유다.

당시 강 당선인은 “서명받으러 상가를 돌면 대출이자 부담이 얼마나 커졌는지 실감한다. 사장이 직원을 다 모아 서명을 독려한다. 옆 가게 사장도 부른다. 뜨거운 반응이다. 하지만 이 반응이 뭘 말하는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정말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더 가다가는 큰일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도 지금을 ‘경제위기다. 비상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장관들을 모아두고 비상경제 민생회의를 생방송으로 중계하지 않나”며 “방향이 틀렸다. 기업, 금융시장만 경제주체가 아니다. 이런 위기서 제일 어려움에 부닥친 경제주체는 바로 서민들이다. 그런데 서민들에게 어떤 보호장치가 있나”고 반문하기도 했다.

결국 강 당선인의 이번 당선의 비결은 서민들이 가장 가려워했던 부분을 정확하게 긁어주려 했다는 데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게다가 후보 시절, 전주 시내는 ‘어딜 가나 진보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진보당 운동원 및 자원봉사자들이 도심 사거리, 먹자골목 번화가, 아파트 단지 입구, 동네 마트 앞, 버스 종점 차고지, 천변 산책로 등 전주 곳곳을 활보했다. 유권자들 사이에선 “진보당 강성희 후보만 보인다”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을 찍어줘야지” 등의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전주을 투표율은 26.8%로 재보선 중 투표 참여가 가장 저조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처럼 이번 재보선은 유권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받았지만, 새로운 정치 대안을 원했다는 반증이다.

강 당선인이 비록 1년여의 짧은 잔여임기지만 원내로 진출하면서 전주을은 1년 뒤 치러질 총선서 전국 최대 격전지가 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2016년 보수정당 후보로는 전주을에서 당선됐던 정운천 의원이 출마한다면 국민의힘과 민주당, 진보당, 정의당 등의 다당 체제의 경쟁구도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차기 총선의 민주당 입지자들에게 있어 강 당선인의 등장은 부담이 될 수 있다.

1년 뒤 총선
최대 격전지

지역정가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 일당 독점의 기득권 정치에 대한 텃밭 유권자들의 민심이 이번 전주을 재보선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의 필요성이 표출된 셈”이라면서 “차기 총선서 전주을이 최대 격변지로 급변했으며, 민주당 입지자들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한편, 강 당선인은 서울 출생으로 휘문고와 한국외대를 졸업한 후 현대자동차 전주 비정규직 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국택배노동조합 전북지부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alsw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4·5 전주을 재보선 국민의힘 성적은?

4·5 전주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서 국민의힘 후보가 후보 6명 가운데 5등에 그치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국민의힘 김경민 후보는 이번 재보선서 3561표를 얻어 8.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진보당 강성희 의원(39.07%), 무소속 임정엽(32.11%), 무소속 안해욱(10.14%), 무소속 김호서(9.15%) 후보에 이은 5등이다.

김 후보는 지난해 지방선거서 전주시장 후보로 국민의힘 호남 지역 지자체장 후보 중 최다 득표율인 15.54%를 올려 이번 재보선서 선전을 기대했으나 1년 전에 비해 희미해진 존재감만 확인했다.

특히 김기현 당 대표가 두 번이나 전주를 찾아 김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며 호남의 교두보를 마련하려고 애를 썼으나 무위에 그쳤다.

국민의힘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호남 민심 풍향계’인 이번 선거서 15% 이상 득표율을 내심 기대했다.

당초 국민의힘 전북도당 위원장인 정운천 국회의원(비례대표)이 출마하려고 했으나 돌연 출마를 접으면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진 김 후보에게 여당표가 몰리지 못한 게 패인으로 분석된다.

국민의힘 전북도당 관계자는 “유권자의 뜻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선거 결과를 숙고하고 내년 총선서 약진할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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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